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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홍경한의 시시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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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대폭 늘어나는 예술인 지원, 시행 기관은 ‘과부하’ 우려

내년도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은 6조4758억원이다. 올해 본예산 5조9233억원에 비해 9.3%(5525억원) 증액됐다. 부문별 예산을 보면 문화예술이 2조678억원으로 가장 큰 부분(31.9%)을 차지한다. 그 뒤를 체육 1조6878억원, 콘텐츠 9877억원 등이 잇는다. 이 가운데 예술인들의 삶과 창작에 직접 맞닿는 지원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지난 6월 처음 시범사업으로 도입되어 2020년부터 정식 운영되는 '예술인 생활안정자금 융자'(전·월세 주택 자금 대출, 예술저작물 담보 대출 포함) 지원과 '창작준비금' 지원 등이다. '예술인 생활안정자금 융자'는 소득이 불안정한 예술인들의 생활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이다. 금융지원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예술인에게 소액대출 방식으로 긴급 생활자금을 2%대의 저리로 빌려준다. 올해 대비 지원 대상(1170명→2370명)과 예산(85억원→190억원) 모두 늘었다. 창작공간을 포함한 전·월세 주택 자금 대출도 상한액도 4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인상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창작활동 중단을 방지하기 위해 예술인 1인당 연간 300만원을 지원하는 '창작준비금' 지원 예산과 대상 역시 대폭 상향된다. 예산은 올해(166억원)의 배가 넘는 362억원이 편성됐다. 지원받을 수 있는 예술인 또한 5500명에서 1만2000명으로 많아진다. 이밖에도 정부는 예술 산업 선순환 생태계 조성 관련 예산 30억원을 신규로 준비해 창업·기업가 단계별 양성 교육 및 현장 멘토링을 지원(50명)한다. 예술 분야 전문 종사자 대상 직무 교육(5개 과정)과 현장 실습 지원(50명)을 추진하며, 예술인재들의 자생력 제고를 위한 취업과 창업 지원, 교류공간 운영 및 기업·채용 정보제공시스템이 구축된다. 이처럼 창작 환경 개선에서부터 일자리 창출까지 예술인에 대한 정부의 지원 규모가 커지면서 실질적인 예술인복지도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늘어나는 예산과 대상에 걸맞게 시행기관들의 일손은 알맞은지 되묻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정부 목표의 실질적인 성과 구현 차원에서도 인원의 적절함은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예술인복지 관련 주요 시행기관인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부쩍 비대해진 사업으로 인한 인원 적정성을 헤아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은 늘었으나 일손은 빠듯한 실정이다. 예를 들어 재단은 '예술인 생활안정자금 융자'와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을 비롯해 예술인 상담, 교육, 의료, 보험 관련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예술인들의 직무 영역 개발을 돕는 '예술인파견지원사업'도 재단 몫이다. 모두 꽤나 품이 드는 것들이다. 팀별 인력난은 더욱 문제다. 2020년 기준 지원 대상자만 1만2000명에 달하는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이나, 1000명의 예술인과 200개가 넘는 기업 및 기관이 함께하는 대규모 프로그램인 '예술인파견지원사업' 관련 근무자를 다 합쳐도 10여명을 웃도는 탓이다. 그나마도 그중 누군가는 지원 사각지대 해소 차원에서 직접 예술가의 집과 작업실을 찾아가는 지원 서비스까지 담당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봐도 업무 과부하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직원은 대표이사 포함하여 40여명 내외에 불과하다. 이는 서울시 산하기관인 서울문화재단의 약 1/5 수준이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비교하면 일개 본부 구성원 정도에 머문다. 재단이 담당하는 사업 수와 각 팀별 역할, 기능, 비중을 고려할 때 아랫돌 빼어 윗돌 괴기도 불가능한 처지이다. 예술계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야말로 복지가 필요한 기관이라고 말한다. 문화예술과 예술인 복지에 대한 정부의 의지와 지원 확장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을 원만히 실행하기 위해선 관계 기관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11-12 09:26:44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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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잡지계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국내에는 주기를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미술잡지들이 발간되고 있다. 그러나 시대성을 관통하는 이슈를 제기하며 건설적인 담론을 심도 있게 생성하는 매체와 조우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잡지마다의 개성이나 차이점도 느낄 수 없다. 척박한 미술계 현실을 예리하게 고찰하고 작가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비판과 감시라는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 저널을 발견하는 것 또한 어렵다. 즉, 미술계 내외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일정한 길을 터주고, 구성원들의 의사를 반영한 목소리에 주저하지 않는 매체가 있을 법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겉으로야 정론직필을 내세운 채 문화예술에 대한 의미 있는 의식과 방향을 내비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참신한 기획이라 보기 어려운 단순 정보전달에 머물거나 광고주와 이해관계자들의 동향을 짚어보는 수준에 그치기 일쑤다. 한편으론 경영과 편집의 분리가 요원한 채 편협한 자사주의적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도 많다. 가끔은 필자선정 기준이 잡지 구성원과의 '친분'일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심정적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종속된 상황에서 완전하고 순수한 편집의 독립과 균형 잡힌 인과성을 지키기란 말처럼 쉽지 않음을 잡지사 편집장 생활 20여년의 경험상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걸 떠나 솔직히 요즘은 그저 제 날짜에 발간되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잡지의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잡지계의 사정이 긍정적이지 않은 탓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월간지 '인물과 사상'이 9월호를 끝으로 발행을 중단했고, 최근엔 창간 50주년을 앞둔 교양 잡지 월간 '샘터'가 휴간 소식을 알렸다. 소위 잘나갔던 레이디경향, 쎄씨, 인스타일, 여성중앙, 헤렌, 루엘 등도 잡지계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다행히 현시점에서 미술잡지의 폐·휴간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의 경영상태가 건강한 건 아니다. 발행 부수는 전성기 대비 대폭 줄었으며 광고수주에 따른 경제적 보상은 낮아졌다. 운영은 앞에서 벌고 뒤로 밑진 채 억지로 끌고 가는 듯한 인상이 짙다. 결국 미술전문지 역시 위기 면에선 여타 잡지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셈이다. 그러니 언제든 폐·휴간의 시간과 맞닥뜨릴 수 있다. 전문지를 포함한 잡지의 위기는 내·외부 요인이 고루 섞여 있다. 온라인의 가벼운 정보와 변별력을 지닐 수 있는 전략의 부재,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시선을 유지하기보단 트렌드에 함몰되는 편집방향, 깊이 없는 내용에 멀리 보지 못하는 경영진의 조급함 등은 잡지의 위기를 자초한 내적 배경이다. 여기에 반드시 지켜야할 저널로서의 책임과 의무의 방기 또한 잡지의 운명을 침침하게 만든 원인이다. 잡지들이 살아남기엔 외부 환경도 좋지 않다. 전자매체의 등장, 각종 원자재 값 상승, 온라인의 활성화에 따른 구독의 외면, 매체 변화에 의한 광고주의 이탈은 잡지의 생존을 위협하는 실질적 요소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잡지에서 정보를 찾지 않은지 오래고, 포털사이트만 들여다봐도 다양한 소식을 접할 수 있는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주기가 긴 주간지나 월간지를 찾을 만큼 인내심이 강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혹자는 몇몇 신생잡지를 예로 들며 볼 사람은 본다고 말한다. 하나, 그 말의 대부분은 어두운 잡지계 상황을 애써 위로하기 위한 언어적 수사에 불과하다. 발행부수, 영향력, 권위, 신뢰도, 지속가능성 등을 따져볼 경우 미래가 암울한 건 매한가지일뿐더러, 잡지계에 드리운 여러 문제 앞에서 그들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위기를 넘어 '잡지의 몰락'까지 거론되는 동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도 모른다. 내적 요인을 거세한들 이미 변해버린 미디어 생태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불분명하고, 잡지계의 노력만으로 전통 미디어의 쇠락에 제동을 걸 수도 없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마땅한 대답을 내놓기엔 오늘날의 잡지들은 하루 살기에도 벅차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10-29 16:02:55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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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2% 아쉬운 ‘바다미술제’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가 격년제로 진행하는 국제미술전인 '2019 바다미술제'가 '상심의 바다'(Sea of Heartbreak)를 주제로 지난달 27일 개막했다. 다대포해수욕장에 마련된 이번 전시에는 12개국 35명의 작가 작품 21점이 출품되었다. 환경오염을 비롯한 동시대 문제들을 '상처의 바다', '변화의 바다', '재생의 바다'라는 3개의 섹션 아래 펼쳐냈다. 인상적인 작업은 나무 오두막을 바다에 띄운 송성진 작가의 '1평'이다. 파도에 부유하도록 설계된 이 작품은 정주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적 인간 삶을 바다 특유의 공간성에 잘 버무렸다. 당대 누구나 겪을 법한 거주의 불안정과 난민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폐목재로 만든 오두막 한 채에 올곧이 새겨졌다. 약 40여개의 인체를 해변 곳곳에 세운 이승수 작가의 '어디로 가야 하는가' 또한 공감을 불러온다. 인간의 몸통을 온갖 해양 쓰레기로 채운 이 작품은 자연생태의 순환성과 환경오염의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알레고리 없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환경에 대한 경각심이 인다. 이 밖에도 마니쉬 랄 쉬레스다 작가의 작품 '수직 물결'을 비롯한 제임스 탭스콧의 '아크 제로', 부부작가인 알프레도 & 이자벨 아퀼리잔이 설치한 '바람의 이야기, 바다의 서사' 등도 눈길을 끈다. 유목의 경험을 반영한 몽골의 엥흐볼드 토그미드시레브의 작품 '나의 게르' 역시 공간과의 새로운 관계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시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올해 바다미술제의 특징은 지구기후와 생태계 변화에 따른 여러 시선을 바다라는 공간에 예술의 언어로 다층적으로 앉혀 놓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인간이 들어있다. 하지만 모든 작품이 장소 및 주제에 부합하거나 높은 완성도를 갖고 있다 보긴 어렵다. 예를 들어 송성진의 '1평'은 같은 선상에서 읽히는 쿠바 태생의 망명 작가인 호르헤 마엣의 작품 'Deseo'(2009)처럼 해석의 여지가 넓진 않다. 그 또한 지푸라기와 나무로 만든 오두막을 마이애미 바다에 띄워 자본과 종교, 정치적인 이유로 떠도는 자들의 삶을 극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마니쉬 랄 쉬레스다의 '수직 물결'은 시민이 동참한 작업임에도 바닷가 솔밭에 빨래 널듯 널어놓아 빛이 바랬다. 시민들의 옷가지를 모아 바느질로 연결하는 물리적 과정에는 개개인의 삶을 잇는 스토리가 내재되어 있으나, 관객참여가 작품의 완성까지 이어지진 않는다. 부산에 거주하는 워크숍 참여자들과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노래를 배우는 등의 참여형 프로젝트를 표방한 태국 텐터클의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는 개막일은 물론 전시 중반까지도 작가의 퍼포먼스를 볼 수 없는 제약이 있다. 특히 라라 파바레토의 인공안개와 아니쉬 카프어의 물안개가 연상되는 제임스 탭스콧의 '아크 제로'는 아치형태의 구조물을 확장해 설치했다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앞서 진행된 바다미술제 설치작품이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바람에 올해 주제가 다소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다대포해수욕장에는 2015년 설치된 김영원 작가의 작품과 2017년 선보인 손현욱 작가의 작품 등, 몇 년 전 작품들이 신작들과 뒤섞여 있다. 주제 집중도를 분산시키고 신선함을 떨어뜨리는 원인이다. 이처럼 2019 바다미술제 또한 이전 전시와 마찬가지로 2% 부족한 측면이 있다. 장소와 공간의 특성을 효율적으로 살린 뮌스터의 아이셰 에르크맨의 '물 위에서'나, 이탈리아 이세오호에 자리한 크리스토 자바체프의 '떠있는 부두' 등을 생각하면 실망할 수 있다. 몇몇 작품은 이현령비현령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섹션 구분도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바다미술제는 바이올린과 로보트 태권브이가 등장하고, 수박과 게를 비롯한 온갖 동식물로 채워 넣은 옛 전시에 비하면 훨씬 묵직하다. 적어도 롯데월드나 동물농장은 아니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10-08 16:18:23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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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지갑 속 엉터리 그림들

최근 한 방송작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며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에 대해 물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풀과 벌레 등에 담긴 의미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에 씨가 많은 수박은 다산을 뜻하고, 변태를 거치는 나비에는 훌륭한 인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설명해줬다. 실제로 수박을 비롯해 쥐나 개구리, 맨드라미, 방아깨비 등도 기복과 출세, 장수 등과 관련되어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신사임당은 조선의 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지만,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안견의 산수화를 보고 그림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시와 글씨에도 능했다. 그림 또한 초충도를 포함해 산수, 묵죽 등의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오죽헌시립박물관, 동아대박물관, 간송미술관 등에 가면 그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신사임당의 그림은 가장 가까운 곳, 우리 지갑 속에도 있다. 바로 5만원권 지폐이다. 지난 2009년 발행된 이 지폐 앞면에는 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묵포도도'(墨葡萄圖)와 자수로 된 8폭짜리 병풍 '초충도수병'(草蟲圖繡屛) 중 제7폭에 있는 가지 그림이 함께 새겨져 있다. 뒷면 작품은 조선중기 선비화가였던 어몽룡의 '월매도'(月梅圖)와 이정의 '풍죽도'(風竹圖)이다. 한데, 이 그림들은 모두 엉터리이다. 이른바 '뽀샵' 처리를 심하게 한 바람에 원작과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묵포도도는 원래 비단에 그려진 수묵화이다. 윤곽선 없이 먹으로 직접 형태를 짓는 몰골법(沒骨法)으로 표현되어 있다. 필세(筆勢)와 더불어 은은한 먹의 농담 변화가 특징이다. 하지만 지폐의 묵포도도는 색을 발라 놨다. 포도와 잎사귀가 녹색과 갈색이다. 그나마도 원작에 있던 아래 줄기와 잎사귀는 생략해버렸다. 그림 중 일부를 제 맘대로 이리저리 재단하고 갖다 붙인 경우다. 그래도 신사임당의 또 다른 작품인 초충도수병의 가지 그림에 비하면 묵포도도의 왜곡은 양반이다. 자세히 보면 묵포도도 아래 희미하게 가지 그림이 배치돼 있다. 사실 검은 비단에 수를 놓은 원작을 모른다면 그게 가지인지 뭔지 알 수 없다. 그저 어느 이름 모를 풀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더구나 초충도의 생명인 나비도 뺐다. 곤충 없는 풀벌레 그림인 셈이다. 5만원권 뒷면 작품들도 원작의 가치가 훼손되었긴 매한가지이다. 앞서 언급한 어몽룡의 월매도와 이정의 풍죽도이다. 일단 매화를 그린 월매도는 본래 세로형 그림이다. 하지만 지폐엔 가로로 뉘어 있다. 누가 보아도 횡축으로 읽히는 지폐에 세로그림을 넣는 우를 범한 것이다. 황당한 건 하늘 높이 솟은 가운데 줄기는 한 토막이 절단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마디에서 꺾여 다시 가늘게 나아가던 오른쪽 작은 줄기 역시 가지치기를 당했다는 점이다. 특히 가운데 줄기 끄트머리에 나란히 걸려 있던 원래의 '달'을 전혀 다른 줄기에 뚝 떼어 붙여 놨다. 이로 인해 원화에 존재하던 군자다운 매화의 기품은 완전히 사라졌다. 꼿꼿한 선비정신과 자태를 담은 그림이 졸지에 반편이가 되고 말았다. 이뿐이 아니다. 어몽룡, 황집중과 함께 삼절로 불렸던 이정의 풍죽도 또한 엉망이다. 바람에 맞서는 네그루의 대나무를 그린 이 그림은 선비의 강인한 기개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지폐에선 원화의 오른쪽 여백을 삭둑 잘라내었고, 바위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완성도 면에서 절대 월매도에 뒤지지 않을 풍죽도를 마치 월매도의 장식마냥 배치해 한 작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조선의 초충도는 핍진(逼眞)이라 하여 형상은 터럭 하나까지 실물과 같도록 그려야 하며 문인화의 요체이자 핵심 미학은 사의(寫意)로써, 정신이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5만원권 그림들은 그러한 맥락과는 아무 상관 없다. '뽀샵'으로 만든 국가 공인 위작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갑에 넣고 다니는 지폐 속 작품의 실체이자, 제대로 된 도안으로 바꿔야 할 이유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9-24 14:11:45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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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젖지 않는 비 ‘레인룸’

비는 자연생태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만 일상에선 종종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오염 탓이다. 그러나 부산현대미술관에 가면 아무 걱정 없이 비를 맞을 수 있다. 우산은 필요 없다. 비가 내리지만 젖지는 않기 때문이다. 최근 화제의 전시로 주목받고 있는 '아웃 오브 컨트롤'(Out of Control)에 출품된 '레인룸'(Rain Room)은 인터렉티브 및 키네틱아트그룹 '랜덤인터내셔널'(Random International)의 작품이다. 75년생 동갑내기 독일작가인 플로리안 오트크라스와 한네스 코흐가 2005년 영국왕립예술학교 재학시절 결성했다. 랜덤인터내셔널은 전구가 달린 15개의 막대를 움직이는 장치로 만들거나, 헬륨 가스를 넣은 풍선에 모터를 달아 허공에 띄워 인간과 기술 개발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Future Self'(2012), 'You Fade To Light'(2009)처럼 신체 동작에 반응하는 인터렉티브형 작품이 주를 이룬다. 이번 부산 전시에 선보인 '레인룸' 역시 관객의 참여를 통해 작품이 완성된다. '레인룸'은 말 그대로 비 내리는 방이다. 어두운 공간에 들어서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차게 쏟아지는 실제 빗줄기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모르긴 해도 분당 수백리터는 족히 넘을 양이다. 그런데 천천히 걸을 경우 물방울은 몸에 닿지 않는다. 인식용 카메라와 센서가 관람객의 동작을 감지해 빗줄기를 차단한다. 인지과학과 미적 기술이 빚은 결과이다. 일상 속 비현실성이라는, 다소 환상적인 느낌을 심어주는 '레인룸'은 도시인들의 향수를 자극함으로써 현대인들의 아련해진 추억과 잃어버린 기억을 소환한다는 게 특징이다. 잠시나마 건조한 감성을 촉촉하게 적시는 매력도 있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레인룸'을 화제성 있는 작품으로 끌어올리는 동력이다. 실제로 2013년 뉴욕현대미술관에 설치되었을 당시 관람객들은 서너 시간 이상 기다리길 주저하지 않을 만큼 이 작품에 열띤 호응을 보냈다. 앞서 열린 바비칸센터 커브갤러리에서의 전시는 물론, 지난해 개최된 상하이 유즈미술관이나 미국 로스앤젤레스 LA카운티미술관, 호주 무빙이미지센터 등에서의 순회전 당시에도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국내 처음으로 공개된 부산현대미술관의 '레인룸'도 마찬가지다. 관람 시간이라야 5분 남짓 내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약을 하지 않으면 관람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 인기 내에는 문화예술 향유에 대한 열망이 녹아 있다. 여기에 입소문으로만 들었던 작품에 대한 호기심, 일찌감치 개인 미디어에 노출되며 주목받았던 '폭우 속 젖지 않는 기적'을 직접 체험한 이들의 경험담까지 덧대어졌다. 하지만 전제가 명확한 미증유의 이 작품이 지닌 의미는 단지 시각적 감흥에 있지 않다. '레인룸'은 상호성을 중시하는 동시대미술의 흐름을 열람케 함을 넘어 우리의 자연환경과 인간 삶의 대치성을 논한다. 기술문명 시대에서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경계까지 돌아보게 한다. 기술통제에 따른 수동적 인간화와 가공된 환경에서 실재를 찾아야 하는 안타까운 오늘마저 보여준다. 특히 '레인룸'의 핵심은 첨단을 걷는 기술과 그로 인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인간 사유의 지속성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물리적 현상을 토대로 한 '놀랍다'와 '신기하다'와 같은 형용사에 묻혀 잘 드러나지는 않으나, 우리가 이 작품을 본다는 건 결핍과 과함을 분간하지 못했던 지난날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자, 생각 없는 인류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자문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9-10 09:28:09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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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가로 산다는 것

예술가가 없다면 예술도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창작을 포기한다면 인간 삶은 감동 없는 건조함으로 메워지며, 철학과 지식 역시 반쪽에 머무른 채 진리에 대한 갈증은 영원히 해소 불가능해질 것이다. 예술이 끝없이 질문해온 존재의 근원과 현상의 얼개를 드러내려는 인식론적 결과 역시 도출되기 어렵다. 다행히도 예술을 잇는 예술가들이 있기에 우린 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세계를 열람한다. 공동체 속 구성원들 간 존재하는 여러 갈등과 문제들을 정제하여 화해와 소통으로 풀어내는데도 예술가들의 역할은 크다. 특히 그들 덕분에 많은 이들이 뜻밖의 것에서 심미적 가치를 느끼며 위로와 치유까지 경험한다. 하지만 예술가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꽤나 메마르다. 예술은 곧잘 잉여로 치부되고, 모든 굴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무목적의 목적성을 곡해한 채 사회적 중요성을 의심한다.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매개자로서의 위치와 권위는 인정받지 못하기 일쑤이며, 예술가들의 언어와 형식에서 새로운 감수성을 발견하거나 상상의 언표를 읽을 수 있음에 대해 제대로 보상하지 않는다. 보상은 고사하고 인식의 괴리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실제로 예술가들의 삶에 관한 대중의 관점은 한량이나 백수와 진배없다. 척박한 현실을 기름지게 만들고 무언가에 기여한다는 예술계 내 시각과 놀라우리만치 비대칭적이다. 이는 실존의 사실적 세계에서도 그렇지만 익명의 공간에선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일례로 예술 관련 언론보도마다 반드시 따라붙는 발언 가운데 일부는 한국사회가 예술과 예술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보여준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당신들이 좋아서 하는 것인데 왜 내 세금을 쓰느냐" 식의 시선은 일상 곳곳에 뿌리내린 예술의 효용과 예술가들에 대한 몰이해를 반증한다. 세금 값보다 더 소중한 의미 값은 설 자리가 없다. 때론 인간적인 측면에서조차 모질다. 비록 소수라고는 해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예술가들의 부고 앞에서조차 거침없이 내뱉는 조롱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곳엔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예술가로 살며 세상에 남긴 공론의 가치는 들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예술가들은 예술을 한다. 여전히 추우면 얼어 죽고 더우면 더워 죽는 현실에서도 예술을 통해 삶의 근원을 묻고,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구조와 건강한 미래를 위해 오늘도 그들은 예술이란 것을 한다. 물론 아무도 그러라고 시킨 적 없다. 누구도 그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지운 적도, 홀대받는 예술가의 삶을 살라고 등 떠밀지 않았다. 예술가인들 모를까. 알고 있다. 다만 예술가란 운명과 기질이 부르는 것이고, 지금 이 자리에 예술가로 서 있음으로써 확인된다는 사실에선 보편적 이해와 거리감이 없지 않다. 안다는 것, 그 '앎'엔 예술가로 한 번 내디딘 발걸음은 좀처럼 물리기 어렵다는 숙명이 내재되어 있다. 예술이 평생 마셔야 할 독약이었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예술의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중독된 이들은 선택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포함된다. 예술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동기로 하나, 예술가로서의 삶은 너무 잘 알기에 그들은 주변의 매섭고 독한 소리에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내 것을 나눠주면서도 들어야 하는 아픔마저 모든 것이 제 탓인 양 천형 같은 자신의 숙명을 스스로 책망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일까, 정작 자신의 적지 않은 부분을 내려놓은 채 걸으면서도 나 이외의 것을 챙기는데 인색하지 않은 그들의 삶을 응원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존재하는 예술가들을 조금 더 부드럽고 포근하게 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8-27 08:35:14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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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외국인 기획자들의 ‘포트폴리오’로 전락한 비엔날레

2년 주기로 개최되는 국제미술전을 비엔날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만 20여개가 운영되고 있다. 대표적인 비엔날레로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를 꼽는다. 국제적 담론생성 측면에선 제 기능을 못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데다 규모 및 예산 등에서 덩치가 작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외국인 기획자들에 대한 선호도가 상당하다는 것도 닮은꼴이다. 광주비엔날레는 2008년 이후 줄곧 외국인 큐레이터를 빼놓지 않았다. 부산비엔날레 역시 2016년을 제외하곤 2010년부터 2018년까지 다른 나라 큐레이터가 전시감독을 맡았다. 대구사진비엔날레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를 포함해 이들 비엔날레 또한 2020년 개최 예정인 행사에도 이미 외국인 기획자들을 감독으로 확정한 상태다. 동시대성이 강조되고 세계가 초단위로 연결되는 시대, 어느 나라 사람이 예술 감독을 맡느냐는 그리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2022년 카셀도큐멘타 전시총감독으로 선정된 '루앙루파'는 인도네시아 콜렉티브 그룹이고,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마저 외국 작가를 내세우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단, 억대를 넘나드는 세금까지 쥐여주며 극진하게 모셔오는 이상 성과 여부는 따져봐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외국인 감독들이 내놓은 성적표는 볼품없었다. 대체로 동시대미술의 흐름과 예술담론의 틀을 제시하지 못했고, 실험적인 방법론을 통해 현대미술에 관한 의심할 수 없는 세계 문화예술의 각축장을 만드는 것에도 실패했다. 동시대예술의 혁신과 도전, 새로운 담론형성과 방향성 제시 측면 역시 희미했다. 그야말로 무색무취로 끝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동적 파괴로써의 비엔날레는 고사하고 오히려 조직 내 갈등을 유발하거나 편협만 전시를 꾸리는 등 문제만 만든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2014년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을 지낸 프랑스의 '올리비에 케플렝'이다. 당시 그는 출품작가 77명 중 26명을 자신과 동일한 국적의 작가로 채워 비엔날레를 '프랑스 작가전'으로 둔갑시켰다. 케플렝은 이 전시로 '보이콧'까지 선언된 전시감독 불공정 선임 논란과 더불어 프랑스 작가 특혜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2010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낸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는 자신이 전시감독을 맡은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단 한명의 한국작가도 초대하지 않아 입질에 올랐다. 광주와 30%가량이나 작가가 겹쳤지만 그는 "한국 작가에 대한 이해부족"을 이유로 철저히 외면했다. 그리고 지오니의 한국 작가 배제는 한국의 비엔날레가 국제적 큐레이터들의 '보따리 장사판'이 되고 있다는 지적에 불을 지폈다. 한국의 여러 비엔날레가 외국인 기획자들의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 혹은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하기 위한 '디딤돌' 역할만 하고 있다는 시선은 단지 곡해로 치부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는 광주비엔날레 감독을 거쳐 베니스비엔날레로 직행했다. '오쿠이 엔위저'도 그랬다. 이외, 2014년 광주비엔날레 감독을 역임한 '제시카 모건' 등, 여타 외국인 감독들 역시 한국의 비엔날레를 통해 인지도가 높아지거나 문화 권력에 한층 더 다가설 수 있었다. 이들이 세계적인 디렉터로 주목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사실 한국의 비엔날레가 배경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역대 감독 모두가 자신의 경력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에 예술 감독이 됐다."는 '마리아 린드' 2016 광주비엔날레 감독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누구나 '하랄트 제만'내지는 '퐁튀스 훌텐'이 될 수는 없겠으나, 지난 시간 어떤 비엔날레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낸 외국인 기획자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한국 비엔날레들의 유별난 외국인 사랑은 기이하다. 전시의 질을 담보하는 최선의 카드인지 의심할만한 역사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맹목적 구애는 꽤나 가난해 보인다. 행여 문화사대주의와 근거 없는 선민사상 아래 한국 기획자들의 문화적 역량을 스스로 폄하한 결과는 아닌지 모르겠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8-13 08:40:31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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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과 ‘집’

'집'은 사회 공동체의 기초단위로써, 몸과 마음의 쉼터라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 도시의 특질을 배양하는 공공 오브제이다. 동일한 사회문화적 문맥 내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다양성과 맥락을 담는 기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집은 너와 다른 지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기준이면서 '부(富)의 차별화'를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 물론 도시의 팽창과 물질화의 상징이자, 자발적 고립의 판옵티콘(Panopticon)의 세계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 빈부격차 및 인간성의 상실을 대리하는 기호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술가들에게 집은 미적 가능성을 덧칠할 수 있는 캔버스이면서 당대 현안을 소환하는 비판적 촉매이다. 정치적·사회적 배경 아래 벌어지는 인간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이고, 인류 공통의 이슈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법에 있어서도 집은 중요한 요소이다. 실제로 집을 단지 거주의 개념이 아닌, 폭넓은 관점으로 해석하는 작가는 드물지 않다. 일례로 예루살렘 서안 출신의 예술가인 '에밀리 자키르'는 1948년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사라진 팔레스타인의 418개 마을을 기억하자며 집(마을)을 등진 이들의 이름을 적은 텐트를 설치했다. 2017년 카셀도큐멘타의 한 전시장에 선보인 이 작품은 사상과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앞에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 집과 함께 사라진 가족들의 이름을 새긴 일종의 묘비명이다.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의 '유랑하는 사람들'(2017)은 공산주의 정권으로부터 추방당한 예술가인 작가의 시각에서 난민과 이주민을 향한 공감과 연민을 녹여낸 작품이다. 특정한 정치적 상황을 말하기보단 인간이 처한 '새로운 난민의 조건'을 설명하는데 긴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이외에도 예술가들은 집이라는 명사를 통해 다양한 현실의 비극을 언급한다. 시리아 난민 소년이 익사한 레스보스 섬의 두 동강 난 나무배와 노로 만든 설치작품으로 정치적·사회적 박해와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간을 묘사한 멕시코 작가 '기예르모 갈린도'를 비롯해 임시 거주형 콘크리트관 20개를 차곡차곡 쌓아 후기자본주의사회가 만든 위기를 표현한 이라크 출신 쿠르드족 작가 '히와 케이'의 설치작품 '우리가 숨을 내쉴 때' 등이 그렇다. 특히 지난 2011년 쓰나미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 인근 주민들이 방사능 오염물질을 피해 정든 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일본인들의 상황을 '후쿠시마 산책'(2018)이라는 제목의 작품에 담은 콜렉티브 그룹 '돈트 팔로우 더 윈드', 삶의 질조차 값으로 매겨지는 당대 구조를 비판하는 육효진의 '쪽방 프로젝트' 역시 동시대 인류사에서 기억해야 할 사회문제를 집과의 관계로 다룬 작업에 해당된다. 이들의 작업은 떠도는 이들과 집을 연계한 작업인 '마이클 윈터바텀'의 영상 '인 디스 월드'(2002)처럼 동시대 인류의 가슴 아픈 현재의 역사를 보여주며 집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류의 상처와 아픔을 관조의 대상으로 삼는 현재를 통찰한다. 실종된 것이 단지 집이라는 장소 혹은 공간만은 아니라는 것을 독백처럼 내뱉는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 주변엔 한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희미한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틈에서 무언가를 잃은 채 부유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문제의식을 시각화하며 현실에 개입하는 예술의 혁혁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환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공감도가 그리 높진 않기 때문이다. 단지 집만 놓고 보더라도 말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7-28 13:22:29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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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기꺼이 포기할 것들

미술현장을 외면했다며 2013년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전에 몰려가 시위까지 벌였던 이들은 오늘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 달에 80만원도 안 되는 수입으로 생계를 꾸리는 미술현장을 대변하는 게 서울대 출신 작가들로 채워진 전시에 항의하는 일보다 가벼운 것일까. 대작 논란으로 사회를 시끄럽게 한 조영남 사건에는 성명서 발표와 고소까지 진행했던 미술단체들은 정작 설 자리를 잃어가는 중견작가들의 현실에 대해선 말이 없다. 누군가의 작업실엔 팔 그림이 없어 그림이 없고, 누군가의 작업실엔 퍽퍽한 삶을 사느라 그릴 시간이 없어 그림이 없는 양극화현상을 우려하는 이도 찾아보기 어렵다. 작가들이 유통시장에 직접 뛰어 들어 박리다매로 작품을 팔게 하는 기이한 양태를 조장해온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정책을 수년 째 접하면서도 한국 미술계 식자라는 자들은 별 다른 비판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이 깔아 놓은 무대에 올라 원고료 몇 푼에 이름을 빌려주고 무색무취한 글을 통해 적당히 동조한다. 하긴, 문제가 있어도 유구무언하거나, 유사한 사안이라도 그때마다 다른 입장을 취하는 미술계 인사들의 모습은 하루 이틀 된 게 아니다. 일례로 '내 사람 심기'라는 구태의연한 정치권력의 독선에 대항한 사례로 남은 2013년 '부산비엔날레' 파행 사태 당시 문화예술단체를 비롯한 소장파 기획자 및 평론가들은 민주적 절차의 옹립과 원칙 추구를 외치며 감독 선임절차 과정에서 드러난 비민주적 양태에 보이콧(Boycott)까지 불사했다. 현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한국큐레이터협회장이었던 그는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없이 부끄러운 사태"라며 절차적 투명성을 강조한 입장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약 6년의 시간이 흘러 그 또한 불합리한 문화행정과 '코드 인사' 의혹의 주인공이 되었고, 절차적 정당성에 하자가 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일부 작가들을 제외하곤 누구도, 어떤 단체도 반발하지 않았다. 2013년 당시 윤 관장과 함께 공정성과 투명성, 절차의 민주성을 외치던 이들조차 침묵의 터널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자신과 관계된 문제라면 기꺼이 누군가에게 맞서지만 누군가를 위해 맞서는 모습은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게 작금의 미술계이다. 보신주의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몸에 밴 무능과 권태로운 욕망 외엔 물려줄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이들이 소위 동시대 한국 미술계를 이끈다는 사람들이다. 매번 이런 글을 써봐야 달라질 것 하나 없음을 알면서도 그들을 보면 문득문득 되묻게 된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집요하며, 시니컬한 이미지로 기억될 것을 모르진 않음에도 그 욕망의 분동에 비례해 책임감과 책무 또한 준수해왔는지 궁금해진다. 예술가들이 버틸 수 있도록 기반조성과 자생력 확보에 힘을 보탤 책임, 사회 속 예술의 위치를 견고히 다져야할 책무, 흔들림 없는 신념과 소신으로 건강한 미래를 지향하며 내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비전에 공들일 책임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긍정적으로 읽히진 않는다. 그들의 궤적과 모든 태도의 중심에는 이해관계와 이익을 배제하지 않은 사적 혹은 공적 욕망이 들어 있었고, 그토록 되뇌던 정의로움을 포함한 부당함에 대한 분노조차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 혜택 앞에선 무용지물인 것이었다. 위치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면 기꺼이 포기할 것들이었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7-14 14:04:43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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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국립현대미술관, ‘민주주의’ 말할 자격 있나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관은 무엇을 움직이는가-미술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미술관의 연구기능을 강화하고 동시대 미술 담론 활성화 차원에서 시작된 연구 프로젝트의 세 번째 학술행사이다. 지난해 4월과 11월에 마련된 행사에선 각각 미술관의 주요 기능인 연구와 수집에 대해 다뤘다. 미술관 개관 50주년을 기념한 이번 심포지엄은 미술과 미술관에 민주주의를 묶었다. '현대미술관의 민주주의 실천'과 '현대미술의 민주주의 재현'이라는 큰 틀 아래 제도/기관, 사회정의, 지역/경계, 재현 이후 등을 소주제로 담았다. 모진 역사 속에서 힘겹게 민주주의를 성취해온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면 사회적·정치적·초국가적 맥락에서의 미술과 미술관의 역할 및 민주화와 미술관의 다층적 관계성을 내세운 이번 심포지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민주주의가 작품 혹은 전시를 통해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지를 세계사적 흐름에서 조명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의는 작지 않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이 민주주의를 화두로 한 심포지엄을 개최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선 냉소적이다. 민주주의의 절대 가치인 평등과 공정, 상식의 실현과 기회균등의 정당성 차원에서 의구심을 떨치기 힘든 절차로 임명된 윤범모 관장 체제하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기에 그렇다. 지난 2월 임명된 윤범모 관장은 본래 공직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시험인 역량평가에서 탈락했다. 역량평가를 통과한 후보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인사권자였던 도종환 장관은 윤 관장에게 사상 처음으로 재평가라는 기회를 줬다. 그러자 정부가 정해놓은 인사를 밀어주려 한다는 특혜시비가 일었고 '코드 인사' 논란이 불거졌다. 논란의 중심에 선 윤 관장은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 속에서도 결국 임명장을 받아들었다. 평소 패거리 의식과 인맥 제일주의를 미술계의 고질적 병폐로 지적하며 '근친상간의 구조'라고까지 격하게 표현했던 그였지만 그때는 달랐다. 정작 자신의 문제 앞에서는 불공정 절차와 특혜의혹이 난무한 인선 과정에서 발을 빼지 않았다. 오랜 시간 부조리와 불평등, 반민주적인 것에 함몰되는 세태를 꾸짖던 진보 지식인이었던 그였기에 미술인들의 좌절과 실망은 컸다.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사퇴여론도 없지 않았다. 물론 문화예술기관장을 색깔, 코드, 인맥으로 꽂는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거셌다. 당시 윤 관장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직에 응모하여 유일하게 역량평가를 통과했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떨어진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는 "정부가 응시자들을 농락했다"며 "기회균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마련한 공개모집제도가 비공정성으로 얼룩졌다"고 거칠게 비난했다. 복잡하고 다양한 개념을 갖고 있지만, 결과보다 절차와 과정을 중요시하는 게 민주주의이고, 민주적 가치를 경시하는 반민주적인 사고와 행위에 대해선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권력을 배경으로 한 특수 이익이나 부분 이익을 배척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이며, 자유와 평등, 공정, 의사결정의 민주성은 민주주의가 지켜야 할 가치이다. 하지만 윤범모 관장은 민주적이었다고 단언하기 곤란한 과정을 통해 관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6개월이 지난 현재 그가 수장으로 있는 기관에서 '미술 및 미술관과 민주주의'를 논하는 국제토론회를 열었다. 난 이 상황 자체를 꽤나 아이러니하게 바라본다. 한편으론 패널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현대미술관의 민주주의 실천과 사회정의가 과연 미술관 안으로도 향했는지, 시장 논리로 재편되는 미술관 담론을 말하기에 앞서 정치논리가 지배적인 현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6-30 13:17:2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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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범람하는 ‘아트페어’의 그늘

'아트페어(art fair)'란 말 그대로 그림을 팔고 사는 미술품 시장이다. 그림을 구입하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나 칸막이 쳐진 작은 공간을 오가며 마음에 드는 작품을 구매할 수 있다. 흥정도 가능하고 때론 깎아도 준다. 콘텐츠만 미술일 뿐, 형식은 백화점이나 마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발표한 2017년 기준 미술시장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는 모두 49개의 아트페어가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집계에 포함되지 않은 단발성 아트페어와 전시 부대행사로써 진행되는 아트페어, 올해 신설된 아트페어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70여개 안팎을 넘나든다. 10여개에 불과하던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거의 '범람' 수준이다. 간혹 동시대미술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는 헛소리로 포장되곤 하지만 지극히 상업적인 행사인 아트페어에도 나름의 장점은 있다. 우선 한자리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또한 중저가 작품들이 많아 비교적 부담 없이 작품을 구입할 수 있다. 판매에 따른 수입으로 작가들은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범람은 '침수'를 낳는다. 아트페어도 마찬가지다. 무분별한 난립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미술이 기획의 형태로 생산되고 소통 및 소비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지면서 미술자체가 기획화 된다. 대중 취향에 호소하는 얄팍한 '상품'이 작품인 냥 둔갑되어 '값'과 '가치'의 차이를 희석시킨다. 이윤추구에 부응하는 욕망에 의해 예술작품이 재단되거나 계량되는 현상도 아트페어의 부작용이다. 행사의 특성상 '장식'에 준하는 작품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예술향유의 편식마저 유도한다. 잘 팔리는 작가 혹은 그림이 예술가의 재능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거나, 예술작품에 대한 미적 기준조차 시장이 좌우하는 폐해도 가볍지 않다. 결과적으로 아트페어에는 장·단점이 공존한다. 점차 비대해지는 미술시장에 봉헌하는 작가들에 대한 시선도 엇갈린다. 민생고 해결에 있어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시장의 역할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존재하는 반면, 시장부양에 비례해 상업적이지 않은 작가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균형론'도 만만치 않다. 흥미로운 건 이미 넘쳐나고 있음에도 지원이란 명목 아래 개인사업자들의 장사 내지는 포트폴리오 작성에 세금까지 투입하는 정부와 지자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국내 10여개의 아트페어는 지자체가 주최한다. 아트페어가 교내에 침투한 첫 사례인 홍익대학교의 '캠퍼스 아트페어'는 서울시가 조성하고 있는 '캠퍼스 타운'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여기엔 모두 시민의 혈세가 쓰인다. 정부는 한 술 더 뜬다. 아트페어에 등급을 매겨 예산을 지원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작가들에게 직거래로 작품을 팔라며 판까지 깔아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문광부 산하기관인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관하는 '작가미술장터'이다. 그동안 여러 지면을 통해 수차례 지적한 '작가미술장터'는 대중과 함께 하는 미술축제, 소통의 장이라는 그럴싸한 수사를 갖다 붙이지만 실상은 '판매'와 방문객 수에 사활이 걸린 행사이다. 여기선 작가들이 직접 고객과 직거래를 한다. 이때 창작자들은 싫든 좋든 갤러리스트나 딜러가 되고 거간꾼이 된다. 정부와 지자체는 자본과 가까워질수록 예술의 자율성은 저하된다는 사실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반경영 마인드를 창의성과 독창성을 최상의 가치로 삼아 예술의 본질을 소환하고 진보된 예술향유를 이끌어야 할 예술경영으로 곡해한 채 동시대 미의식이 상업주의와 같은 선상에 놓는 과오를 자각 없이 설파한다. 대학은 더 이상 책을 들지 않으며 학생들에게 현장체험이라며 돈맛부터 보게 한다. 예술인복지와 창작지원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강력하게 주문해야 할 기성 작가들도 자신의 그림이 호텔 화장실 변기 위에 설치된 모습을 보면서도 자존심에 상처받지 않는다. 물론 사회적 의사로써의 예술이 곧 작품의 가격이라는 것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러길 20여년, 변하지 않는 한국 미술계의 씁쓸한 그늘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6-16 13:00:5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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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기대감 커진 ‘목판화비엔날레’

한국 현대판화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은 1950년대 이후 국내 일부 작가들과 해외파들이 속속 신기술을 접하고 소개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창작판화 110주년을 넘어선 일본이나 17세기부터 판화 황금시대를 구축해온 중국에 비해 출발이 훨씬 더뎠던 초창기 한국의 판화는 단순한 기법의 판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사회적, 예술적 인식 역시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외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판화의 선각자들은 선진 기술과 기법을 신속히 받아들이면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판화부흥의 새로운 발판을 제공했으며, 1958년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판화협회』를 비롯해 1968년 『한국현대판화가 협회』가 창설되면서 판화의 현대화는 가속 페달을 밟게 되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접어들면서 판화는 명실상부한 독자성을 획득한다. 제작 환경은 열악성을 면치 못했어도 70년대부터 생겨난 그룹들은 판화가 개성 있는 미술 분야로 자리 잡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80년대에는 『서울프린트』, 『프린트 미디어』, 『나무』, 『창작판화가회』, 『현대목판화회』 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판화 보급운동에도 앞장섰다. 괄목할만한 현상은, 인식의 변화로 인한 전문적인 전시의 유치와 판화인구의 확산이었다. 1986년 처음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판화부문이 새롭게 신설되었고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나 공간국제판화전, 한국현대판화가협회 공모전, 판화미술제 등을 통해 신진작가들이 배출됐다. 여기에 1993년 열린 '한국현대판화 40년' 전을 비롯해 1998년 개최된 '한국현대판화 30년' 전 등 굵직한 전시회가 연이어 추진되면서 국제화로의 교두보까지 마련했다. 이와 같은 80~90년대 판화부흥은 학계의 움직임과 맞물려 돌아갔다. 1988년 추계예술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판화과가 신설되어 우수한 인재들을 양성했다. 성신여대, 서울대, 이화여자 대학원에도 관련 학과가 만들어져 체계적인 배움의 터전을 굳건히 함과 동시에 판화가 하나의 특정, 고유 예술로 편입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판화의 전성기는 짧았다. 1990년대 후반에 도래한 세계 경제 불황의 여파에 직격탄을 맞은 데다, 무차별적으로 상업판화를 양산한 소수의 화랑들과 공방들, 일부 의식 없는 작가들로 인해 판화의 이미지는 실추되었다. 그러나 판화계의 대응은 미약했다. 다행이랄까, 그럼에도 판화는 독자성과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전문성과 대중성 면에서 절정에 달했던 90년대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일부 작가들과 지자체 및 단체의 노력과 관심 아래 조형영역과 표현영역에서의 고유한 색깔은 유지 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몇몇 지자체와 미술단체들은 동시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판화의 새로운 위상정립을 위한 고민을 현재도 멈추지 않고 있다. 시각적 향유를 넘어선 지적 깊이와 대중적 환기차원에서 판화의 또 다른 '진화'를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울산국제목판화비엔날레'도 있다. 울산국제목판화비엔날레는 오는 7월 17일부터 울산에서 처음으로 진행되는 목판화 전문 격년제 국제행사이다. 지난 2012년 첫발을 뗀 이후 지난해까지 총 7회에 걸쳐 펼쳐진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을 보다 진취적인 국제 행사로 발전시키기 위해 올해부터 비엔날레로 형식을 변경했다. 비엔날레는 이전과 다른 역동적 파괴를 본질로 하며, 그만큼 해당 비엔날레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개념미술과 미디어아트의 범람 아래 예술의 외연 확장이 외면되지 않는 현실을 고려할 때 판화의 의미를 되묻고 목판화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물론 가장 투박하면서도 예민한 표현형식을 지닌 목판화로 어떻게 동시대 인류가 처한 다양한 문제를 번역하고 공론화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지는 두고 봐야 할 과제이다. 또 하나, 적어도 비엔날레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이상 이전과 다른 그 무엇은 흥미로운 기대일 수밖에 없다. 다만 약 일주일에 불과한 전시기간은 못내 아쉽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2019-06-02 10:46:23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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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정치적 수단에 불과한 공동체와 미술

지정되거나 특정된 장소나 공간주변의 상태와 특징 등을 고려해 그 장소와 미술이 유기적 의미를 갖게 되는 미술이 '장소특정적미술'이다. 작품이 놓이는 물리적 장소는 물론, 개념으로서의 공간 그리고 어떤 상황에 비판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국내에서 장소특정적미술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시기는 조형예술품의 설치가 의무화된 1990년대 중반이다. 당시만 해도 장소특정적미술은 단일 사이트 내 물리적 환경 개선이라는 틀에 머물렀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장소특정적미술은 공동체와의 협업이나 관계를 통한 '더 나은 삶을 위한 비전 제시'로 방향이 바뀌고 있다. 이른바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이다. 일차원적 공공미술이 어떤 작품을 단지 실내에서 바깥으로 장소를 옮긴 것에 불과하다면,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은 장소와 공동체를 비롯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문화적 이슈들과 실제 사람을 근간으로 한다. 동일한 모더니티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한 '사회적 의사'로써의 미술에 무게를 둔다. 그러나 한국의 실정에서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은 이론으로만 존재한다. 실제 사람이 참여해 협업하거나 관계 맺는 방식은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질뿐더러, 주체로서의 시민이 미술 형식을 빌려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현상은 보기 드물다. 당연히 미술이 언급할 더 나은 삶을 위한 비전 제시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신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은 기관의 선전 도구로 기능하며, 정치적 수단화 내지는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접근방식 또한 과거의 공공미술 패턴을 따른다. 공원이나 공항에 미술작품을 앉히거나, 지하철에 미술작품을 들여놓는 등 공동체를 어미로 하지만 사실은 장식에 불과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지자체는 새로운 관료정책이라는 문제의식에 허약한 채, 어쩌면 각도가 다른 또 하나의 규범주의적 프로젝트일 수 있는 이벤트를 혈세를 써가며 무분별하게 양산하고 있다. 가시적 결과물이 뚜렷해 무언가 지역발전에 공헌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에 의해 공동체와 미술이 정치적 수단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대도시를 벗어나면 더욱 심화된다. 미술에 관한 지자체장의 막연한 정책적 신념은 사회적 의사와 상관없는 공동체를 소환하며, 시민들의 삶과 직접 연관된 이슈에 관해 대화를 시도하긴커녕, 여전히 어떤 장소에 커다란 오브제 덩어리를 들여다 놓는 심미적 차원의 미술을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로 착각한다.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공공미술은 미술품이 놓이는 장소와 사물에 대한 자각, 위치 변화에 따른 대상의 지위와 감각이 달라지는 공간의 맥락성을 중시한다. 삶의 장소에 흡수되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미술, 미술 형식을 빌린 시민들의 직접적 예술실천을 통한 사회적·문화적·도시적 상호작용으로서의 긍정성에 방점을 둔다. 이는 예술의 일시적 소비나 미술의 자본화를 통한 거주민의 거주공간과 평온한 일상을 황폐화시키는 도시재생으로서의 쓰임새와는 결이 다르다. 장소와 공동체가 단지 미술가의 작업재료로 대상화되는 공동체의 소재화와, 익히 폐기되었어야 할 불순한 목적의 기념비를 생산하는 것과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동시대 한국에서의 공동체 기반 공공미술은 그것이 어떤 이름(장소특정적미술, 관계특정적미술, 공공미술,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커뮤니티아트 등등)으로 불리든 상관 없이 그 지역과 공간, 장소에 실재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무관하게 행위되고 작동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2019-05-19 14:41:3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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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한국판 ‘에치고 츠마리’는 가능할까

1977년 이후 독일 북부의 작은 도시 뮌스터에서 10년마다 펼쳐지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는 삶과 근접한 미술의 살아 있는 역사로써, 예술이 일상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지각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로 꼽힌다. 예술과 인간, 자연과 예술이 조화로운 미래의 공공미술을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국제전이기도 하다. 2000년 시작된 '에치고 츠마리 트리엔날레'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의 일본판이다. 때문에 '에치고 츠마리' 또한 그곳(장소, 공간)에 거주하는 인간 삶과 밀접한 미술언어를 창조하며, 삶 속에서의 예술실천을 중시한다. 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감상자로서의 주민이라는 예술주체의 구분 없이 작가와 주민이 동등하게 아이디어를 내고 주어진 자연과 환경을 무대로 사회적 문맥에 관여하는 작품을 생산한다는 게 특징이다. 일본은 유독 자연과 인간의 맥락에 주목하는 국제행사가 많은데, 1987년 시작된 '나오시마 프로젝트'도 그 중 하나이다. 나오시마 개발의 선구자인 후쿠타케 가문과 베네세그룹, 그리고 예술이라는 독창적인 콘텐츠와의 조화로움으로 완성된 이 프로젝트는 1997년부터 시작된 '아트하우스프로젝트'와 2010년 첫 삽을 뜬 '세토우치 국제 아트 페스티벌'과 함께 지금도 예술·자연·사람이 함께 살아 숨 쉬는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예술과 일상은 평등하게 양립해야 한다는 목적의 동일함이다. 미술의 민주적 공유와 공동체와의 미적 협업을 전제로 한다는 것 또한 공통분모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벤치마킹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 중 출산율 저하에 따른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의한 공동체 붕괴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의 여러 지자체를 비롯한 몇몇 국제행사들은 이 세 현대 미술제를 모델로 삼고 있다.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고 지역 및 관광산업 활성화, 도시재생의 현실적 대안으로 혹은 차용 가능한 새로운 미술 형식으로 바라본다. 흥미로운 건 넘치는 의욕과 달리 실체적 구현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제주도를 포함한 고흥군, 하동군 등 여러 지자체들이 현장을 견학하고 다양한 정보를 취합해 자신의 고장에 접목시키려 노력해왔으나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저마다 천혜의 자연이라는 자산과 잠재력을 내세우지만 '제2의 무엇'은 요원하기만 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우리에겐 '나오시마'처럼 수천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오랜 기간 문화예술에 투자하는 기업 및 기관을 찾아보기 힘들다. '에치고 츠마리'의 저력인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지속 가능한 정책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뮌스터'와는 달리 지자체장이 바뀌면 행사의 지속성은 불투명해지기 일쑤이며, 진두지휘할 예술감독이나 담당 공무원 임기 역시 1-2년을 넘지 못한다. 40여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나, 약 20여 년 동안 한결같은 '에치고 츠마리', 30여년을 이어 온 '나오시마 프로젝트'는 길고 긴 투자와 인내, 협업의 산물이지 조바심에 급조된 행사가 아니다. 예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역의 미래를 믿는 주민들과 열정적인 예술가들, 기관 및 기업의 협치와 상생으로 일군 공동지성의 결과물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요소들이 충족될 때 비로소 한국판 '제2의 무엇'을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자연을 살리고 예술로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의지와 소신, 지역의 풍토와 역사성에 대한 통찰, 고유 자원에 관한 민·관·예의 충분한 학습 및 대화의 과정이 필수이다. 특히 예술을 통한 공공의 선 구축이라는 확고부동한 명제가 없다면 단지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망상은 실패의 학습이고.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4-21 14:43:30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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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생계 막막한 예술가들

지난 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8 예술인 실태조사'(2017년 기준) 결과는 참담했다. 기존 문화예술인 실태조사를 전면 개편한 이후 처음 실시한 2015년과 비교해 나아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예술인의 고용상황은 악화되었으며, 고용보험과 건강보험 가입률도 떨어졌다. 분야별 표준계약서 도입에 따른 계약체결 경험 상승과 부당계약체결 경험 등이 소폭 낮아졌고, 예술인 개인의 노력이 크지만 국내 예술가들의 해외 활동 기회가 조금씩 넓어지는 추세를 제외하면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가장 심각한 건 예술인 수입.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예술인이 1년간 예술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평균 수입은 1281만원에 불과했다. 2015년 평균 수입은 1255만원이었다. 3년간 고작 26만원 늘어난 꼴이다. 물가상승률과 실제 사용 재료비를 빼면 사실상 마이너스다. 문제는 이 가운데 월 100만원 미만의 비중이 무려 72.7%에 달한다는 점이다. 5백만원 미만이라고 밝힌 예술가도 27.4%에 이르렀다. 특히 예술가 중 약 29%는 수입이 전혀 없었다. 이는 예술인의 절대다수는 생계의 고통을 넘어 생존까지 위협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창작의 산실인 개인 창작공간 보유율도 줄었다. 전체 응답자의 49.5%가 창작공간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으나, 이는 지난 2015년 결과(54.3%)에 비해 4.8%포인트 감소한 수치다. 그나마 창작공간을 보유한 예술가도 '자가' 형태보다 '월세' 형태가 많았다. 자가는 37.3%인 반면 '월세'는 44.5%로 나타났는데, 2015년 34.6% 대비 7.2% 증가했다. 예술인 '경력 단절' 현황도 좋지 못했다. 입문 이후 1년 이상 예술 활동을 포기한 상태인 '예술경력 단절' 경험자는 23.9%로, 2015년 15.9% 보다 훨씬 늘었다. 이들이 예술 활동을 포기하게 된 이유로는 예상대로 '예술 활동 수입 부족'(68.2%)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머지는 질병, 출산·육아 순이었다. 이처럼 예술인들의 삶의 질과 창작환경은 3년 전과 비교해 건강해지지 못했다. 예술가 10명 중 6명은 수입이 아예 없거나 월 50만원도 되지 않는 벌이로 1년을 살고 있으니 문화예술강국 건설은 고사하고, 생활고로 배를 곯다 죽어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예술인 사회안전망구축에 소홀한 건 아니다. 서민정책금융의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으로 '예술인생활자금융자' 등의 제도를 준비 중이며,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산재보험과 고용보험 가입률을 높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예술인 복지법 제정을 비롯해, 창작대가 기준안 마련, 전속작가제도 시행 등, 예술인의 권익 보장을 위한 정부의 노력도 지속적이었다. 사회와의 협업을 기반으로 한 직무를 제공함으로써 적극적 예술인 복지를 실현하고자 마련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路(로)' 사업 역시 년차를 더하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고민한 시간에 비례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 확장을 위한 다양한 예술직무영역 개발이라는 긍정적 성과도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보다 실질적이면서 현장 중심의 정책에 속도를 내야 한다. 즉, 신개념 미술장터 운운하지만 시장 질서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작가들을 장사꾼으로 만드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작가미술장터'와 같은 무지한 정책은 폐지하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을 통한 창작지원금 확대, 지자체와의 협의를 통한 저가 예술인 임대 공간 확충 등의 현실적인 제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재외한국문화원 등을 거점으로 한 해외진출교두보 제공을 포함해, 코리안 아티스트 프로젝트와 동일한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 장치 유지, 한국 예술 글로벌 마케팅팀 신설, 추급권 도입, 각 지역 재단이나 문화회관 등과의 조율을 통한 매개자 양성 프로그램 기획 등도 궁극적으론 예술인 실태의 향후 결과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4-07 11:43:53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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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인간다움과 예술의 힘

대중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소식의 대부분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미담보다는 불확실성과 불안을 무대로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들이다. 탐욕과 굶주림으로 빼앗고 빼앗기는 현실의 단면들이 주를 이루고, 증오와 폭력을 배경으로 죽고 죽이는 상황들이 일상을 이룬다. 사회의 축소판이랄 수 있는 온라인플랫폼에서도 증오와 폭력의 그림자는 짙다. 인간의 본성이 본래 사악해서든, 아니면 단지 주목받고 싶어서든 타자를 대상화한 노골적 혐오와 미움으로 새긴 글이 적지 않다. 경박한 욕망에 부역한 채 추상화된 진실성과 익명성에 동화된 타기(唾棄) 또한 거칠게 부유한다. 이처럼 자연자체를 제외하곤 방송, 신문, 온라인미디어 할 것 없이 숱하게 등장하는 세상사 속에선 선한 마음을 밑동으로 한 '인간다움'은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존 레넌의 '이매진'은 여전히 상상에 머물며, 토마스 허쉬혼의 픽셀 콜라주처럼 오히려 모자이크처리 되지 않아야할 인간 존엄성을 비롯한 인간으로써의 품격, 교양 따위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의미 있는 예술은 이러한 현실과 상황에 저항하며 일그러진 시대 흐름에 문제의식을 투사한다. 예술가들은 폭력을 옹호하지 않으며,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고찰한다. 또한 우린 누구인가라는 명제 아래 인간 공동체가 추구해야할 본질은 사랑과 희망, 서로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 화해에 있음을 자신만의 문법으로 제시한다. 일례로 작가 에밀리 자키르는 '카셀도큐멘타14'(2017)에서 1948년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사라진 팔레스타인 마을 418개를 기억하자며 이들의 이름을 적은 텐트를 지었다. 행사의 성격을 고려할 경우 전쟁과 난민, 인종과 종교 등, 인류의 건강성을 해치는 다양한 갈등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넓게 보면 우리가 놓아서는 안 될 이타심과 경계 짓지 않는 삶이라는 화두가 중심이다. 작가 리밍웨이가 2013년 선보인 작품 '움직이는 정원'은 점차 희박해지는 사람사이의 순수한 감정을 다룬 작업이다. 갈라진 아스팔트 틈에 꽂힌 꽃을 가져가 모르는 이에게 '선물'하도록 한 이 작품은 그저 꽃을 전달하는 단순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진실한 교류와 관계 속에서 싹트는 인간다움의 소중함이 강하게 배어 있다. 비디오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2014년 작품 '순교자' 연작은 삶과 죽음이라는 초월적 세계를 언급하지만 인간의 의지와 행동, 희생의 숭고함에 관한 서술이기도 하다. 마치 성스러운 종교화를 대할 때의 느낌처럼 관람객을 경건함과 경이로움, 정화라는 씻김 속으로 밀어 넣는 이 작품은 가장 사실적이고 물질적인 재료를 통해 삶의 성찰을 강조하고, 지각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가능을 응시한다. 이밖에도 인간 공동체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지 되묻는 작가와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은 표현 방식에선 저마다 다르지만 레프 톨스토이가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라는 에세이에서 말한 것처럼 '예술은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수단'이라는 입장에 충실하다. 예술로 세계와 지역, 인종과 피부색, 권력과 신분의 유무 및 높낮이를 넘어 인류의 평등한 행복을 꿈꾼다는 측면 역시 공통되다. 물론 그 이면엔 인간이면서 인간답지 못한 예술가라면 그의 예술 역시 거짓에 불과하다는 냉정한 성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참다운 예술은 동시대인들이 어떤 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인간다움'에 대한 자각을 소환하고 올바른 방향을 나타내어 보인다. 예술의 힘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3-24 11:49:06 최신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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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재외기관까지 가세한 노동착취

미술인들이 자주 방문하는 미술정보 사이트에는 미술계 동정 외에도 공·사립 문화예술 공간에서 운영하는 공모가 매일 수십 건씩 등재된다. 전시에서부터 레지던시, 창작지원까지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전시기회가 변변치 않은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가 많다는 게 특징이다. 단순히 양적 측면만 따지자면 작가들의 창작발표의 기회가 꽤나 확장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구나 싶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작가들을 상업적·행정 편의적 도구로 보는 듯한 느낌을 배제하기 어렵다. 자신들의 특정 목적을 위해 '기회'를 수단화 하고 있다는 인상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작가 A는 모 갤러리가 운영하는 신진작가 공모전에 지원해 선정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곧 전시를 포기해야 했다. 막상 선정되자 갤러리 측은 수백만 원 상당의 작품을 기증해야 한다는 황당한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공모 요강에 없었다. 설치조각을 주로 하는 작가 B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에서 진행한 작가공모에 뽑혀 외국 전시를 앞두고 있지만 마음이 심란하다. 80만원도 안 되는 지원금으로 작품 운송은 물론 미국행 항공료와 재료비까지 해결해야하기 때문이다. 결은 다르지만 미술관도 작가들을 심적으로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과거 작가 C는 모 미술관으로부터 재능기부 형식으로 작품을 기증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보상이라곤 달랑 운송료뿐이었다. 작가비, 재료비는 지급되지 않았다. 작가는 잠시 갈등했으나 미술관 소장품이 된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은 채 결국 작품을 미술관으로 보냈다. A의 사례는 '선정 작가'를 빌미로 한 사실상의 대관이다. 말이 좋아 지원이고 선정이지, 실은 대관료에 상응하는 비용을 작품으로 받는 '꼼수'일 뿐이다. 난방비를 달라거나 도록은 반드시 자신들의 거래처에서 만들어야 한다 는 등의 온갖 소소한 명목으로 예정에 없던 비용을 청구하는 식의 흔한 '잔꾀'와 별 차이 없다. B는 올해 입법 예정인 문화체육관광부의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과 상충한다. 해당 계획에는 전시 참여 작가에게 창작에 소요되는 사례비, 작품 제작에 필요한 인건비 및 재료비, 현장설치비 등의 지급을 골자로 하는 '미술창작 창작보수제도'가 들어있다. 그런데 정작 문체부 산하기관조차 작가들을 착취하며 헐값에 이용하고 있다. C의 경우는 미술관의 권위를 이용해 소장품 목록을 거저 채우려는 질 나쁜 예다. 차후 합리적 지불에 제동을 거는 좋지 않은 기록이기도 하다. '미술관 프라이스'라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시장가의 절반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작품을 매입하는 것과 함께 사라져야할 적폐다. 작가에게 손실을 전가하고 대관 일정마저 거저 채우는 편법에 불과한 일부 갤러리들의 선정 작가 프로그램, 100만원도 안 되는 비용으로 전시공간을 채우면서도 국가의 문화예술품격을 논하는 정부기관, 직접 생산자로부터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하려는 미술관. 전부는 아니겠지만 위와 같은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적 완성도를 위한 작가들의 기여도만큼 우리 미술계가 그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한편으론 문화권력에 의한 잉여가치의 전유에 속절없이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작가들의 처지에 문득문득 씁쓸해진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2-24 15:48:40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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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강화에 산다는 것

강화에 산다고 하면 다들 배산임수에 별장 같은 집에서 유유자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그만 텃밭을 일구며 큰 개와 함께 뛰노는 상상을 한다. 열이면 열 모두 그렇다. 애석하게도 내 현실은 다르다. 난방비가 무서워 도시가스가 들어오는 아파트에 산다. 텃밭은커녕 제대로 된 화분 하나 없다. 큰 개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매일이 분주하기에 개를 위해 그러지 못한다. 고독사하는 개가 없을 리 없다. 이곳은 생활편의시설도 열악하다. 그 흔한 '이마트'하나 보기 힘들다. 금융은 '농협'이, 식자재유통은 '하나로마트'가 꽉 잡고 있다. 논밭 옆 '수협'이라는 괴이한 풍경도 여기의 특징이다. 할인매장은 '꼬끼오'가 터줏대감이다. 상호가 왜 저런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강화가 유독 닭과 친하다는 건 배달 앱만 열어봐도 알 수 있다. 거의 통닭의 무대다. 온갖 닭이란 닭은 시리즈로 다 있다. 이처럼 서울에 살던 시절 대비 강화의 삶은 생경하고 불편한 것투성이다. 그럼에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들리는 온갖 새소리는 도시의 인공적인 소리들과 차원이 다르다. 도시에선 자취를 감춘 반딧불이도 간간이 눈에 띌 만큼 청정하다. 천연기념물인 강화갯벌 및 저어새번식지를 포함해, 읍에서 10분만 벗어나도 이곳이 과연 서울 근교인가 싶을 만큼 고은 자태의 산과 바다를 만날 수 있다. 문화적 맥락과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보물까지 풍부하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전등사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과 대웅전, 약사전, 범종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가 수두룩하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을 물리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한 전등사는 조선시대 250년간 조선왕조실록과 왕실문서를 보관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국보인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곳도 전등사다. 강화엔 우리나라 고인돌 가운데 가장 큰 것 중 하나인 부근리 고인돌을 비롯해, 전통 조선 한옥 구조물에 서양 기독교식 건축양식이 혼합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세워진지 60년이 넘은 천주교 강화성당, 고려사 및 신동국여지승람에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해지는 마니산 참성단 등 역사 깊은 문화재와 유적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미술공간도 꽤 된다. 강화읍 소재 '강화미술관'은 미술인들의 사랑방이다. 특이하게도 전등사는 2008년부터 정족산 사고에서 현대미술작가전을 열고 있다. 전원 유광상 작가의 '전원미술관'이나 천자문을 상설 전시하는 '심은미술관', 국내외 주요 작가들을 망라한 전시로 명성이 자자한 '해든뮤지엄' 등도 강화의 예술적 터전이다. 이중 2013년 개관한 '해든뮤지엄'은 웬만한 미술관 부럽지 않은 수준을 자랑한다. 숲 속에 위치해 특유의 고요함이 있는데다, 전시 내용도 좋아 미술 좀 안다는 이들은 반드시 거쳐 가는 곳이다. 넉넉한 하드웨어 못지않게 강화에는 상당수의 미술인이 거주한다. 어림잡아 100여명 이상은 된다. 대부분 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복잡한 도시를 떠나 호젓한 곳에 터를 잡은 이들이다. 때문에 왕래는 드물지만 동일한 미술계 사람들이 한 지역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든든한 기분을 갖게 한다. 이와 같이 강화엔 숨겨진 문화예술이 많다. 하지만 강화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문화예술적 배경 역시 자연이다. 과거 모네나 밀레, 추사가 그러했듯 예술가들은 그 천혜의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곡을 짓고 노래를 부른다. 나도 덩달아 쓰고 따라 부른다. 강화에 살면 절로 그리된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의 한 부분이 되고, 만물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삶, 그 맛에 강화에 산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2-10 14:16:15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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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올해 눈에 띄는 전시들

공석 한 달이 넘은 국립현대미술관장. 하지만 신임 관장 발표는 깜깜무소식이다. 인사혁신처가 관장 인선절차에 돌입한 지난해 10월부터 계산하면 3개월째 빈자리다. 안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뒷말이 나오는 이유다. 신임 관장 인사는 지연되고 있지만 올해 예정된 전시들은 지난해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발표됐다. '올해의 작가상'처럼 관심도가 낮아지고 있는 기획도 없진 않으나 2019년 개최될 25개의 전시 가운데 몇몇 개는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이라는 이름값을 한다. 눈에 띄는 전시는 9월 개막하는 '광장'이다. '광장'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을 맞아 마련된 대형 기획전이다. 이쾌대, 오윤, 김환기 등 작가 200명의 작품 500여점이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에서 연이어 선보인다. 대구 출신의 재일작가인 곽인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회고전도 시선을 끈다. 이번 전시엔 국내 및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 200여점과 자료 100여점이 소개된다. 곽인식은 1970년대 일본 모노하(物派)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그의 대규모 회고전은 1985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이후 34년 만이다. 이밖에도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내외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무대인 '불온한 데이터' 전(3월)을 비롯해, 1969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30여 년의 한국 비디오아트 역사를 조망하는 전시 '한국 비디오아트 6999'(11월)를 개최한다. 한국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김구림을 비롯한 백남준, 박현기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근대미술가를 소개하는 장도 선다. 바로 '근대미술의 재발견Ⅰ'(5월)이다. 요절 및 월북 등의 이유로 그동안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한국 근대 미술가를 소개하는 시리즈 중 첫 번째이다. 3년마다 정기적으로 개최한다는 계획이다. 외국 작가들도 리스트에 올라 있다. 북유럽 전위예술그룹을 이끌며 사회 참여적 예술운동에 앞장서온 덴마크의 작가 겸 이론가인 '아스거 욘'의 국내 첫 전시(4월)와 'MMCA 커미션 프로젝트 : 제니 홀저' 전(11월)이 서울관과 과천관 야외공간에서 펼쳐진다. 제니 홀저는 사회·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텍스트 중심의 조형으로 다뤄온 미국의 개념미술가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외에도 올해엔 관심을 끌만한 전시가 전국에 포진해 있다. 우선 서울시립미술관에선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3월)가 관객을 맞는다. 130여점에 달하는 작품 수도 그렇지만 영국 테이트미술관과의 공동기획으로 알려져 주목도가 높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전(11월)을 진행한다. 그는 건물 외벽, 수영장, 승강기 등 일상의 친숙한 공간을 재현하되, 공간의 확장과 축소, 광학적 반사와 전도의 환영으로 관람객의 눈과 지각을 속이는 작업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대표작가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관객과 잠시 조우한 적이 있다. 대구미술관에선 '알렉스 카츠'(2월), '박생광'(5월), 공성훈 작가의 개인전(10월)을 개최한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장욱진의 예술세계를 심도 있게 들여다보는 기획전을 포함해 젊은 작가들의 데뷔 무대로 각광받고 있는 뉴드로잉 프로젝트(2월)를 진행한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관람객 수만큼 뉴드로잉 프로젝트에 대한 신진작가들의 관심도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에선 3월 3일까지 '강원미술 100년 & : 이수억 탄생 100년'전을 연다. 강원미술의 역사와 흐름을 아카이브형식으로 조명하고, 강원도에 머물며 한국적 정서가 물씬한 작업을 남긴 한국 화단의 1세대 서양화가 이수억의 삶과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특별전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1-20 17:16:35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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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창작활동을 지속하는 방법

곧 졸업시즌이다. 대학들도 그 대열에 합류한다. 하지만 이미 많은 학생들은 학교 담장 너머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지 않다. 지난 해 대학 강의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그들에게 졸업이란 그저 수족관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숨 쉬기 힘들고 두려운 단어일 뿐이다. 미대 졸업생들도 마찬가지다. 사회 초년생 누구나 해당된다는 빚쟁이로써의 삶, 좁디좁은 취업문,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혼란스러움은 여타 학과 졸업생들처럼 심란함을 덧대는 원인이다. '새로움에 대한 설렘'은 박제화 된 표어에 불과하다는 것도 같다. 다른 게 있다면 미대 졸업생들의 경우 불안한 현실로 인한 예술의지의 실현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추가된다는 점이다. 또한 현장이 내놓는 선택지란 작업을 포기하거나 잇는, 꽤나 극단적이라는 사실이다. 허나 어느 것도 결정은 쉽지 않다. 특히 학창시절 몸과 마음을 바쳐 오직 그림만 그려온 입장에서 작업을 단념한다는 건 좌표 잃은 삶과 다름 아니다. 이에 나름 계획적인 이들은 경제적 보호망을 만든 후 작업을 계속 하겠다는 설계를 한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작업을 도모하고, 각종 공모전에 지원하며 창작의 불연속성을 제거하려 꿈꾼다. 그렇지만 그 구상의 구현 역시 만만치 않다. 아르바이트는 최저임금이다 뭐다 해서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 넘치는 건 B급 공모전이고 입상해도 실망스럽기 일쑤다. 더구나 실력이 있다면 끌어 내리기 바쁘고 학연과 지연, 코드와 진영, 계파와 색깔, 물보다 진한 피가 성공의 주요 요소인 미술계에서 경제력마저 나약할 경우 작업의 연속성은 담보되지 못한다. 즉, 의욕과 의미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졸업 후 작업을 계속해야겠다면 몇 개의 방법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경쟁률은 높지만 창작환경을 보장하는 레지던시 입주는 작업지속에 긍정적 계기를 마련해준다. 균형 잡기가 필요하나 상업적인 작품으로 민생고를 유지하면서 작가의식이 배어 있는 창작활동을 병행하는 것도 작업 잇기의 한 방식이다. 지방자치단체 산하 기관에서 운영하는 지원금 및 전시, 출판을 비롯해 예술인복지재단 같은 정부 기관의 다양한 복지혜택도 창작지속에 도움을 준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결산 시 부족한 1원을 찾기 위해 영혼을 상실하더라도 인내해야 한다. 지난 2일 문광부가 발표한 '예비 전속작가제 지원 사업' 등을 눈여겨봐도 된다. 작가 80명에게 10개월 간 월 150만원을 준단다. 단, 전시에 워크샵, 강의프로그램 등에 참석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다. 분기별 활동리포트까지 제출해야 한다. 이도저도 아니면 전미술인을 장사꾼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작가예술장터'에 좌판 깔면 된다. 그러면 푼돈이나마 만질 수 있을지 모른다. 대신 그 경력 어디에도 쓰기 어렵다. 이처럼 녹록하진 않지만 창작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왜 예술을 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자문과 예술의 역할에 관한 뚜렷한 세계관, 가치관의 표상화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작업이 멈추진 않는다. 함께 할 사람들이 생기고 길을 찾게 된다. 그만큼 불명확한 미래도 거세된다. 참고로 보다 능동적인 창작활동을 원한다면 시야와 무대를 국외로 넓히는 게 현명하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작업환경 및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현장의 건강도도 국외가 낫다. 기회 획득 측면에선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왕 간다면 그곳에 뿌리내리길 권한다. 5~10년 유학하고 와봤자 다시 시작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9-01-06 16:30:30 이범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