메트로人 머니 산업 IT·과학 정치&정책 생활경제 사회 에듀&JOB 기획연재 오피니언 라이프 AI영상 플러스
글로벌 메트로신문
로그인
회원가입

    머니

  • 증권
  • 은행
  • 보험
  • 카드
  • 부동산
  • 경제일반

    산업

  • 재계
  • 자동차
  • 전기전자
  • 물류항공
  • 산업일반

    IT·과학

  • 인터넷
  • 게임
  • 방송통신
  • IT·과학일반

    사회

  • 지방행정
  • 국제
  • 사회일반

    플러스

  • 한줄뉴스
  • 포토
  • 영상
  • 운세/사주
오피니언 > 홍경한의 시시일각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과 노동의 가치

같은 한 끼의 식사라도 가난한 이들에겐 비싸다. 그 가여운 한 끼를 먹으면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한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문화적 기여도에 비례한 대우는 부족하며, 예술적 완성도를 위한 노동에서 또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일쑤다. 아니, 노동 가치에 대한 인정은 고사하고 200여개를 넘나드는 공사립미술관과 600여 갤러리에 몸담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나마 그 알량한 일자리조차 언제 잃어버릴지 모르는 불안을 항상 안고 살아간다. 전업창작자들과 매개자(비평가, 기획자 등)들 역시 연 평균 순수입 200만원대를 유지한 채 간신히 삶을 잇는다. 특히 청년예술가들은 예전보다 더 많이 노동하지만 받는 건 더 적은 소득불평등, 기회불평등, 분배불평등의 중심에 있다. 어쩌다 획득 가능한 것들마저 '재능기부'와 '열정페이'라는 미명 아래 부당함을 당연시 수용해야 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예술계에서 재능기부와 노동착취는 한 끗 차이다. 어떤 관점,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재능, 노동, 능력이라도 사회적 기여인지 공짜노동 혹은 자원봉사인지가 달라진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판단은 대체로 권력과 지위 등 '가진 자'들의 몫이다. 예를 들면, 보상이라곤 달랑 운송료뿐이지만 미술관 소장품이 된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은 채 작품을 미술관으로 보내야 했던 한 작가의 사례가 그렇다. 언뜻 보기에 합의된 거래 같지만 실은 미술관의 권위를 이용해 소장품 목록을 거저 채우려는 질 나쁜 예에 불과하다. 차후 합리적 지불에 제동을 거는 좋지 않은 기록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술관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예술노동의 교환가치를 재능기부로 미화한 사례라는 점이야말로 심각한 지점이다. 이밖에도 '민생고'를 이유로 유명작가들을 보조하며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무명작가들의 삶, 어시스턴트로 첫발을 내딛는 대학·대학원생에게 '배움'을 빌미로 가해지는 사실상의 무상노동, 경제적 우위에 있는 자본계급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수단화 및 도구주의적 인간관은 우리 주위에 흔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노동 가치에 관한 소외의 의미적 전제조건은 노동착취가 의존하는 전제이다. 자본을 비롯한 온갖 권력에 의한 새로운 신분체제와 계급주의, 그로부터 생성되는 노동의의의 열악성은 지배적인 생산관계로서 실존하는 현상이다. 허나 사회가, 미술계가 무관심한 사이 가진 자들에 의한 잉여가치의 무상 전유는 속도를 내고, 누군가의 소중한 유무형의 자산과 재능을 무료로 사용하려는 변질된 노동인식과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한 유무형의 수탈은 갈수록 리얼리티를 띠고 있다. 여기에 시대의 양심이랄 수 있는 미술계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제 살길 찾기에만 급급한 양태는 개선의 길을 제시하기는커녕 불합리한 예술계 노동체계 및 가진 자들에 의한 계급폭력의 역사를 끊지 못하는 또 하나의 배경이 되고 있다. 안타까운 건 그럼에도 돈 없고 배경 없이 흙 수저로 태어난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민생은 뒷전인 채 권력쟁투에 눈 먼 싸움질로 허송세월하면서도 세비에서만큼은 한 목소리로 '셀프인상'하는 국회의원들의 뻔뻔함조차 갖고 있지 않음을 자책하며 오늘을 '살아 넘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애써 견디는 것이 전부다. 허긴, 소위 미술을 안다고 자처하는 자들까지 예술가에게 등급을 매긴 '미술창작대가기준안'을 제시하고, 미술생태에 대한 이해 없이 산술적 경력을 사례의 잣대로 삼는 현실에서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까 싶기도 하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12-09 14:22:49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떠도는 작가들

창작스튜디오는 예술가들이 예술 및 문화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일정 기간 작업실을 옮겨 작업하며, 입주 기간 동안 거주 및 제작비용과 설비, 시설 등의 지원을 받는 공간을 말한다. 작업실 지원에 기반한 창작스튜디오가 1년 단위 공간 제공이라는 형태로 절충되면서 레지던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경우를 묶어 통상 ‘창작공간’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예술가 양성 및 창작 진흥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국내 창작공간들은 짧으면 3개월, 길면 1-3년이라는 기간 동안 작가들에게 작업실을 임대한다. 4-5년 이상 머문 작가도 드물지 않은 일부를 제외하곤 국내 200여 안팎의 공사립 창작공간 대부분이 유사한 입주기간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의 많은 미술작가들은 찬바람이 부는 이맘때면 꽤나 분주해진다. 12월부터 새해 1-2월 사이 종료될 창작공간 입주기간에 맞춰 미리 다른 작업공간을 알아봐야 하고, 10-11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창작공간 공모일정에 따라 서류 및 인터뷰 심사를 받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창작공간 입주 공모 시기가 오면 작가들은 일단 작업을 멈출 수밖에 없다. 입주신청서, 포트폴리오, 작품 활동 계획서와 같이 작성해야할 서류가 많아 진중하게 앉아 뭔가를 그리거나 만들 짬이 없다. 더구나 과학이나 수학이 아닌 예술에서 어떤 작품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도 이러이러한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는 계획을 세워야 하고, 학교에서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포트폴리오를 작성하는 일자체가 그들에겐 곤욕이다. 특히 많은 창작공간들이 요구하는 ‘지역연계’에 관한 아이디어는 그렇잖아도 어려운 계획서 작성을 더욱 힘들게 한다. 지역을 말하지만 지역에 정착하기 어려운 단기 입주를 통해 예술가들이 지역사회에 개입할 수 있다는 발상자체가 터무니없는데다, 작가가 오랫동안 지역에 거주하면서 작가 스스로 지역을 이해하고 주민과 호흡하며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렇다. 그래도 선정되려면 주문한 양식에 맞춰 억지로라도 써야 한다. 단발성임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의 지역참여가 시민 문화예술향유를 확장하고 도시재생이라는 보다 큰 흐름에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 정부와 지자체, 위탁기관들의 막연한 정책적 신념을 거스르면 안 된다. 지역주민 및 학생과 연계한 미술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해야 하는 조건도 감수해야 하고, 예술과 작가자체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도구화할 소지 등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서류도 서류지만 당락의 불안감도 붓을 들기 어렵게 하는 이유다. 선정되면 1년이라는 작업시간을 확보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대비책까지 고려해야 한다. 허나 대개 대안이 없다. 창작공간 입주를 희망하는 작가들의 다수는 물론 한국미술인 80%가량이 월 100만원 미만의 수입에 불과한 현실에서 개인용 작업실을 구하는 건 마음처럼 녹록한 게 아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붙어야 한다는 초조함이 크다. 이런 현상은 해마다 되풀이 된다. 바늘구멍 같은 입주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여기저기 공모에 응해야 하고, 선정되든 떨어지든 잠시 머물다 옮겨야 하는 도돌이표 같은 삶, 떠도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 그렇기에 작가들에게 겨울은 유독 춥다.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에 위치한 창작공간일지라도 작업을 잇기 위해 입주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은 싫든 좋든 미술계 유목민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11-25 15:01:53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원고료 2만원의 충격

몇 해 전, 모 지자체가 주최하는 미술행사의 주요 위원직을 맡은 적이 있다. 행사전반의 운영방향을 결정하고 예산까지 들여다보는 막중한 자리였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둬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권력을 쥔 핵심인사에게 밉보여 그의 '패밀리'에서 제외되었다는 게 맞겠다. 당시 감정을 글로 옮기자면 그야말로 '씁쓸하거나 홀가분하거나'였다. 어딜 가나 존재하는 계파와 코드, 지연과 학연을 배경으로 한 패거리정치의 민낯에 씁쓸했고, 수정되지 않을 것을 느끼면서도 매번 부딪히고 좌절하던 과정을 그만해도 된다는 점에선 홀가분했다. 책임의 무게에 미치지 못하던 대가의 불균형을 더 이상 체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도 미련에서 멀어진 이유였다. 물리적 거리만 해도 하루를 온전히 소비해야 하는데다, 몇날 며칠의 연구와 고민을 거쳐 서너 시간 이상 회의 또는 토론에 임한 보수치곤 매우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 중 미술매개자들을 대상으로 한 저임금 노동구조는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지난 4월 정부까지 나서 '미술진흥중장기계획'을 발표하며 비평가에 대한 처우개선 및 양성 기조를 밝혔지만 한해가 저무는 오늘까지도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여전히 6000원 수준의 고료를 책정한 채 평론을 청탁하는 정부 및 지자체 산하기관이 드물지 않고, 각종 수당 역시 겨우 몇 만원에 불과한 곳도 수두룩하다. 심지어 한 달 내내 작성한 평론을 보냈더니 원고료로 달랑 2만원을 입금해 충격을 안긴 지역재단도 있다. 살아가는 곳은 현실인데 노동의 대가는 초현실주의적인 현재를 말하면 혹자는 '안하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그렇다. 그런데 스스로도 민망해서인지 기관 담당자들은 대체로 섭외 승낙 후 또는 현장에서야 상세한 안내를 한다. 설사 알게 된들 돈 몇 푼에 연연하는 쫀쫀한 사람인 냥 취급될 듯싶어 평론가들의 다수는 노동의 값이 얼마인지는 따지지 않는다. 원체 돈 얘기를 꺼리는 미술계 분위기에다 무언가에 기여한다는 사명감, 책임감, 역할론 따위가 대두될 경우 마음과 달리 입은 더욱 무거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니다싶어 공식적으로 항의한 경우도 있다. 전업비평가가 손에 꼽히는 상황을 인지한다면 현재의 얼토당토않은 보수체계는 개선되어야 마땅하고, 그러하지 못한다면 훗날 후배들에겐 선배들의 사례가 하나의 원칙으로 적용될 것이란 판단에 책임과 역할에 상응하는 대가를 달라고 요구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기관 관계자들은 '행정'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개인적으로야 턱없이 부족함을 이해하지만 그 더디고 복잡하며 개념 없는 행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보니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정을 바꿔야 옳은데 그조차 쉽지 않은 모양이다. 미술계 생태를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행정이 전문성을 떨어뜨린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보수를 외면하는 정책자들의 낙후된 인식은 관련 인적 기반을 위축시키고 많은 부분을 아마추어화 한다. 물론 짜들은 인적 기반은 한국문화예술의 질적 경쟁력 면에서도 좋을 게 없다. 그러나 우리네 행정은 이런 자각에 인색한 게 사실이다. 공공기관들은 열정과 애정을 빌미로 한 재능기부라는 병풍 속에 전문가들을 앉히는 습관을 고쳐야 한다. 제대로 된 소명의식을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우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그러려면 무엇보다 누군가의 경험과 지식, 노동과 시간은 공짜가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특히 초라한 대가와 직함을 교환하느라 짐짓 모른 체 해온 미술계 문화곡예사들 또한 스스로를 성찰해야 옳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11-11 13:46:00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지하철 공공미술의 문제

1974년 1호선이 첫 개통한 이래 40여년 이상 따분하고 무미건조한 공간으로 남아 있던 지하철에 심미성을 담보로 한 각종 미술작품들이 들어서고 있다. 최근 서울시가 추진 중인 '문화예술철도'처럼 이미 구체적으로 실행절차를 밟고 있는 예도 발견할 수 있다. 지하철이 생활 속 문화공간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새로운 문화적 환경에 대한 도시민들의 욕구와 높아진 문화수준 및 향유에 관한 권리, 공공의 장소를 시각적으로 쾌적하게 만들어 가시적 성과를 도출하려는 일부 지자체장들의 정치적 의도 등이 복합적으로 놓여 있다. 즉, 더 이상 물리적인 기능으로서의 도시 환경에 만족하지 않게 된 시민의식의 변화와, 갑갑한 미술관에 들어앉은 권위적인 미술에 수동적이지 않은 문화태도, 임기 내 무언가 눈에 띄는 정책을 통한 치적을 갈망하는 정치인들의 욕망이 지하철 공공미술 확대와 유속을 빠르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뜻 없이 정해놓은 지하철 노선도의 색깔처럼 정작 '미술'의 수용방식은 매우 단선적이다. 공공미술이 일상 속에 녹아든 시민 소통의 예술이라지만 어설플 땐 그저 '공해'일 뿐임을 증명하는 사례도 없진 않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미술을 '장식'으로 보는 정책자들과 기획자들의 시각이다. 이는 미술을 공간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실제로 건축물 미술작품제도가 그러하듯 지하철 미술의 적지 않은 수는 '환경미화'에 준한다. 미술이라는 언어를 통한 사회적 담론의 기제로 기능해야 하는 공공적 관심으로서의 미술과는 거리가 멀다. 미술의 접목을 '공공의 선'으로 착각하는 정치인들의 욕망도 문제이다. 이렇게 설치했으니 그렇게 느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은 시민들의 문화적 질을 향상시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둔갑하고, 그 기대감은 다시 치적이 되어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토대가 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 의해 강조되는 것은 미술로부터의 어떤 극적인 발화일 뿐, 미술 특유의 사회적?문화적 의제로서의 기능과는 무관하다. 그러다보니 창의적 문화생태계 조성이라는 그럴싸한 텍스트를 내세우고 있음에도 결과물은 늘 인공성이 넘치는 도시에 또 하나의 가공된 조경과 차갑고 인위적인 미술형식이기 일쑤다. 결국 지하철 공공미술의 현재는 관련법과 정책에 의해 인위적으로 이식된 제도적 공공성과 지역성이 간신히 결합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설치-감상'이라는 단순한 코드에서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물리적인 완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물론 사회공동체의 이슈를 시민 스스로 창출하는 단계엔 이르지 못한다. 그나마 지하철을 죽은 지하공간이 아니라 예술생산과 소비를 잇는 문화예술의 교량으로 바라보는 건 다행이다. 허나 지하철 공공미술이 나아갈 방향은 미술의 장식성을 벗어나 개인과 지역, 공동체 간 창의성과 통합성을 내세우는 문화적 공공성의 실현에 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미술을 매개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발언하며, 시대적 사안에 대해 논하는 공론의 장이 공공미술임을 기억해야 한다. 미술을 매개로 한 생산적 문화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공공미술의 참다운 역할이자 가치임을 상기해야 한다. 결과물은 뭔가를 보여주기 위한 조형에 불과한데도 온갖 미사여구와 의미를 덧칠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 아니라.■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10-28 13:44:03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도시재생과 미술

최근 각 지자체마다 유행처럼 벌이고 있는 '도시재생'은 환경적, 공간적으로 쇠퇴한 지역을 개선하여 궁극적으론 쾌적한 도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지역을 만들자는 것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시재생은 도시의 역사적, 인문적 가치, 사회적 정체성과 모더니티까지 고민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여러 지자체들은 그 의미를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는 여러 요소 중 하나로 공공미술을 꼽는다. 도시재생의 근간이랄 수 있는 담화와 의제 도출에서 빼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는데다, 도시재생의 궁극적 목표인 살기 좋은 도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도시 구축에 필요한 중요한 알고리즘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재생의 주요 무대인 공공의 장, 삶의 현장에서 대중과 시대적 사안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촉매로서 공공미술만한 것은 드물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접목해서 문제이지, 경험적 상호작용과 제도비평적 상호작용 등을 통해 도시와 인간에 대한 근본과 구조를 묻는 공공미술의 속성은 쇠퇴한 도시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거나 재생하는 방법으로서의 도시재생에 적합하다. 이처럼 공공미술은 물리적인 측면을 넘어선 사회·문화·의식적 기능회복이라는 사회적 측면과 도시경제 회복이라는 경제적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통합적 접근방식의 정비 개념인 도시재생의 사전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알맞다. 다만 현재의 도시재생에서의 공공미술은 하드웨어적인 측면이 강하다. 말로는 도시커뮤니티 유지 및 활성화와 이해관계자간의 합의형성에 관한 의사결정시스템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언어적 수사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영국의 테이트모던이나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정도를 기준으로 삼거나 도시공간을 시각적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장식 수준으로 이해한다. 이곳엔 도시재생에 있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익명의 대중이 어떠한 문제와 사안에 대해 직접 말하는 주체일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과 쟁점이 교차하는 사회적 논의의 매제로써의 공공미술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도시재생 자체도 연관성 깊은 지속 가능한 도시와 건강한 도시생태 구축과는 무관하기 일쑤다. 도시재생은 결국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도시지향이라는 측면에서 도시재생과 지속 가능한 도시, 도시생태, 생태도시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음에도 정작 드러나는 양태는 별개의 것인 양 읽힌다는 것이다. 따라서 향후 전개되어야할 도시재생은 공공미술의 특성을 십분 살려 공공성의 해석과 그에 따른 동시대성의 접목까지 고려하는 방향에서 설정되어야 마땅하다. 지금처럼 도시재생이든 지속가능한 도시든, 공공미술의 쓰임새는 넓은 반면 도시재생에서는 물리적 상황에 머물고 지속 가능한 도시에서는 도시생태를 보조하는 수단에 불과한 실정은 아니어야 한다. 특히 생태도시에 있어 미술의 개입은 부작용이 더 크다. 중요한 건 그게 무엇이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도시를 건설하려면 공간에 앞서 사람과 삶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에 있다. 공공미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물리적·심미적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소통의 매개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공공미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명료한 개념 정립과 적용이 순차적이고 원만할 때 도시재생의 핵심가치인 새로운 역사와 문화성은 창출될 수 있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10-14 12:29:41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부쩍 증가한 ‘북한’ 관련 전시들

불과 6년 전만 해도 '김정은 부인 리설주' 또는 그저 '리설주'로 표기하던 일부 언론은 이제 '리설주 여사'라며 높여 부른다. 김정은이 백두산에서 선보였다는 '손가락 하트'는 여러 SNS상에서 '파격', '최초'라는 이름 아래 친근함의 상징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곳에 고모부를 처형하고 이복형을 외국 공항에서 독살한 독재자 김정은은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학살한 북한정권의 역사는 자취를 감췄다. 수백만 명의 아사자를 낳은 경제파탄의 주범, 최악의 인권국가인 북한은 그저 영화 '공작' 속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난다. 과거야 어쨌든 오늘의 북한은 자의반타의반으로 이미지 세탁에 성공하는 듯 보인다. 뭔가에 홀린 듯 김씨 세습 왕국이 단 2년 만에 '살가운 나라'처럼 꾸며지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물론 이 모든 건 급변하고 있는 남북한 화해 무드 영향이 크다. 북한은 실리적 이익도 챙길 수 있을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는 4.27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해 3차 남북정성회담에 이르는 동안 철도, 도로, 건설, 관광 등 남북경제협력에 관한 다양하고 실질적인 플랜을 추진하기로 했다. 모두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국민혈세가 투입될 사업들이다. 그러나 정작 세금을 내야할 국민 동의에는 세심하지 못하다. 일단 저지르고 호소할 모양새다. 부쩍 달아오른 남북교류에 문화예술이 빠질 리가 없다. 10월로 계획된 평양예술단 서울 공연 추진, 2032년 올림픽 공동개최 유치 협력 등이 대표적이다. 블랙리스트 팔아 장관됐다고 수군댈 만큼 한국 문화예술계 민심은 흉흉한데 북한 인민들의 민심까지 읽고 오느라 수고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얼굴을 내밀 행사들이다. 요즘 한국 미술계 역시 '북한'은 핫한 키워드이다. 그만큼 전시도 활발하다. 지역의 한 전시공간에선 남북 화가들이 그린 금강산 비경 전이 개최 중이다. 최근 막을 올린 한 아트페어는 북한자수의 최고봉이라는 평양수예를 포함한 북한미술품 100여 점을 선보인다. 모 미술관은 다음 달부터 북한 기행전을 연다. 이밖에도 북한을 다룬 사진전 등, 북한 관련 전시들이 앞 다퉈 포진하고 있다. 허나 '북한×미술'의 정점은 비엔날레다. 부산비엔날레 출품작의 적지 않은 수는 북한을 주제로 하고 있다. 전시 장소인 부산현대미술관 입구에서부터 전시장 내 구석구석까지, 북한을 다룬 작품은 쉽게 눈에 띈다. 조금 과장하면 "할 얘기가 북한 밖에 없나" 싶을 정도다. 광주비엔날레는 아예 섹션 하나를 북한 선전화로 채웠다. 북한 작가가 그렸다는 그림의 다수는 잘 그렸지만 좋은 그림은 아니다. 어색한 설정에 내용은 작위적이다. 사실주의 기법으로 북한이 처한 사실은 은폐하고 있음을 눈치 채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북한 관련 전시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북한을 낭만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빼어난 자연풍경 뒤에 감춰진 현실은 언급되지 않으며, 단골 주제인 평화 및 안보가 통일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도 간과하거나 애써 우회한다. 또 하나의 유사점은 연구된 성과로서의 전시라기 보단 남북한 화해 분위기에 편승한 전시들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1990년대 이후 간간이 국내 소개된 적은 있지만, 북한 관련 전시들이 이처럼 짧은 기간 내 갑자기 증가한 것도 최근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깊은 철학과 창의성 없이 시류에 부합하는 전시는 의미 있는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대성을 고찰할 틈이 작고, 보여주기에 만족할 가능성이 크다. 그건 단지 이미지의 영역이다. 정치든 전시든 소비되고 휘발될 이미지의 범람은 여러모로 피곤하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9-30 13:11:38 최신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밋밋함과 진부함'…광주·부산비엔날레

7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광주비엔날레는 비엔날레 역사상 가장 많은 기획자들이 참여했다.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에다 전시 총괄 큐레이터까지 겸한 김선정 씨를 포함해 무려 11명이 전시를 꾸렸다. 기획자가 많아서인지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규모는 큰 편이다. 그렇다고 카셀도큐멘타처럼 서너 일가량 돌아볼 정도는 아니다. 전시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네다섯 배에 달하는 예산과 인적자원으로 어떻게 그토록 밋밋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었는지 의아해서 그렇다. 일례로 주제전 구성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상투적이다. 주제의식보다는 구조가 먼저 드러나고, 형식 또한 들쑥날쑥 작은 기획전들을 각각의 공간 아래 몰아넣은 모양새를 띤다. 흥미롭게도 각각의 섹션은 서로 유연하게 통합되지 못한 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 내용은 더욱 평범하다. 도시, 환경, 난민, 광주의 역사 등을 다뤘지만 비엔날레 특유의 급진성은 떨어진다. 획기적인 사회·문화적 담론 또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비엔날레자체만 해도 광주만의 특성은 물론 한국 대표 비엔날레로써의 문화예술적 나침반 역할에 힘이 부친다. 부자 비엔날레답게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다양한 장소에 다양한 작품을 쏟아 놓았으나 속보단 포장을 잘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기대했던 부산비엔날레도 실망스럽긴 매한가지다. 흔한 기획전을 확대한 전시라는 여운을 심어준다.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규모를 축소했다지만, 크기로 승부해온 여타 비엔날레들에 비해 발품을 덜 팔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규모의 축소가 곧 주제의 명징함을 뒷받침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규모 축소=집중도'라는 등식은 특별할 것 없는 기획력과 준비부족을 감추기 위해 급조된 알리바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애석하게도 부산비엔날레는 전 세계의 영토적 민족적 분열과 심리적 분리에 다가서기도 전에 '관객의 분리'부터 생성한다. 유독 넘치게 등장하는 남북분단 관련 이슈 중 일부는 신파적, 단선적 사고에서 전개되고, 어설픈 낭만주의적인 작품들은 되레 현실의 엄혹함을 은폐한다. 전반적으로 진부한 탓에 에바 그루빙거의 '군중'처럼 뜻밖의 인내심을 요하나, 다행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는 건 아니다. 그중 하나가 헨리케 나우만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통독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우회 없이 드러내는데, 영토와 정치적 통합이 심리적 분할을 극복하지는 못했음을 서술한다는 점에서 미래의 한국 상황에 참조할 만하다. 또 하나의 작품은 이스라엘 태생의 작가 야엘 바르타나의 '인페르노'다. 상파울로 솔로몬신전을 모티프로 한 이 픽션은 역사성과 종교성, 민족성에 관한 분리와 균열을 웅장함과 비장함으로 보여준다. 이밖에도 아프리카가 처한 현실과 가상, 과거·현재·미래를 버무려 SF적 문화미학을 엿보게 하는 와누리 카히우의 '불모의 땅', 시민참여형 작품인 오귀스탱 모르의 '말할 수 없는 것들'도 눈길을 끈다. 한편 개막 전부터 화제가 된 광주비엔날레의 북한미술은 그야말로 '선전'의 장이다. 22점의 북한 그림은 조형적으로 꽤나 리얼리티하며, 모처럼 회화의 '손맛'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삶의 리얼리티를 읽을 수는 없다. 고난 속에서도 웃음기 가득한 인물들은 체제 속 유토피아를 가리키고, 연극 같은 동작은 인위적 기호처럼 다가온다. 이와 관련해 기획자로 참여한 문범강 씨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벗어나면 북한미술의 예술성이 보인다"고 했는데, 애써 관람자의 가치판단을 제어하려 노력할 필요 없다. 선전화는 단지 선전화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9-16 10:47:44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불편한 미술만능주의

'도시재생' 못지않게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지속 가능한 도시'란 인류가 대응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도시공간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표어이다. 다음 세대가 필요로 하는 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현세대의 욕구를 부정하지 않는 수준의 도시가 미래에도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인간관심의 설정이다. 여기엔 당대 인류를 위협하는 시그널인 기후변화, 난개발, 에너지과소비, 도시슬럼화, 기아, 빈곤, 쓰레기와 같은 여러 복잡한 도시생태가 놓여 있다. 하천을 복원하거나, 생태공원을 조성하고 도시에 숲을 조성하는 등의 개발계획과 지역 내 일자리 창출, 소수자의 사회안전망 구축 등의 제도적 문제를 비롯해, 노동문제, 주거문제, 교통문제, 계급문제까지 끌어안는다. 물론 자연도 예외는 아니다. 도시를 말하며 자연을 빼놓을 수 없고, 자연을 말하며 도시를 열외로 할 수 없다. 그래서 곧잘 언급되는 단어가 '생태도시'다. 생태도시는 인간생활을 중시해 만들었던 지금까지의 도시와는 다르게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균형 잡힌 개발'이란 전제 아래 '자연과 인간이 조화되는 도시'를 말한다. 생태계 보호와 자연과 공생하는 생태공간을 창조하는 것, 도시 내 물질순환의 체계화하는 것, 쾌적한 도시 공간 조성 및 환경과 어울리는 생활 및 생산 활동 등이 그 범주에 해당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둘 다 '인간중심주의'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을 덧붙임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꽤나 헤아리는 듯싶지만 결국은 그 또한 인간 삶의 질과 무관하지 않으며, 자연은 어디까지나 인간 주변에 머문다. 그런 점에서 어떤 도시를 말하던 인간에게 자연은 하나의 도구이자 불안과 공포가 거세된 관조의 대상이다. 도구로써의 자연과 불안과 공포가 거세된 관조의 대상으로써의 자연은 곧잘 미술을 통해서도 부활한다. '지속 가능한 도시'를 위한 계몽의 용도로 호출되고, 도시와 자연에 관한 경각심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계도의 일부로 소환된다. 특히 '미술=착한 것'으로 포장하기 쉽기에 정치적 활용도 역시 높다. 예를 들면 강과 강변을 헤집어 놓곤 그 위에다 조형물을 세우거나, 나무 그늘을 걷어낸 곳에 인공쉼터를 만든 뒤 '작품'이라 부르는 식이다. 산과 들판, 섬과 해변에 온갖 작고 큰 모뉴먼트를 미술제, 예술공원, 비엔날레 등등의 이름을 붙여 구석구석 앉히는 것도 포함된다. 이때의 미술은 그저 인간에 의한 정복의 산물인 자연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대중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기여수단에 머물거나 소비되는 언어일 뿐이다. 미술을 통해 도시와 자연환경을 지혜롭게 살린 메시아이길 원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정치인들의 속내 뻔한 정치적 계산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미술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인간의 보편적인 선호나 편안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자연에 대한 편안한 거리 두기를 통한 향유의 대상으로써의 자연, 도시인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심미적인 자연재현에서 엿볼 수 있듯 해석하는 방법은 남루하고 보여주는 방식도 일차원적이다. 그러니 그 결과물 또한 피로한 오브제이자 시각공해이기 일쑤다. 미술은 만능이 아니며, 미술이 개입한다고 무조건 선(善)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되는 도시든, 지속 가능한 도시를 위해서든, 하다못해 도시재생이든 뭐든 자연은 자연자체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길이다. 자연은 스스로 치유하는 위대한 능력이라도 있지만, 손을 대면 댈수록 망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9-02 14:12:51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진짜 삶의 문제들'을 들추다

상품 가치만을 극대화하거나 소비 및 휘발되는 예술이 비판 없이 자리 잡은 동시대에서 인간과 자연생태계와의 공존공생을 화두로 한 예술은 의미 있으나 인기는 없다. 인간 내속의 자연생태라는 '진짜 삶의 문제들'과 근접함에도 예술의 기능 및 역할을 생태계 전체의 유지와 연관시키는 기획은 사회활동방식의 일부로써의 예술만큼 찾기 어렵다. 대개의 일반 전시가 그렇듯 간간이 선보이는 자연환경 관련 작품전에서조차 생태학적 자연미학과 자연경험의 인식가능에 관한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담론은커녕 단순 계몽 수준이거나 표피적 계도에 머문다. 심지어 자연환경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건축물 속 장식'의 일부로 그치는 경우도 심심찮다. 생태계의 위기를 진단하고 환경 파괴에 직면한 인류가 지향해야할 생명가치가 누락된 대신 그 자리엔 정치적 입장과 상업적, 대중적 호응이 채워진다. 일례로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원회 격년으로 치르는 '바다미술제'만 해도 해양생태계와 인간생태계를 연결 짓지 못한 채 그저 바다를 무대로 한 대중 이벤트에 머문다. 해변에 온갖 동물이며 로봇 등의 작품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곤 미술제라고 하니 말이다. 다만 우린 동시대 일부 작가들을 통해 자연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진짜 삶의 문제들'을 목도한다. 미술이 자연을 하나의 표현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미술 안에서 직접 작용하는 방식이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예술을 통해 식물성의 사유를 넓혀나가는 경우가 그렇다. 부산시립미술관 주전시관과 야외정원에서 오는 24일 개막하는 전시 '동아시아 현대미술전: 보태니카'는 훼손 없는 자연주의적 사고와 자본주의적인, 또는 인공적인 것에 관한 고찰을 표방한다. 인간, 자연, 도시, 사회, 거주, 재난, 구조, 욕망 등의 현실적인 내용을 토대로 지역과 환경에 대한 성찰한다. 모두 '인간 삶의 형식'을 규정하는 명사들이요, 뿌리칠 수 없는 '인간 삶의 조건들'이다. '인간 삶의 조건들'은 현장성이 가미된 '보태니카: 야외프로젝트'에서 보다 두드러진다. 필자가 미리 돌아본 이 야외 전시엔 일본의 카와마타 타다시, 중국의 리아오 페이, 우리나라의 한석현과 한성필 등, 모두 네 명의 작가들이 참여한다. 이들은 부산시립미술관 야외 정원 및 선큰 가든을 무대로 둥지모양의 구조물을 만들거나 오래되고 낡은 벽면에 녹지를 조성했다. 나무를 심어 종(種)의 연횡을 꾀하고 시민들과 함께 모은 폐자재로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다. 각기 다른 조형방식과 규모를 갖추었지만 자연과 인공 환경을 통한 지역과 도시를 살펴보고 '진짜 삶의 문제들'에 관한 고민을 나름의 조형언어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은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또한 환경문제는 인간 탐욕의 결과임에도 애써 부정해온 오늘을 일깨운다는 점, 자연주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상상하는 '식물성 사유'를 통한 '식물적 풍경'을 구축한다는 사실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늘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인간을 위한 주변으로써의 환경에 머무르고 있음을 자각하게 만드는 이번 전시는 조용하면서도 얕지 않은 울림이 있다. 특히 예술이 그자체로 목적 화되는 것이 아닌, 예술적 감수성을 통해 사회적 책임감 내지는 건강한 생태윤리로 확장시키고 있음은 인상적이다. 한번쯤 방문해도 좋을 전시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8-19 09:28:05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미술공모전'에 대한 단상

최근 평론을 작성하기 위해 모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대화 후 여기저기 둘러보던 중 우연히 카탈로그 한 권을 발견했다. 두께가 꽤 되는 그것은 바로 '미술대전' 도록. 국내 수없이 많은 'OOO미술대전'이나 'XXXX미술제', '△△미술공모전' 등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 중 하나다. 아무 생각 없이 들춰보는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동시대미술 이전의 방식에 기댄 낡은 언어들이 즐비한 것도 그랬지만 아마추어 그림들과 학생 수준의 작품들이 우수상이니 특선이니 하는 괴이한 상황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운영위원 혹은 초대작가라며 별도로 구성된 작가들의 작품 역시 할 말을 잃게 했다. 소수를 제외하곤 사회적 맥락과 상호 관련 속에서 미술을 바라보는 시선은커녕 개별적이면서 타인과 공유되는 경험조차 읽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봤다가 결국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된 것 중 하나는 '200페이지가 넘는 도록을 만들기 위해 베어진 나무는 무슨 죄인가'였다. 또한 '작가들은 대체 왜 이처럼 뒤범벅인 무대에 출품할까'였다. 그 어떤 공모전도 과거처럼 군 면제 혜택을 주거나 교수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가운데 후자에 대해선 여러 작가들에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작가들의 다수는 전시 기회가 없어서라고 말한다. 허나 설득력이 약하다. 수없이 많은 국내외 기관이 참신한 작품을 찾고 있으며, 정보력에 따라 기회의 부족은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특히 스스로 만든 전시를 통해 화단의 주목을 받은 역대 예술가들의 사례를 우린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는 작품의 가치에 대해 스스로 존중한 결과다. 혹자는 대중이 입상 경력을 높이 본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다. 미술생태와 상의 질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대단하다 여길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미 37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에도 거의 모든 미술공모전을 '국전'으로 여기는 세태라면 공모전 입상은 꽤나 남다를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예술성을 평가하거나 가치를 매기는 건 아니다. 그래도 입상하면 뭔가 좀 다르지 않겠냐고 되물을 수 있다. 글쎄다. 공모전은 사실상 권위와 공신력, 이미지의 문제라는 점에서 어떤 공모전이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 미술계에서 그 세 요소를 고루 갖춘 공모전은 찾기 힘들다. 솔직히 '미술대전' 형식의 공모전 수상 경력이란 아트페어로 뒤덮인 경력만큼이나 의미 있게 여기지 않는다. 'OOO미술대전', 'XXXX미술제', '△△미술공모전' 등과 같은 일부 공모전은 대체로 작가들의 자잘한 욕망을 대가와 바꾼 수익사업에 가깝다. 협회나 단체의 세를 과시하거나 존치를 위해 운영되며, 내부적으론 심사위원과 운영위원, 초대작가 등을 통해 그들만의 카르텔, 미술권력을 보다 견고히 하는 수단이다. 물론 모든 공모전이 같은 꼴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대개의 경우 '아마추어들의 신분세탁용'이라는 용도를 제외하곤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한 신진작가 등용문이라는 정의에 부합하지 않기 일쑤인 건 사실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수상하던 떨어지던 자존심만 상하는 공모에 출품료까지 지불하며 목맬 필요 없다. 권위, 명예, 성공, 금전적 이득과 아무 상관없다. '학지코진'(학연, 지연, 코드, 진영)이라는 프레임 내에서 상을 주고받는 데다, 심사받을 사람이 심사하는 공모전이란 그저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공모전에 출품하느라 신경 쓰고 돈 쓰며 엄한 신작 구작 만드느니 그 시간에 그냥 작품 한 점 더 하는 게 지혜로운 처신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8-05 17:07:21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필요한가?

우리나라에선 '도시문화 환경 개선 등을 위해 1만㎡이상 건축물을 신축 및 증축할 경우 건축비용의 일정 금액(0.1~1%)을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 '건축물미술작품제도(옛 미술장식제도)'를 근거로 하는데, 문화예술진흥법을 모태로 한 이 제도에 의해 세워진 공공미술(조형예술품 포함)은 모두 1만 7천여 개에 달한다. 1995년부터 20여 년 동안의 누적 금액만 무려 1조 2000억 원으로, 작품 한 점당 평균 7천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길거리에 돈을 뿌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중에서도 조악하고 수준 낮은 작품들은 심각할 지경이다. 필자가 지난해 9월 발간한 『공공미술, 도시를 그리다』(재승출판)를 집필할 당시 느낀 것도 그 많은 작품 중 의미 있는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대부분의 조형물은 미학적 가치를 따지기 어렵다. 도시흉물도 그런 흉물이 없다. 세금까지 들여 온갖 시각공해물을 쏟아놓는다는 점에서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그 자체로 우려의 단계를 넘어섰지만, 작가들의 생존권 보장 및 일자리 창출을 통한 민생고 해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간꾼이 낀 대여섯 개의 전문 업체와 소수의 작가들이 독점하다시피 해 정작 대다수의 작가는 사실상 하청업자에 가깝다. 하지만 '건축물미술작품제도'를 만든 본래 목적 중 하나는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창작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비리의 온상이기도 하다. 이면계약, 꺾기 등의 편법이 난무하고 심사위원 로비, 매수, 청탁, 배임수재 등의 위?탈법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에도 공무원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이용해 10억 원 규모의 공공 조형물 설치사업을 따낸 작가와 브로커가 구속되어 제도의 허점을 보여줬다. 이들은 일부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제공했고, 예산 10억 원 중 40%만 작품제작에 사용했음에도 90%를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설치 주체인 민간건축주들에게도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달갑지 않다. 사유재산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철폐해야할 제도로 꼽는다. 개인 자산으로 건축물을 짓는데 왜 관심도 없는 미술품을 구입하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현행법상 준공검사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내외를 불문하고 미술작품을 설치하거나 기금을 내야 한다. 중요한 건 이처럼 문제 많은 '건축물미술작품제도'가 과연 필요한가이다. 필자는 불필요하다 여긴다. 재료비도 되지 않는 예산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작가들의 고통, 시각공해에 버금가는 작품들을 매일 봐야하는 시민들, 내 재산 내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건축주, 회화처럼 실내에 소장될 경우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대중 등, 어느 면에서든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의 업체와 브로커의 배만 불리는 '악법'에 가깝지만 정부는 되레 활성화에 방향을 두고 있다. 지난 4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미술진흥 중장기계획(2018~2022)'에도 '건축물미술작품제도'의 실효성을 높인다며 현장실태 점검 및 개선, 불명확한 기준 보완과 복잡한 행정절차 간소화 등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구체성과 현실성이 떨어진다. 검토, 유도, 기대 등의 추상적인 단어들만 부유하고, 기존 드러난 대안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나마도 법 개정과 맞물린 사항이라 실현가능성조차 불투명하다. 결국 '건축물미술작품제도'에 대한 정부의 의식은 그저 종이 한 장, 텍스트 몇 줄에 머물고 있다 해도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이전 정권과 차별화된 뭔가는 해야 되는데 적어도 예술정책에 있어서만큼은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문재인 정권의 현주소를 확인시키는 사례라 해도 무리는 없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7-22 14:35:36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죽지 않는 '실패의 유령'

비엔날레를 비롯해 국공립 미술관 기획전 등, 동시대 치러지는 대규모 미술 전시들은 채집된 역사를 포함해 의미 있는 자료와 오브제들을 하나의 공간 속에 뒤섞어 놓는다. 여기엔 예술작품이라 정의되지 않았지만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된 것과 현실을 텃밭으로 한 제의된 각종 사물 및 제안된 상상까지 포함된다. 전문 전시기획자라면 작품을 비교, 탈주, 복원, 충돌로 언급하고, 어긋남과 마주하기 등을 통해 비선형적으로 제시한다. 학제 간 장르 간 경계 넘기로 미학적 간극을 보여주며, 다층적 언어와 불특정 조건의 개입을 허락해 하나의 문맥을 만든다. 그리고 이 문맥은 새로운 미적 태도와 형식을 낳는다. 이와 같은 상황을 전설적인 큐레이터인 '하랄트 제만'의 개념으로 해석하자면 '조직화된 혼돈'이다. 즉, 서로 다른 맥락에서 발생된 잡종의 과정들이 즉시각적으로 생성되거나 소멸되고, 전시라는 틀 안에서 예술과 비예술, 실체와 비실체가 얽히고설켜 자유로운 미적 시도를 일으키는 상태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짜서 이루거나 얽어서 만들어진 것, 그리고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개체나 요소를 모아 구축한 체계는 과거의 전시방식과 차별을 유도한다. 가치 있는 미술의 방향을 제시하며, 그 방향 위에서 이전과 다른 예술생태계는 정립된다. 우리가 간과하던 논쟁, 논의의 대상이 비로소 의식의 일부로 표면화되기도 한다. 물론 전시를 통한 통상의 생경한 전개와 파격적인 작품으로 인한 논란이 간혹 대두되기도 하지만, 그 논란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술형식과 방법론에서의 미래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성이 크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 굵직한 그 어떤 전시에서도 예술형식과 방법론에서의 미래성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개념자체는 이해하는 반면, 반드시 구조가 개념을 뒷받침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전시구조는 낙후되어 있다. 전시가 시각적 감흥에 멈추는 가장 큰 배경이자 사실상 불사의 유령을 소환하는 이유다. 이런 현상은 특히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예산을 받아 치르는 행사에서 유독 심하다. 주변의 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기획자들을 힘들게 한다. 전시기획자들은 하나의 전시에 침투하는 기관, 지역, 대중, 미술계 내부라는 다양한 시선과 맞닥뜨린다. 돈을 대는 관의 입장을 헤아려야 하고(그 중에서도 관객 수), 행사가 치러지는 지역의 눈치(지역작가 소외론)도 봐야 한다. 변별력 있는 주제와 그에 맞는 작가를 참여시켜야 하면서도, 미술계 내의 반응(담론형성 여부)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당대 전시들이 철학 없이 부표처럼 흔들리는 원인에는 이처럼 전시를 전시처럼 만들지 못하게 하는 다양한 끼어들기와 명분 희박한 관여가 놓여 있다. 소위 지역일수록 그 참견의 농도는 진하다. 그야말로 아마추어들이 프로의 세계를 좌지우지 한다. 여기에 과대 포장된 기획자들의 실력과 일부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태도도 개념이 단지 논리적 분별에 그치는 원인이다. 이들에게 전시는 입신의 도구요, 기획은 출세의 설계다. 그러니 신념 따윈 기대하기 어렵다. 이밖에도 서구 시선에서의 오만한 세계주의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됨에도 자각 없는 환경, 시도를 금기시하는 행정 역시 전시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배경이다. 문제는 미술의 순수성은 그저 욕망의 알리바이이기에 기대도 되지 않는 이러한 상황이 당장 변화하진 않을 것이란 점이다. 믿기지 않는다면 현재, 아니 다가올 전시들을 기념비적인 것들과 대조해보라. 깊이 보면 드러나고 가까이하면 읽힌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7-08 12:04:49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가 장사꾼 만드는 정부

모든 미술이 공동체의 삶과 커뮤니티의 정체성, 사회적 의미를 드러내는 공공재로써의 언어를 내재할 순 없다. 자신의 작품이 예술일 수 있음을 작가 스스로 입증하거나 미술 자체의 존재이유와 방식에 관한 제안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다. 더구나 미술의 출발점을 개인사에 두는 것은 후기모더니즘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동시대 미술계 내 적지 않은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 그 가운데 유독 내상을 주제로 한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의 다수는 이해는 되는 반면 공감은 어렵다. 어느 땐 심각하게 시시하다. 그럼에도 사달라고 아양 떠는 그림들 보단 시시한 것이 낫고, 신통찮은 작품 한 점이 벽걸이용 장식을 미술로 착각하는 작가들의 그것 보단 괜찮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안다. 그러나 작가 중 일부는 아트딜러가 해야 할 일까지 대신한다. 직접 나서 시장을 열고 좌판을 깐다. 작품을 팔 수 있는 기회가 없고 당장 민생고는 해결해야하기에 선택한 길이지만, 이젠 그러한 행위가 시대의 흐름인 냥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만큼 '작가=사업자'라는 등식이 익숙해지고 있는 셈이다. 허나 작가들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에 관한 자문이 삭제된 이미지덩어리를 '작품'이라고 내놓는 현실을 합리화하는 건 사실상 구조 탓이 크다. 그리고 그 구조의 정점엔 '예술경영지원센터'와 같은 산하 기관을 내세워 작가들을 시장으로 내모는 정부가 있다. 즉, 정부야말로 예술가들이 사회적?역사적?미술의 맥락에서 기존의 어떤 것에 의미적으로 견주길 포기하고 '시장소비재'로써의 재화제작을 강요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산하기관들을 통한 시장중심정책을 고수해 왔다. 한쪽에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예술가들의 자유를 옥죄면서 다른 한쪽에선 미술시장진흥을 기초예술 보호로 오판한 미술시장정책을 펼쳐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난한 미술계에서 돈을 쥐고 흔들며 예술가들을 줄 세웠고, 현장에 개입해 미술의 역할을 자본시스템이라는 프레임에 가뒀다. 심지어 작가들이 직접 나서 대중에게 작품을 팔고 수익을 갖게 하는 '작가미술장터'까지 마련해주며 예술의 상품화, 예술가들을 장사꾼으로 만들고 있다. 이 가운데 정부예산으로 치러지는 작가 직거래 미술장터는 문제가 많다. 일단 미술계 내 유통질서를 교란하고 예술을 매개로 사회와 인류공통의 화두에 끝없이 질문하는 미학적인 태도에 앞서 '취향공동체'에 읍소하는 작가관을 조장한다. 여기에 아직 무르익지 않은 작가들에겐 철학적 사고 대신 얄팍한 자본논리부터 제공하는 위험도 있다. 넓게 보아 '문화산업'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시장 중심 정책은 미술의 책무마저 외면하는 현상을 낳는다. 인류공통의 이슈를 지각과 감수성의 층위에서 창조적으로 담아내며,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해석하는 예술적 입장이 소홀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대중에게 예술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미술시장 중심 정책은 그리 긍정적일 수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시장론'을 '예술론'으로 착각한 듯 상품으로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영역에 작가들을 떠밀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정권이 바뀌었어도 마찬가지다. 미술인들의 소득과 관계되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인정 및 관심을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이 곧 단순산업생산과 구별되지 않는 지점을 가리키는 게 아님을 정부는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경영', '시장', '유통'이 무너진 기초예술과 붕괴된 예술현장을 살리는 대안 역시 아니라는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징재화인 미술은 예사로운 경제적 기준에 저항할수록 예술의 가치와 자율성을 지켜낼 수 있음을 작가들 또한 기억해야한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6-24 14:44:56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과 스타일

학생 또는 이제 갓 미술계에 발을 들인 젊은 작가들과 작품 관련 대화 시 곧잘 접하는 질문들이 있다. 자신만의 표현방식 혹은 독자적인 길에 관한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는 일정하고 통일된 독자적 양식, 즉 스타일에 대한 부분도 있다. 최근 모 대학 강의에서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작품을 보여줄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과거와 현재의 작업이 너무 다르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고 운을 뗀 한 학생은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곧 나만의 스타일이 없다는 것인가요?"라고 물었다.필자의 입장에선 워낙 자주 듣는 물음이라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현재로선 특유의 예술적 방식이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지극히 합당한 시간을 지나고 있으니 염려하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조언했다. 문제처럼 비춰지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타일과 관련해 영국 작가 이언 잭맨은 그의 저서 '아티스트를 위한 멘토링'에서 옵아트의 대가인 브리짓 라일리의 발언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술가의 초기작은 여러 가지 경향과 관심의 혼합물일 수밖에 없는데, 그중 어떤 것들은 양립 가능하지만 어떤 것들은 상충한다. 예술가가 자신의 길을 고르고, 그러면서 어떤 것은 거부하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면, 특정한 탐구패턴이 나타난다. 한 가지를 잘못 판단함으로써 다른 하나를 맞게 된다. 당시에는 그 다른 하나가 무엇인지 모를지라도." 스타일은 예술을 옹립시키는 모든 요소들이 결합된 유무형의 결정체다. 다양한 조형요소와 원리를 비롯해 드러나지 않는 맥락과 질서를 담아낸 결과이자 가시적 표상체계의 완성이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며 일궈진다. 하지만 현장에 있다 보면 엊그제 졸업한 신진 작가들조차 내용과 형식의 특성에 조급해하고, 그런 그들에게 스타일이 없다면서 나무라는 이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특히 후자의 예는 예술초년생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스타일이란 넓고 깊은 경험을 토대로 한 미학적 탐구의 결과이기에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피카소의 드로잉을 보고 예술가로서 자신이 발전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맛보았다고 피력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오히려 처음 예술계에 발을 들인 작가들의 작품은 옛 선배들의 작품과 동시대미술흐름의 복합체로 나타나는 것이 마땅하다. 브리짓 라일리의 말처럼 젊은 작가들은 아직 명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이것저것 실험적인 과정을 거치며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며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 가는 게 정상인 셈이다. 이는 모네와 피사로, 드가로부터 색과 붓놀림을 빌려와 독자적인 양식을 만든 마네나, 피렌체 메디치도서관 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벽화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시인한 마크 로스코, 1913년 아모리쇼에서 발견한 야수파와 인상파, 큐비즘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전혀 다른 예술관을 갖게 된 미국 추상화가 스튜어트 데이비스 등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일부 젊은 작가들에게서도 소위 스타일이란 것을 엿볼 수 있다. 일찌감치 자기만의 특성을 선보이는 작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허나 그들에게서 읽히는 스타일이란 대체로 취향의 보편성에 기댄 여운이 있다. 그건 젊어서 알게 되지만 경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 무엇과는 결이 다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6-10 15:00:53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가의 삶과 무덤 속의 길

관심과 이해를 높이기 위해 생존의 경계에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예술가들의 상황을 설명하면 적지 않은 이들이 대체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으레 '그래도 행복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예를 들면 "연간 평균 수입이 600만 원대라는 것은 지나치게 적은데, 우리나라 작가들은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작업하네요.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삶인데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니 행복하지 않을까요?"라는 식이다. 행복이란 저마다 가치와 기준이 다르기에 선뜻 정의하기 곤란하나, 분명한 건 좋아한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취미와 전업의 영역이 다르듯, '좋아하다'가 '좋다'가 되고, '행복하다'가 '행복'이 되는 것 사이엔 만경창파(萬頃蒼波)가 놓여 있다. 사실 종이처럼 얇고 솜털처럼 가벼운 재주로 생산한 것을 예술의 전부로 착각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예술가는 행복하지 않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김명곤도 비슷한 얘길 한 적이 있지만, 매일 예술가들을 만나는 필자 역시 예술이 그들에게 약속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법한 행복이 그들의 삶 내부 어디에서도 쉽게 발견되지 않음을 본다. 오히려 예술가들은 예술을 이어갈수록 비탄과 암울에 젖는다. "그래, 나만의 일, 그것을 위해 내 삶을 위험에 몰아넣었고, 그것 때문에 내 이성의 절반은 암흑 속에 묻혀버렸다."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체념처럼 어두운 불안이 쉼 없이 짓누른다. 행복은커녕 절망이 지배하고 두려움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렇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예술가에게 예술은 그 자체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공허한 공간 앞에서 체감하는 상실된 좌표와 무언가를 끄집어내야하는 막막함, 무덤 속의 평화와 진배없는 작업실의 무게감은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 행복할 것이라 여겨지는 예술가는 경제적 엄혹함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예술적'일 수는 있어도 예술은 불가능한 일부를 제외하곤 그들은 가진 것 또는 가질 것이 너무 없다. 명예, 지위, 신분 등 사회 속 모든 인색함은 거의 그들 몫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왜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버리지 않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버리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에 가깝다. 숙명이랄까, 한 번 내딛은 발걸음은 물리기 어렵다. 애써 빠져나갔다가도 되돌아오고, 예술이 평생 마셔야할 독약이었음을 깨달았을 땐 그들의 생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술가의 삶은 선택이 아니다. 예술의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중독된 이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운명과 기질이 부르는 것이고, 지금 이 자리에 예술가로 서 있음으로써 확인된다. 이처럼 예술가가 예술인임과 동시에 현실임을 강조하기엔 대중에게 덧대야할 미주가 많은 대신, 예술가는 단지 예술가임을 받아들인 대가치곤 여러 면에서 혹독한 삶을 산다. 심지어 얼마나 가난한지 증명해야 지원을 받고, 처지의 이해가 곧 감성팔이로 치부되는 동일계 내 일부 태깔스러운 시선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변함없이 작업을 한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비극을 인용하자면 생과 사의 기로에서조차 예술이란 것을 한다. 남들은 잘 알아주지도 않는 예술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러니 어찌 예술가의 삶을 '천형(天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2018-05-13 11:40:18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경박한 '시장소비재'로써의 예술

예술이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수익과 무관한 예술은 점점 그 존재성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커진다. 예술이 돈만 밝힌다면 시대를 번역하고 공동체의 삶과 사회적 의미를 포박하는 공공재로써의 역할 대신 가벼운 '시장소비재'의 하나로 대우받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술은 이미 '시장소비재'로 전락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예술의 자본종속화는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진열대 상품처럼 예쁘게 봐달라며 옹알거리는 경박하고 조악한 것들이 미술인 냥 포장된 채 넘쳐난다. 즉, 더 이상 시대정신의 표출로써의 예술이 아니라 사고파는 '물건'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들이 지천이라는 것이다. 예술이 '시장소비재'로 떨어지면서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도 점차 가벼워지고 있다. 가난에 절은 고학력백수로 인식하는 대한민국에서 예술가가 언제 한번이라도 변변한 사회적 지위와 대우받은 적이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예술가 스스로 자존감을 내려놓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없이 사는 건 동일하나, 그래도 과거엔 품위가 있었고 격과 기품을 목숨처럼 지켰다. 만든 것을 팔아도 팔기 위해 만들진 않았다. 예술가에 대한 세인의 존중은 그런 태도에서 나왔다. 하지만 오늘날의 예술가는 취향공동체에 읍소하기 급급하다. 심지어 '예술가의 가난'이 저급한 시장루트를 개척하는 알리바이로까지 작동한다. '시장소비재'로써의 예술은 미술계 전반에 침투해 있다. 미대생들은 살아서의 제프 쿤스가 되고 싶을지언정 죽어서의 박수근은 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예술은 삶의 수단일 뿐 삶의 전부는 아니다. 취업생각에 대학 2-3학년만 되면 붓을 놓는 게 드문 현상도 아니다. 허긴, 예전만 해도 이렇게 그려 달라 저렇게 그려 달라 하던 화상들의 주문에 벌컥 화를 내던 기성 작가들조차 어느덧 순종적 주문제작자의 위치로 탈바꿈했으니 예술을 대하는 학생들의 가치관을 두고 뭐라 할 위치는 아니다. 경력 좀 쌓은 이들조차 인테리어업자와 예술가, 장사치와 작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 이들이 교수요 선생이니 어쩌면 학생들은 아무 죄가 없는지도 모른다. 진짜 죄가 있는 건 정부다. 오래 전부터 정부는 '시장소비재'로써의 예술을 부추겼고, 예술가가 살 수 있는 대안으로 시장만 제시했다. 박근혜 정권 당시 발표한 '2014-2018 미술진흥중장기계획'은 아예 화랑이나 아트페어진흥정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의 ''미술로 행복한 삶' 2018-2022 미술진흥중장기계획' 역시 시장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술가와 매개자의 창작환경 개선이 소폭 늘었지만, 산업, 경제, 직업, 일자리, 시장이 키워드이고 이 또한 결국은 세금으로 때우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그야말로 '미술로 행복한 삶'이 아니라 '돈과 직업이 있어야 행복한 삶'이다. 자본이 미술의 정의와 질서까지 부여하고, 시장의 가치가 곧 미술의 가치로까지 인정받는 시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구닥다리일 수 있다. 비엔날레와 아트페어가, 미술관과 상업갤러리가 서로 베끼며 탈고유성을 합리화하는 현상이 보편적이라는 진단이 맞는다면 경계를 읊조리는 것 또한 진부함이다. 그럼에도 그 낡고 케케묵은 화두를 꺼낸 건 당장 손에 쥐는 건 없어도 예술가로써 자존감을 지키며 작업하는 이들을 응원하기 위함이다. 취미와 취향에 자신의 예술을 봉헌하지 않는 예술가들을 지지하기 위함이다. 의미 있는 미술사는 시장이 쓰지 않는다. 데미안 허스트나 무라카미 다카시는 세련된 비즈니스맨이지 동시대 예술의 정의를 대표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침소봉대할 필요 없다.

2018-04-29 12:48:56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기대감 높아진 부산비엔날레

당대 많은 예술가들은 동시대인의 삶을 미술언어로 드러내며 인류가 처한 다양한 문제들을 언급한다. 환경, 빈곤, 장애, 전쟁, 인권, 난민 등과 같이 미술을 통해 누구나의 머릿속에 있지만, 아무도 감히 보려 하지 않는 무언가를 끌어낸다. 이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예술가의 책무에 관한 부정 불가능한 근거이면서, 그것이 곧 예술의 가치임을 확신한 작업으로 드러나고 전시라는 방식으로 다양한 공간에서 구현된다. 하지만 사회적 역할로써의 예술이 극명하게 소환되는 장(場)은 비엔날레다. 낯설고 급진적인 접근법으로 현대미술 담론을 이끌기에 간혹 대중과 괴리한 시각적 불편함 및 심리적 거부감을 심어주지만 가장 정치적이며 실험성 강한 무대가 바로 비엔날레이다. 실제로 비엔날레는 싫든 좋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 간 예술 힘겨루기를 시전 중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알 수 있듯 내용은 물론, 태생부터 그렇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좀 다른데, 정부와 지자체 예산에 기댈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다, 비엔날레조차 대중취향에 매몰되길 원하는 이들로 인해 에둘러 표현하거나 가까운 길도 돌아가기 일쑤다. 논란을 두려워하고 여론재판을 감당할 수 없는 관계자들의 허약한 체력도 정치를 담아내기 꺼려하는 원인이다. 그런데 올해 9월 개최되는 부산비엔날레는 정치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동시대 인류가 처한 현실, 한반도의 정치적·역사적 분단과 분열, 세계 만연한 균열과 대립, 물리적 영토와 심리적 영토를 다룬다. 이를 통해 지구공동체의 외상과 내상, 긴장과 갈등의 접점을 발견하고 치유로써의 해법을 찾아 나선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Divided We Stand)'라는 주제가 다소 추상적이긴 해도 내용은 미술흐름이 아닌 '현실'을 반영해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색깔이 선명하다. '경계', '여백', '공론' 등의 단어 아래 이것저것 갖다 붙이기 쉬운 이현령비현령 식 주제와 내용으로 비엔날레 특유의 도전성을 외면해온 역대 비엔날레와 달리 성격이 뚜렷해진 게 특징이라는 것이다. 내용의 명징함은 반대로 작가선정 폭이 협소해지는 단점을 낳는다. 하지만 '강원국제비엔날레2018'처럼 부산비엔날레 또한 이와 같은 약점을 참여 작가 수를 대폭 줄이되 집중력을 높이는 것으로 보완했다. 향후 공개될 작품 수준과 작가 선정의 적절성에서 성패가 갈리겠으나 일단 '속없이 거대한 몸뚱이'를 자랑으로 여겨온 비엔날레들과 비교하면 현명한 판단이다. 하지만 해빙기에 접어든 오늘날 한국의 남북관계를 염두에 둔 듯한 인상은 별로다. 한반도 분단과 평화는 중요한 이슈이고, 정작 비엔날레 관계자는 국내외 정치상황과 맞물린 주제설정은 아니라고 하지만 북한미술 섹션을 주요 전시로 내세운 채 한반도의 분단과 경계가 지니고 있는 현 상황을 거론한 광주비엔날레처럼 시류에 편승한 듯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이밖에도 냉전을 축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거나 공상과학이라는 테마 아래 보여준다는 미래는 생뚱맞고 고루하다. 내용은 정치적일 수 있지만 전개방식은 정치적이지 않아야할 과제도 남아 있다. 더구나 개막까지 불과 5개월 밖에 남지 않아 전시를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도 우려의 이유다. 허나 부산비엔날레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꽤나 예민하고 꼼꼼한 스타일로 알려진 감독들과 오는 6월 새롭게 문을 여는 부산현대미술관의 컨디션도 좋다. 특색 있는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도 작품을 내걸기에 매력적인 공간이다. 무엇보다 뜬구름 잡지 않는 주제의식, 콘텐츠 중심으로 돌아선 전시방향이 흥미롭다.

2018-04-15 09:26:32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페이스북을 삭제했다

최근 페이스북을 삭제했다. 아주 오랜 시간 운영해온 정보와 소통의 창구였지만, 문득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와는 지나치게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컸고, 누군가에게 혹시 모를 오해와 상처, 아픈 기억을 생산할 수도 있는 무대라는 판단에 계정을 없앴다. 특히 그 상처와 오해, 아픈 기억들을 숱하게 내뱉는 타인의 경험들도 내겐 또 다른 상처와 아픔이자 경험이었다. 그 경험의 사례들을 감당하기 버거움은 페이스북을 접는데 작지 않은 계기가 됐다. 페이스북을 하지 않자, 이미 주어졌으나 알 수 없던 시간을 되찾았다. 나를 응시하는 기회도 발견했다. 나와 사회 간 인식과 의식의 무게가 다를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은 덤이다. 누구나 그렇듯 '세상'에 존재하는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상징'일 뿐, 내가 나를 이해하고 있는 것만큼 진실된 나의 참모습과 사회 속 나와의 사이엔 분명한 거리가 있다. 그런 점에선 우리가 일평생 수없이 부르게 되는 이름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례로, 인칭명사 A는 '실재의 A'와 깊은 관계가 없다. 그것은 단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사물이나 현상 따위에 붙여진 '기호'이지 본질적 인간으로서의 A, 개인 고유의 정체성을 지닌 A를 내포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A는 실재 A가 아니라 세상에 기호를 등록시킨 A로서만 존재하고 통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호화된 A는 실재 A가 결핍된 A, 상징을 획득하는 대신 실재를 버려야 하는 타자로서의 A이다. 하지만 동일성향의 어떤 집단에서 상징적 존재로써의 나는 엄연히 내가 아님에도 진짜 나의 전부처럼 수용되곤 한다. 즉, 남과 다른 자신을 지정하는 '나'라는 대명사가 비록 상상의 실재, 상징적 실재, 관념적 실재, 인위적 실재를 규정하는 기호에 불과함에도 구성원들은 대개 실체화된 실재, 종극적(終理的)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겠으나 소통수단의 인위적 효용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다수는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를 자발적으로 걸러내길 주저한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지각과 의식이 진짜인냥 적시되는 적절한 포장지로 삼는다. 그리고 페이스북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그곳에서 연기를 하고 대본을 쓴다.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표적인 소통수단인 '글'을 통해 여러 상징을 만들었을 터이다. 이미지로 덧대긴 해도 주된 표상은 글이고, 글은 대개 구체적,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은폐되는 대신 상징으로서의 존재가 형성되는 틀이었다. 타자에게 실재의 전부인 양 각인되는 주요 거푸집이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달리 말해 글이라는 특정 방식이 가끔씩 현존의 나마저 변질시킨다는 부작용을 알면서도 상징과 기호로서의 나를 꾸미는데 거리낌없이 긍정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많은 이들은 '글'이 생성한 상징으로서의 나를 두고 섣불리 규정하고 지정했다. 세상에 등재시킨 기호 덕분에 단지 특정된 무엇을 확대, 재생산하며 쉽게 논하고 예단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와 같은 인식과 흐름은 억울하면서 합당한 측면이 있다. 그건 내가 아닌데 내가 되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나 스스로 그 가공의 나를 진정한 나로 각인시키려 애쓴 면도 없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결국 억울함도 합당함도 모두 내탓이다. 다만 어떤 이유로든 실재의 나와 기호로서의 내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채 거세당한 실재가 거름망 없이 수용되는 상황의 연속이 고통이라면, 나아가 그 고통을 완전히 증발시킬 수만 있다면 버리는 것이 훌륭한 메이크업이 가능한 무대를 유지하는 것보단 가치있다. 글과 말로는 극복할 수 없는 부분까지 재단되는 상황이 지속되고 의미를 거론하기 힘듦이 자각된다면, 더불어 의미를 의미롭게 설득하려는 노력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라면 차라리 나에게 나로써의 참됨을 나부터 만들어가는 게 순서다.

2018-04-01 14:50:05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미술, 그곳에 사람이 있다

어떤 장소나 공간 주변의 상태와 특징 등을 고려해 그 장소와 미술이 유기적 의미를 갖게 되는 미술이 '장소특정적미술'이다. 실제 장소와 개념으로써의 장소 자체에 주목하는 설치작품은 물론, 장소를 근간으로 컨텍스트(context)와 과정을 다루는 '퍼포먼스', 미술과 미술가들의 공공적 역할인 사회문제를 미술적 이슈로 삼는 '관계지향적미술', 그 문제들에 관객들의 적극적인 협업과 참여를 유도하는 '비판적미술' 등이 모두 장소특정적미술에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장소특정적미술'을 그저 특정한 장소나 공간과의 호흡 속에서 성립하는 미술로 보는데, 이는 다소 적절하지 않은 정의다. 글자 그대로 특정 장소에 존재하도록 제작된 미술품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오브제로서의 '미술'과 '장소'라는 분별적, 독립적 명사로부터 벗어나 점차 개념적으로 확장되어 왔음이 사실이며, 동시대에서 '장소특정적미술'이란 특정 장소와 상황을 미술이 수용함으로써 그 장소와 상황에 '비판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까지 일컫는 탓이다. 국내에서 '장소특정적미술'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시기는 1995년경이다. 조형예술품(조각, 벽화, 회화 등)의 설치가 의무화된 당시만 해도 '장소특정적미술'은 공공미술의 영역에 머물렀다. 때문에 미술을 공공공간에 가져다 놓은 것만으로도 도시 환경을 갱생하고 인간화한다고 여겼다. 허나 모든 공공미술작품이 아름답거나 랜드마크로써 역할 하는 것, 불특정 다수의 익명의 삶과 연계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공의 공간은 누군가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잠시 빌려 쓰는 것인데, 수준 낮은 작품들 때문에 대중이 감내해야할 피해는 의외로 컸다. 특히 작품과 장소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중시했던 작업들 가운데서도 동일한 작품이 재생산되면서 공공미술의 전위성이 자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와 같은 현상은 새로운 담론에 불을 지폈다. 이때 발생하게 된 개념이 바로 '공공성'의 실현이다. 공공성은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사회 구성원 전체의 기억과 쟁점, 삶의 맥락을 수용한다. 공공공간의 주인은 시민이며, 공공의 공간을 대여하여 사용하는 미술은 그 자체로 공공성에 관한 책임을 지녀야 한다. 그것의 올바른 성과가 공공성의 실현이다. 그러나 한국의 실정은 다소 다르다. 공동체를 빌미로 한 기관의 선전화와 도구화로써 기능할뿐더러, '장소'의 중요성을 언급하지만 결국에는 미술관으로 회귀하는 미술의 부르주아성, 특정되거나 지정된 장소와 공동체가 단지 미술가의 작업재료로 대상화되는 공동체의 소재화가 드물지 않다. 더구나 의미 있는 장소에서의 작업이 유명해져 결과적으론 미술의 자본화를 개입시키고 거주민의 거주공간과 삶을 황폐화시키는 부작용도 크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장소특정적미술'은 무엇인가. 실제 사람이 참여하거나 협업 혹은 관계맺음이 제한적이지 않은 미술, 미술가와 미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이슈들과 사람을 연계하는 미술, 공간과 장소에 실존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유관하게 행위 되는 미술 등이다. 만약 미술이 그 장소에 거주해온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주체인 '사람'을 담아내는 데 있어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그 주체가 비호응적인 상황이라면 우리에게 미술은 무엇인지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미술이 당장 먹고 살아가는데 급급한 우리에게 빵을 주거나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거푸집이 되고, 그 관계 속에서 인간가치의 회복과 소통의 매개로 작동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무시할 것도 아니다.

2018-03-18 11:36:15 이범종 기자
기사사진
[홍경한의 시시일각] 박수근미술상

한국 현대미술 100년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서민화가, 질곡의 시대를 힘겹게 걷던 이들을 품에 안았던 작가, 어려운 창작 환경에 굴하지 않은 채 삶과 예술의 긴밀함을 회화로 승화시킨 예술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화가. 박수근을 따라다니는 여러 수식어들은 '국민화가'라는 오늘날의 칭송을 어색하지 않도록 한다. 이중섭, 김환기와 더불어 한국미술 3대 거목이라는 후대의 평가는 그의 존재감을 더욱 눈부시게 만든다. 그의 그런 예술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강원도 양구군은 지난 2016년 '박수근미술상'을 제정했다. 양구에서 태어나 성장해 그곳 양지바른 곳에 묻힌 박수근 화백의 독자적인 양식과 삶의 리얼리티를 잇는 동시대작가를 지원하고자 만들어진 상(賞)이다. 제1회 수상자는 전남 보성 출신인 황재형 작가였다. 그는 노동으로 실현된 인간화와 삶의 진실을 향한 인간애 물씬한 작품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직접 광부로써 일하는 등, 실제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형성은 진득한 인간의 이야기를 비롯해 시대가 변해도 민중의 본질, 땀의 무게는 변하지 않음을 읽게 한다. 2017년 제2회 수상자는 김진열 작가에게 돌아갔다. 김작가는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일관되게 자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기법 아래 구현해왔다. 그는 궁핍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상과 수백 년의 풍상을 겪어내며 자존하는 나무 등의 이미지를 통해 매혹적이면서도 뜨거운 생명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올해 박수근미술상을 수상한 작가는 이재삼이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과 자연을 독창적인 관점아래 감동적으로 조형화한 박수근처럼 이재삼 작가 역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양식을 구축해 온 작가로 꼽힌다. 화가 박수근 관련 이론 전문가인 박수근미술관 엄선미 관장은 "그가 주로 그린 자연은 일상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킬 뿐만 아니라, 목탄의 투박함과 정겨움이 엉긴 검은 세계는 외적인 사실주의를 넘어 형용할 수 없는 깊이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사물의 근원인 물과 바람, 달과 이슬, 빛과 기온이 교차하는 그림, 우리네 현실계를 짚고 넘는 상징적인 세계로써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재삼 작가는 목탄을 재료로 일상의 자연을 깊고 깊은 검은 공간 속 거친 듯 시적으로 담아 왔다. 소나무와 대나무, 옥수수 밭과 매화, 그리고 폭포의 정경들은 언뜻 가시적인 것이 전부인 듯싶지만, 그 내부엔 음습하나 한 없이 침잠하는 존재들, 역사와 문명의 동력이 되어준 자연환경, 오로지 그림 하나로 이겨내려 한 삶의 투쟁이 은은한 달빛처럼 배어 있다. 박수근미술상은 여타 미술상과 결이 다르다. 정체성이 명료하다. 보은과 공로, 상 자체가 하나의 기획인 상이라기 보단 박수근이라는 인간과 부합해야 하고 그가 지닌 문화예술적 맥락에서의 가치와 의미에 근접해야 한다. 박수근미술상을 제정하며 한 위대한 작가의 역사를 집중 조명해온 전창범 양구군수는 "불굴의 의지로 현실과 맞서면서 그림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은 예술가, 자연과 동질한 정서를 내재한 사람들 간 호흡 속에서 작가가 직접 체득한 그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며 "황재형이 그랬고 김진열이 그랬으며 이재삼이 그렇다"고 말했다.

2018-03-04 11:09:25 이범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