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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홍경한의 시시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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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밋밋함과 진부함'…광주·부산비엔날레

7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광주비엔날레는 비엔날레 역사상 가장 많은 기획자들이 참여했다.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에다 전시 총괄 큐레이터까지 겸한 김선정 씨를 포함해 무려 11명이 전시를 꾸렸다. 기획자가 많아서인지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규모는 큰 편이다. 그렇다고 카셀도큐멘타처럼 서너 일가량 돌아볼 정도는 아니다. 전시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네다섯 배에 달하는 예산과 인적자원으로 어떻게 그토록 밋밋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었는지 의아해서 그렇다. 일례로 주제전 구성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상투적이다. 주제의식보다는 구조가 먼저 드러나고, 형식 또한 들쑥날쑥 작은 기획전들을 각각의 공간 아래 몰아넣은 모양새를 띤다. 흥미롭게도 각각의 섹션은 서로 유연하게 통합되지 못한 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 내용은 더욱 평범하다. 도시, 환경, 난민, 광주의 역사 등을 다뤘지만 비엔날레 특유의 급진성은 떨어진다. 획기적인 사회·문화적 담론 또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비엔날레자체만 해도 광주만의 특성은 물론 한국 대표 비엔날레로써의 문화예술적 나침반 역할에 힘이 부친다. 부자 비엔날레답게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다양한 장소에 다양한 작품을 쏟아 놓았으나 속보단 포장을 잘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기대했던 부산비엔날레도 실망스럽긴 매한가지다. 흔한 기획전을 확대한 전시라는 여운을 심어준다.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규모를 축소했다지만, 크기로 승부해온 여타 비엔날레들에 비해 발품을 덜 팔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규모의 축소가 곧 주제의 명징함을 뒷받침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규모 축소=집중도'라는 등식은 특별할 것 없는 기획력과 준비부족을 감추기 위해 급조된 알리바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애석하게도 부산비엔날레는 전 세계의 영토적 민족적 분열과 심리적 분리에 다가서기도 전에 '관객의 분리'부터 생성한다. 유독 넘치게 등장하는 남북분단 관련 이슈 중 일부는 신파적, 단선적 사고에서 전개되고, 어설픈 낭만주의적인 작품들은 되레 현실의 엄혹함을 은폐한다. 전반적으로 진부한 탓에 에바 그루빙거의 '군중'처럼 뜻밖의 인내심을 요하나, 다행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는 건 아니다. 그중 하나가 헨리케 나우만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통독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우회 없이 드러내는데, 영토와 정치적 통합이 심리적 분할을 극복하지는 못했음을 서술한다는 점에서 미래의 한국 상황에 참조할 만하다. 또 하나의 작품은 이스라엘 태생의 작가 야엘 바르타나의 '인페르노'다. 상파울로 솔로몬신전을 모티프로 한 이 픽션은 역사성과 종교성, 민족성에 관한 분리와 균열을 웅장함과 비장함으로 보여준다. 이밖에도 아프리카가 처한 현실과 가상, 과거·현재·미래를 버무려 SF적 문화미학을 엿보게 하는 와누리 카히우의 '불모의 땅', 시민참여형 작품인 오귀스탱 모르의 '말할 수 없는 것들'도 눈길을 끈다. 한편 개막 전부터 화제가 된 광주비엔날레의 북한미술은 그야말로 '선전'의 장이다. 22점의 북한 그림은 조형적으로 꽤나 리얼리티하며, 모처럼 회화의 '손맛'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삶의 리얼리티를 읽을 수는 없다. 고난 속에서도 웃음기 가득한 인물들은 체제 속 유토피아를 가리키고, 연극 같은 동작은 인위적 기호처럼 다가온다. 이와 관련해 기획자로 참여한 문범강 씨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벗어나면 북한미술의 예술성이 보인다"고 했는데, 애써 관람자의 가치판단을 제어하려 노력할 필요 없다. 선전화는 단지 선전화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9-16 10:47:44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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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불편한 미술만능주의

'도시재생' 못지않게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지속 가능한 도시'란 인류가 대응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도시공간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표어이다. 다음 세대가 필요로 하는 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현세대의 욕구를 부정하지 않는 수준의 도시가 미래에도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인간관심의 설정이다. 여기엔 당대 인류를 위협하는 시그널인 기후변화, 난개발, 에너지과소비, 도시슬럼화, 기아, 빈곤, 쓰레기와 같은 여러 복잡한 도시생태가 놓여 있다. 하천을 복원하거나, 생태공원을 조성하고 도시에 숲을 조성하는 등의 개발계획과 지역 내 일자리 창출, 소수자의 사회안전망 구축 등의 제도적 문제를 비롯해, 노동문제, 주거문제, 교통문제, 계급문제까지 끌어안는다. 물론 자연도 예외는 아니다. 도시를 말하며 자연을 빼놓을 수 없고, 자연을 말하며 도시를 열외로 할 수 없다. 그래서 곧잘 언급되는 단어가 '생태도시'다. 생태도시는 인간생활을 중시해 만들었던 지금까지의 도시와는 다르게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균형 잡힌 개발'이란 전제 아래 '자연과 인간이 조화되는 도시'를 말한다. 생태계 보호와 자연과 공생하는 생태공간을 창조하는 것, 도시 내 물질순환의 체계화하는 것, 쾌적한 도시 공간 조성 및 환경과 어울리는 생활 및 생산 활동 등이 그 범주에 해당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둘 다 '인간중심주의'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을 덧붙임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꽤나 헤아리는 듯싶지만 결국은 그 또한 인간 삶의 질과 무관하지 않으며, 자연은 어디까지나 인간 주변에 머문다. 그런 점에서 어떤 도시를 말하던 인간에게 자연은 하나의 도구이자 불안과 공포가 거세된 관조의 대상이다. 도구로써의 자연과 불안과 공포가 거세된 관조의 대상으로써의 자연은 곧잘 미술을 통해서도 부활한다. '지속 가능한 도시'를 위한 계몽의 용도로 호출되고, 도시와 자연에 관한 경각심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계도의 일부로 소환된다. 특히 '미술=착한 것'으로 포장하기 쉽기에 정치적 활용도 역시 높다. 예를 들면 강과 강변을 헤집어 놓곤 그 위에다 조형물을 세우거나, 나무 그늘을 걷어낸 곳에 인공쉼터를 만든 뒤 '작품'이라 부르는 식이다. 산과 들판, 섬과 해변에 온갖 작고 큰 모뉴먼트를 미술제, 예술공원, 비엔날레 등등의 이름을 붙여 구석구석 앉히는 것도 포함된다. 이때의 미술은 그저 인간에 의한 정복의 산물인 자연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대중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기여수단에 머물거나 소비되는 언어일 뿐이다. 미술을 통해 도시와 자연환경을 지혜롭게 살린 메시아이길 원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정치인들의 속내 뻔한 정치적 계산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미술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인간의 보편적인 선호나 편안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자연에 대한 편안한 거리 두기를 통한 향유의 대상으로써의 자연, 도시인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심미적인 자연재현에서 엿볼 수 있듯 해석하는 방법은 남루하고 보여주는 방식도 일차원적이다. 그러니 그 결과물 또한 피로한 오브제이자 시각공해이기 일쑤다. 미술은 만능이 아니며, 미술이 개입한다고 무조건 선(善)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되는 도시든, 지속 가능한 도시를 위해서든, 하다못해 도시재생이든 뭐든 자연은 자연자체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길이다. 자연은 스스로 치유하는 위대한 능력이라도 있지만, 손을 대면 댈수록 망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9-02 14:12:51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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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진짜 삶의 문제들'을 들추다

상품 가치만을 극대화하거나 소비 및 휘발되는 예술이 비판 없이 자리 잡은 동시대에서 인간과 자연생태계와의 공존공생을 화두로 한 예술은 의미 있으나 인기는 없다. 인간 내속의 자연생태라는 '진짜 삶의 문제들'과 근접함에도 예술의 기능 및 역할을 생태계 전체의 유지와 연관시키는 기획은 사회활동방식의 일부로써의 예술만큼 찾기 어렵다. 대개의 일반 전시가 그렇듯 간간이 선보이는 자연환경 관련 작품전에서조차 생태학적 자연미학과 자연경험의 인식가능에 관한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담론은커녕 단순 계몽 수준이거나 표피적 계도에 머문다. 심지어 자연환경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건축물 속 장식'의 일부로 그치는 경우도 심심찮다. 생태계의 위기를 진단하고 환경 파괴에 직면한 인류가 지향해야할 생명가치가 누락된 대신 그 자리엔 정치적 입장과 상업적, 대중적 호응이 채워진다. 일례로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원회 격년으로 치르는 '바다미술제'만 해도 해양생태계와 인간생태계를 연결 짓지 못한 채 그저 바다를 무대로 한 대중 이벤트에 머문다. 해변에 온갖 동물이며 로봇 등의 작품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곤 미술제라고 하니 말이다. 다만 우린 동시대 일부 작가들을 통해 자연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진짜 삶의 문제들'을 목도한다. 미술이 자연을 하나의 표현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미술 안에서 직접 작용하는 방식이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예술을 통해 식물성의 사유를 넓혀나가는 경우가 그렇다. 부산시립미술관 주전시관과 야외정원에서 오는 24일 개막하는 전시 '동아시아 현대미술전: 보태니카'는 훼손 없는 자연주의적 사고와 자본주의적인, 또는 인공적인 것에 관한 고찰을 표방한다. 인간, 자연, 도시, 사회, 거주, 재난, 구조, 욕망 등의 현실적인 내용을 토대로 지역과 환경에 대한 성찰한다. 모두 '인간 삶의 형식'을 규정하는 명사들이요, 뿌리칠 수 없는 '인간 삶의 조건들'이다. '인간 삶의 조건들'은 현장성이 가미된 '보태니카: 야외프로젝트'에서 보다 두드러진다. 필자가 미리 돌아본 이 야외 전시엔 일본의 카와마타 타다시, 중국의 리아오 페이, 우리나라의 한석현과 한성필 등, 모두 네 명의 작가들이 참여한다. 이들은 부산시립미술관 야외 정원 및 선큰 가든을 무대로 둥지모양의 구조물을 만들거나 오래되고 낡은 벽면에 녹지를 조성했다. 나무를 심어 종(種)의 연횡을 꾀하고 시민들과 함께 모은 폐자재로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다. 각기 다른 조형방식과 규모를 갖추었지만 자연과 인공 환경을 통한 지역과 도시를 살펴보고 '진짜 삶의 문제들'에 관한 고민을 나름의 조형언어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은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또한 환경문제는 인간 탐욕의 결과임에도 애써 부정해온 오늘을 일깨운다는 점, 자연주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상상하는 '식물성 사유'를 통한 '식물적 풍경'을 구축한다는 사실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늘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인간을 위한 주변으로써의 환경에 머무르고 있음을 자각하게 만드는 이번 전시는 조용하면서도 얕지 않은 울림이 있다. 특히 예술이 그자체로 목적 화되는 것이 아닌, 예술적 감수성을 통해 사회적 책임감 내지는 건강한 생태윤리로 확장시키고 있음은 인상적이다. 한번쯤 방문해도 좋을 전시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8-19 09:28:05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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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미술공모전'에 대한 단상

최근 평론을 작성하기 위해 모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대화 후 여기저기 둘러보던 중 우연히 카탈로그 한 권을 발견했다. 두께가 꽤 되는 그것은 바로 '미술대전' 도록. 국내 수없이 많은 'OOO미술대전'이나 'XXXX미술제', '△△미술공모전' 등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 중 하나다. 아무 생각 없이 들춰보는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동시대미술 이전의 방식에 기댄 낡은 언어들이 즐비한 것도 그랬지만 아마추어 그림들과 학생 수준의 작품들이 우수상이니 특선이니 하는 괴이한 상황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운영위원 혹은 초대작가라며 별도로 구성된 작가들의 작품 역시 할 말을 잃게 했다. 소수를 제외하곤 사회적 맥락과 상호 관련 속에서 미술을 바라보는 시선은커녕 개별적이면서 타인과 공유되는 경험조차 읽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봤다가 결국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된 것 중 하나는 '200페이지가 넘는 도록을 만들기 위해 베어진 나무는 무슨 죄인가'였다. 또한 '작가들은 대체 왜 이처럼 뒤범벅인 무대에 출품할까'였다. 그 어떤 공모전도 과거처럼 군 면제 혜택을 주거나 교수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가운데 후자에 대해선 여러 작가들에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작가들의 다수는 전시 기회가 없어서라고 말한다. 허나 설득력이 약하다. 수없이 많은 국내외 기관이 참신한 작품을 찾고 있으며, 정보력에 따라 기회의 부족은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특히 스스로 만든 전시를 통해 화단의 주목을 받은 역대 예술가들의 사례를 우린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는 작품의 가치에 대해 스스로 존중한 결과다. 혹자는 대중이 입상 경력을 높이 본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다. 미술생태와 상의 질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대단하다 여길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미 37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에도 거의 모든 미술공모전을 '국전'으로 여기는 세태라면 공모전 입상은 꽤나 남다를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예술성을 평가하거나 가치를 매기는 건 아니다. 그래도 입상하면 뭔가 좀 다르지 않겠냐고 되물을 수 있다. 글쎄다. 공모전은 사실상 권위와 공신력, 이미지의 문제라는 점에서 어떤 공모전이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 미술계에서 그 세 요소를 고루 갖춘 공모전은 찾기 힘들다. 솔직히 '미술대전' 형식의 공모전 수상 경력이란 아트페어로 뒤덮인 경력만큼이나 의미 있게 여기지 않는다. 'OOO미술대전', 'XXXX미술제', '△△미술공모전' 등과 같은 일부 공모전은 대체로 작가들의 자잘한 욕망을 대가와 바꾼 수익사업에 가깝다. 협회나 단체의 세를 과시하거나 존치를 위해 운영되며, 내부적으론 심사위원과 운영위원, 초대작가 등을 통해 그들만의 카르텔, 미술권력을 보다 견고히 하는 수단이다. 물론 모든 공모전이 같은 꼴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대개의 경우 '아마추어들의 신분세탁용'이라는 용도를 제외하곤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한 신진작가 등용문이라는 정의에 부합하지 않기 일쑤인 건 사실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수상하던 떨어지던 자존심만 상하는 공모에 출품료까지 지불하며 목맬 필요 없다. 권위, 명예, 성공, 금전적 이득과 아무 상관없다. '학지코진'(학연, 지연, 코드, 진영)이라는 프레임 내에서 상을 주고받는 데다, 심사받을 사람이 심사하는 공모전이란 그저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공모전에 출품하느라 신경 쓰고 돈 쓰며 엄한 신작 구작 만드느니 그 시간에 그냥 작품 한 점 더 하는 게 지혜로운 처신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8-05 17:07:21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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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필요한가?

우리나라에선 '도시문화 환경 개선 등을 위해 1만㎡이상 건축물을 신축 및 증축할 경우 건축비용의 일정 금액(0.1~1%)을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 '건축물미술작품제도(옛 미술장식제도)'를 근거로 하는데, 문화예술진흥법을 모태로 한 이 제도에 의해 세워진 공공미술(조형예술품 포함)은 모두 1만 7천여 개에 달한다. 1995년부터 20여 년 동안의 누적 금액만 무려 1조 2000억 원으로, 작품 한 점당 평균 7천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길거리에 돈을 뿌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중에서도 조악하고 수준 낮은 작품들은 심각할 지경이다. 필자가 지난해 9월 발간한 『공공미술, 도시를 그리다』(재승출판)를 집필할 당시 느낀 것도 그 많은 작품 중 의미 있는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대부분의 조형물은 미학적 가치를 따지기 어렵다. 도시흉물도 그런 흉물이 없다. 세금까지 들여 온갖 시각공해물을 쏟아놓는다는 점에서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그 자체로 우려의 단계를 넘어섰지만, 작가들의 생존권 보장 및 일자리 창출을 통한 민생고 해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간꾼이 낀 대여섯 개의 전문 업체와 소수의 작가들이 독점하다시피 해 정작 대다수의 작가는 사실상 하청업자에 가깝다. 하지만 '건축물미술작품제도'를 만든 본래 목적 중 하나는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창작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비리의 온상이기도 하다. 이면계약, 꺾기 등의 편법이 난무하고 심사위원 로비, 매수, 청탁, 배임수재 등의 위?탈법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에도 공무원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이용해 10억 원 규모의 공공 조형물 설치사업을 따낸 작가와 브로커가 구속되어 제도의 허점을 보여줬다. 이들은 일부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제공했고, 예산 10억 원 중 40%만 작품제작에 사용했음에도 90%를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설치 주체인 민간건축주들에게도 '건축물미술작품제도'는 달갑지 않다. 사유재산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철폐해야할 제도로 꼽는다. 개인 자산으로 건축물을 짓는데 왜 관심도 없는 미술품을 구입하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현행법상 준공검사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내외를 불문하고 미술작품을 설치하거나 기금을 내야 한다. 중요한 건 이처럼 문제 많은 '건축물미술작품제도'가 과연 필요한가이다. 필자는 불필요하다 여긴다. 재료비도 되지 않는 예산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작가들의 고통, 시각공해에 버금가는 작품들을 매일 봐야하는 시민들, 내 재산 내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건축주, 회화처럼 실내에 소장될 경우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대중 등, 어느 면에서든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의 업체와 브로커의 배만 불리는 '악법'에 가깝지만 정부는 되레 활성화에 방향을 두고 있다. 지난 4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미술진흥 중장기계획(2018~2022)'에도 '건축물미술작품제도'의 실효성을 높인다며 현장실태 점검 및 개선, 불명확한 기준 보완과 복잡한 행정절차 간소화 등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구체성과 현실성이 떨어진다. 검토, 유도, 기대 등의 추상적인 단어들만 부유하고, 기존 드러난 대안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나마도 법 개정과 맞물린 사항이라 실현가능성조차 불투명하다. 결국 '건축물미술작품제도'에 대한 정부의 의식은 그저 종이 한 장, 텍스트 몇 줄에 머물고 있다 해도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이전 정권과 차별화된 뭔가는 해야 되는데 적어도 예술정책에 있어서만큼은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문재인 정권의 현주소를 확인시키는 사례라 해도 무리는 없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7-22 14:35:36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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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죽지 않는 '실패의 유령'

비엔날레를 비롯해 국공립 미술관 기획전 등, 동시대 치러지는 대규모 미술 전시들은 채집된 역사를 포함해 의미 있는 자료와 오브제들을 하나의 공간 속에 뒤섞어 놓는다. 여기엔 예술작품이라 정의되지 않았지만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된 것과 현실을 텃밭으로 한 제의된 각종 사물 및 제안된 상상까지 포함된다. 전문 전시기획자라면 작품을 비교, 탈주, 복원, 충돌로 언급하고, 어긋남과 마주하기 등을 통해 비선형적으로 제시한다. 학제 간 장르 간 경계 넘기로 미학적 간극을 보여주며, 다층적 언어와 불특정 조건의 개입을 허락해 하나의 문맥을 만든다. 그리고 이 문맥은 새로운 미적 태도와 형식을 낳는다. 이와 같은 상황을 전설적인 큐레이터인 '하랄트 제만'의 개념으로 해석하자면 '조직화된 혼돈'이다. 즉, 서로 다른 맥락에서 발생된 잡종의 과정들이 즉시각적으로 생성되거나 소멸되고, 전시라는 틀 안에서 예술과 비예술, 실체와 비실체가 얽히고설켜 자유로운 미적 시도를 일으키는 상태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짜서 이루거나 얽어서 만들어진 것, 그리고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개체나 요소를 모아 구축한 체계는 과거의 전시방식과 차별을 유도한다. 가치 있는 미술의 방향을 제시하며, 그 방향 위에서 이전과 다른 예술생태계는 정립된다. 우리가 간과하던 논쟁, 논의의 대상이 비로소 의식의 일부로 표면화되기도 한다. 물론 전시를 통한 통상의 생경한 전개와 파격적인 작품으로 인한 논란이 간혹 대두되기도 하지만, 그 논란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술형식과 방법론에서의 미래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성이 크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 굵직한 그 어떤 전시에서도 예술형식과 방법론에서의 미래성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개념자체는 이해하는 반면, 반드시 구조가 개념을 뒷받침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전시구조는 낙후되어 있다. 전시가 시각적 감흥에 멈추는 가장 큰 배경이자 사실상 불사의 유령을 소환하는 이유다. 이런 현상은 특히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예산을 받아 치르는 행사에서 유독 심하다. 주변의 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기획자들을 힘들게 한다. 전시기획자들은 하나의 전시에 침투하는 기관, 지역, 대중, 미술계 내부라는 다양한 시선과 맞닥뜨린다. 돈을 대는 관의 입장을 헤아려야 하고(그 중에서도 관객 수), 행사가 치러지는 지역의 눈치(지역작가 소외론)도 봐야 한다. 변별력 있는 주제와 그에 맞는 작가를 참여시켜야 하면서도, 미술계 내의 반응(담론형성 여부)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당대 전시들이 철학 없이 부표처럼 흔들리는 원인에는 이처럼 전시를 전시처럼 만들지 못하게 하는 다양한 끼어들기와 명분 희박한 관여가 놓여 있다. 소위 지역일수록 그 참견의 농도는 진하다. 그야말로 아마추어들이 프로의 세계를 좌지우지 한다. 여기에 과대 포장된 기획자들의 실력과 일부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태도도 개념이 단지 논리적 분별에 그치는 원인이다. 이들에게 전시는 입신의 도구요, 기획은 출세의 설계다. 그러니 신념 따윈 기대하기 어렵다. 이밖에도 서구 시선에서의 오만한 세계주의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됨에도 자각 없는 환경, 시도를 금기시하는 행정 역시 전시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배경이다. 문제는 미술의 순수성은 그저 욕망의 알리바이이기에 기대도 되지 않는 이러한 상황이 당장 변화하진 않을 것이란 점이다. 믿기지 않는다면 현재, 아니 다가올 전시들을 기념비적인 것들과 대조해보라. 깊이 보면 드러나고 가까이하면 읽힌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7-08 12:04:49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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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가 장사꾼 만드는 정부

모든 미술이 공동체의 삶과 커뮤니티의 정체성, 사회적 의미를 드러내는 공공재로써의 언어를 내재할 순 없다. 자신의 작품이 예술일 수 있음을 작가 스스로 입증하거나 미술 자체의 존재이유와 방식에 관한 제안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다. 더구나 미술의 출발점을 개인사에 두는 것은 후기모더니즘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동시대 미술계 내 적지 않은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 그 가운데 유독 내상을 주제로 한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의 다수는 이해는 되는 반면 공감은 어렵다. 어느 땐 심각하게 시시하다. 그럼에도 사달라고 아양 떠는 그림들 보단 시시한 것이 낫고, 신통찮은 작품 한 점이 벽걸이용 장식을 미술로 착각하는 작가들의 그것 보단 괜찮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안다. 그러나 작가 중 일부는 아트딜러가 해야 할 일까지 대신한다. 직접 나서 시장을 열고 좌판을 깐다. 작품을 팔 수 있는 기회가 없고 당장 민생고는 해결해야하기에 선택한 길이지만, 이젠 그러한 행위가 시대의 흐름인 냥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만큼 '작가=사업자'라는 등식이 익숙해지고 있는 셈이다. 허나 작가들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에 관한 자문이 삭제된 이미지덩어리를 '작품'이라고 내놓는 현실을 합리화하는 건 사실상 구조 탓이 크다. 그리고 그 구조의 정점엔 '예술경영지원센터'와 같은 산하 기관을 내세워 작가들을 시장으로 내모는 정부가 있다. 즉, 정부야말로 예술가들이 사회적?역사적?미술의 맥락에서 기존의 어떤 것에 의미적으로 견주길 포기하고 '시장소비재'로써의 재화제작을 강요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산하기관들을 통한 시장중심정책을 고수해 왔다. 한쪽에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예술가들의 자유를 옥죄면서 다른 한쪽에선 미술시장진흥을 기초예술 보호로 오판한 미술시장정책을 펼쳐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난한 미술계에서 돈을 쥐고 흔들며 예술가들을 줄 세웠고, 현장에 개입해 미술의 역할을 자본시스템이라는 프레임에 가뒀다. 심지어 작가들이 직접 나서 대중에게 작품을 팔고 수익을 갖게 하는 '작가미술장터'까지 마련해주며 예술의 상품화, 예술가들을 장사꾼으로 만들고 있다. 이 가운데 정부예산으로 치러지는 작가 직거래 미술장터는 문제가 많다. 일단 미술계 내 유통질서를 교란하고 예술을 매개로 사회와 인류공통의 화두에 끝없이 질문하는 미학적인 태도에 앞서 '취향공동체'에 읍소하는 작가관을 조장한다. 여기에 아직 무르익지 않은 작가들에겐 철학적 사고 대신 얄팍한 자본논리부터 제공하는 위험도 있다. 넓게 보아 '문화산업'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시장 중심 정책은 미술의 책무마저 외면하는 현상을 낳는다. 인류공통의 이슈를 지각과 감수성의 층위에서 창조적으로 담아내며,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해석하는 예술적 입장이 소홀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대중에게 예술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미술시장 중심 정책은 그리 긍정적일 수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시장론'을 '예술론'으로 착각한 듯 상품으로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영역에 작가들을 떠밀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정권이 바뀌었어도 마찬가지다. 미술인들의 소득과 관계되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인정 및 관심을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이 곧 단순산업생산과 구별되지 않는 지점을 가리키는 게 아님을 정부는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경영', '시장', '유통'이 무너진 기초예술과 붕괴된 예술현장을 살리는 대안 역시 아니라는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징재화인 미술은 예사로운 경제적 기준에 저항할수록 예술의 가치와 자율성을 지켜낼 수 있음을 작가들 또한 기억해야한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6-24 14:44:56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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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과 스타일

학생 또는 이제 갓 미술계에 발을 들인 젊은 작가들과 작품 관련 대화 시 곧잘 접하는 질문들이 있다. 자신만의 표현방식 혹은 독자적인 길에 관한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는 일정하고 통일된 독자적 양식, 즉 스타일에 대한 부분도 있다. 최근 모 대학 강의에서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작품을 보여줄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과거와 현재의 작업이 너무 다르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고 운을 뗀 한 학생은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곧 나만의 스타일이 없다는 것인가요?"라고 물었다.필자의 입장에선 워낙 자주 듣는 물음이라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현재로선 특유의 예술적 방식이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지극히 합당한 시간을 지나고 있으니 염려하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조언했다. 문제처럼 비춰지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타일과 관련해 영국 작가 이언 잭맨은 그의 저서 '아티스트를 위한 멘토링'에서 옵아트의 대가인 브리짓 라일리의 발언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술가의 초기작은 여러 가지 경향과 관심의 혼합물일 수밖에 없는데, 그중 어떤 것들은 양립 가능하지만 어떤 것들은 상충한다. 예술가가 자신의 길을 고르고, 그러면서 어떤 것은 거부하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면, 특정한 탐구패턴이 나타난다. 한 가지를 잘못 판단함으로써 다른 하나를 맞게 된다. 당시에는 그 다른 하나가 무엇인지 모를지라도." 스타일은 예술을 옹립시키는 모든 요소들이 결합된 유무형의 결정체다. 다양한 조형요소와 원리를 비롯해 드러나지 않는 맥락과 질서를 담아낸 결과이자 가시적 표상체계의 완성이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며 일궈진다. 하지만 현장에 있다 보면 엊그제 졸업한 신진 작가들조차 내용과 형식의 특성에 조급해하고, 그런 그들에게 스타일이 없다면서 나무라는 이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특히 후자의 예는 예술초년생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스타일이란 넓고 깊은 경험을 토대로 한 미학적 탐구의 결과이기에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피카소의 드로잉을 보고 예술가로서 자신이 발전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맛보았다고 피력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오히려 처음 예술계에 발을 들인 작가들의 작품은 옛 선배들의 작품과 동시대미술흐름의 복합체로 나타나는 것이 마땅하다. 브리짓 라일리의 말처럼 젊은 작가들은 아직 명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이것저것 실험적인 과정을 거치며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며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 가는 게 정상인 셈이다. 이는 모네와 피사로, 드가로부터 색과 붓놀림을 빌려와 독자적인 양식을 만든 마네나, 피렌체 메디치도서관 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벽화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시인한 마크 로스코, 1913년 아모리쇼에서 발견한 야수파와 인상파, 큐비즘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전혀 다른 예술관을 갖게 된 미국 추상화가 스튜어트 데이비스 등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일부 젊은 작가들에게서도 소위 스타일이란 것을 엿볼 수 있다. 일찌감치 자기만의 특성을 선보이는 작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허나 그들에게서 읽히는 스타일이란 대체로 취향의 보편성에 기댄 여운이 있다. 그건 젊어서 알게 되지만 경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 무엇과는 결이 다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6-10 15:00:53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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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가의 삶과 무덤 속의 길

관심과 이해를 높이기 위해 생존의 경계에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예술가들의 상황을 설명하면 적지 않은 이들이 대체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으레 '그래도 행복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예를 들면 "연간 평균 수입이 600만 원대라는 것은 지나치게 적은데, 우리나라 작가들은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작업하네요.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삶인데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니 행복하지 않을까요?"라는 식이다. 행복이란 저마다 가치와 기준이 다르기에 선뜻 정의하기 곤란하나, 분명한 건 좋아한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취미와 전업의 영역이 다르듯, '좋아하다'가 '좋다'가 되고, '행복하다'가 '행복'이 되는 것 사이엔 만경창파(萬頃蒼波)가 놓여 있다. 사실 종이처럼 얇고 솜털처럼 가벼운 재주로 생산한 것을 예술의 전부로 착각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예술가는 행복하지 않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김명곤도 비슷한 얘길 한 적이 있지만, 매일 예술가들을 만나는 필자 역시 예술이 그들에게 약속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법한 행복이 그들의 삶 내부 어디에서도 쉽게 발견되지 않음을 본다. 오히려 예술가들은 예술을 이어갈수록 비탄과 암울에 젖는다. "그래, 나만의 일, 그것을 위해 내 삶을 위험에 몰아넣었고, 그것 때문에 내 이성의 절반은 암흑 속에 묻혀버렸다."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체념처럼 어두운 불안이 쉼 없이 짓누른다. 행복은커녕 절망이 지배하고 두려움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렇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예술가에게 예술은 그 자체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공허한 공간 앞에서 체감하는 상실된 좌표와 무언가를 끄집어내야하는 막막함, 무덤 속의 평화와 진배없는 작업실의 무게감은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 행복할 것이라 여겨지는 예술가는 경제적 엄혹함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예술적'일 수는 있어도 예술은 불가능한 일부를 제외하곤 그들은 가진 것 또는 가질 것이 너무 없다. 명예, 지위, 신분 등 사회 속 모든 인색함은 거의 그들 몫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왜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버리지 않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버리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에 가깝다. 숙명이랄까, 한 번 내딛은 발걸음은 물리기 어렵다. 애써 빠져나갔다가도 되돌아오고, 예술이 평생 마셔야할 독약이었음을 깨달았을 땐 그들의 생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술가의 삶은 선택이 아니다. 예술의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중독된 이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운명과 기질이 부르는 것이고, 지금 이 자리에 예술가로 서 있음으로써 확인된다. 이처럼 예술가가 예술인임과 동시에 현실임을 강조하기엔 대중에게 덧대야할 미주가 많은 대신, 예술가는 단지 예술가임을 받아들인 대가치곤 여러 면에서 혹독한 삶을 산다. 심지어 얼마나 가난한지 증명해야 지원을 받고, 처지의 이해가 곧 감성팔이로 치부되는 동일계 내 일부 태깔스러운 시선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변함없이 작업을 한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비극을 인용하자면 생과 사의 기로에서조차 예술이란 것을 한다. 남들은 잘 알아주지도 않는 예술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러니 어찌 예술가의 삶을 '천형(天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2018-05-13 11:40:18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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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경박한 '시장소비재'로써의 예술

예술이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수익과 무관한 예술은 점점 그 존재성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커진다. 예술이 돈만 밝힌다면 시대를 번역하고 공동체의 삶과 사회적 의미를 포박하는 공공재로써의 역할 대신 가벼운 '시장소비재'의 하나로 대우받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술은 이미 '시장소비재'로 전락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예술의 자본종속화는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진열대 상품처럼 예쁘게 봐달라며 옹알거리는 경박하고 조악한 것들이 미술인 냥 포장된 채 넘쳐난다. 즉, 더 이상 시대정신의 표출로써의 예술이 아니라 사고파는 '물건'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들이 지천이라는 것이다. 예술이 '시장소비재'로 떨어지면서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도 점차 가벼워지고 있다. 가난에 절은 고학력백수로 인식하는 대한민국에서 예술가가 언제 한번이라도 변변한 사회적 지위와 대우받은 적이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예술가 스스로 자존감을 내려놓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없이 사는 건 동일하나, 그래도 과거엔 품위가 있었고 격과 기품을 목숨처럼 지켰다. 만든 것을 팔아도 팔기 위해 만들진 않았다. 예술가에 대한 세인의 존중은 그런 태도에서 나왔다. 하지만 오늘날의 예술가는 취향공동체에 읍소하기 급급하다. 심지어 '예술가의 가난'이 저급한 시장루트를 개척하는 알리바이로까지 작동한다. '시장소비재'로써의 예술은 미술계 전반에 침투해 있다. 미대생들은 살아서의 제프 쿤스가 되고 싶을지언정 죽어서의 박수근은 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예술은 삶의 수단일 뿐 삶의 전부는 아니다. 취업생각에 대학 2-3학년만 되면 붓을 놓는 게 드문 현상도 아니다. 허긴, 예전만 해도 이렇게 그려 달라 저렇게 그려 달라 하던 화상들의 주문에 벌컥 화를 내던 기성 작가들조차 어느덧 순종적 주문제작자의 위치로 탈바꿈했으니 예술을 대하는 학생들의 가치관을 두고 뭐라 할 위치는 아니다. 경력 좀 쌓은 이들조차 인테리어업자와 예술가, 장사치와 작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 이들이 교수요 선생이니 어쩌면 학생들은 아무 죄가 없는지도 모른다. 진짜 죄가 있는 건 정부다. 오래 전부터 정부는 '시장소비재'로써의 예술을 부추겼고, 예술가가 살 수 있는 대안으로 시장만 제시했다. 박근혜 정권 당시 발표한 '2014-2018 미술진흥중장기계획'은 아예 화랑이나 아트페어진흥정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의 ''미술로 행복한 삶' 2018-2022 미술진흥중장기계획' 역시 시장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술가와 매개자의 창작환경 개선이 소폭 늘었지만, 산업, 경제, 직업, 일자리, 시장이 키워드이고 이 또한 결국은 세금으로 때우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그야말로 '미술로 행복한 삶'이 아니라 '돈과 직업이 있어야 행복한 삶'이다. 자본이 미술의 정의와 질서까지 부여하고, 시장의 가치가 곧 미술의 가치로까지 인정받는 시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구닥다리일 수 있다. 비엔날레와 아트페어가, 미술관과 상업갤러리가 서로 베끼며 탈고유성을 합리화하는 현상이 보편적이라는 진단이 맞는다면 경계를 읊조리는 것 또한 진부함이다. 그럼에도 그 낡고 케케묵은 화두를 꺼낸 건 당장 손에 쥐는 건 없어도 예술가로써 자존감을 지키며 작업하는 이들을 응원하기 위함이다. 취미와 취향에 자신의 예술을 봉헌하지 않는 예술가들을 지지하기 위함이다. 의미 있는 미술사는 시장이 쓰지 않는다. 데미안 허스트나 무라카미 다카시는 세련된 비즈니스맨이지 동시대 예술의 정의를 대표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침소봉대할 필요 없다.

2018-04-29 12:48:56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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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기대감 높아진 부산비엔날레

당대 많은 예술가들은 동시대인의 삶을 미술언어로 드러내며 인류가 처한 다양한 문제들을 언급한다. 환경, 빈곤, 장애, 전쟁, 인권, 난민 등과 같이 미술을 통해 누구나의 머릿속에 있지만, 아무도 감히 보려 하지 않는 무언가를 끌어낸다. 이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예술가의 책무에 관한 부정 불가능한 근거이면서, 그것이 곧 예술의 가치임을 확신한 작업으로 드러나고 전시라는 방식으로 다양한 공간에서 구현된다. 하지만 사회적 역할로써의 예술이 극명하게 소환되는 장(場)은 비엔날레다. 낯설고 급진적인 접근법으로 현대미술 담론을 이끌기에 간혹 대중과 괴리한 시각적 불편함 및 심리적 거부감을 심어주지만 가장 정치적이며 실험성 강한 무대가 바로 비엔날레이다. 실제로 비엔날레는 싫든 좋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 간 예술 힘겨루기를 시전 중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알 수 있듯 내용은 물론, 태생부터 그렇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좀 다른데, 정부와 지자체 예산에 기댈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다, 비엔날레조차 대중취향에 매몰되길 원하는 이들로 인해 에둘러 표현하거나 가까운 길도 돌아가기 일쑤다. 논란을 두려워하고 여론재판을 감당할 수 없는 관계자들의 허약한 체력도 정치를 담아내기 꺼려하는 원인이다. 그런데 올해 9월 개최되는 부산비엔날레는 정치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동시대 인류가 처한 현실, 한반도의 정치적·역사적 분단과 분열, 세계 만연한 균열과 대립, 물리적 영토와 심리적 영토를 다룬다. 이를 통해 지구공동체의 외상과 내상, 긴장과 갈등의 접점을 발견하고 치유로써의 해법을 찾아 나선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Divided We Stand)'라는 주제가 다소 추상적이긴 해도 내용은 미술흐름이 아닌 '현실'을 반영해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색깔이 선명하다. '경계', '여백', '공론' 등의 단어 아래 이것저것 갖다 붙이기 쉬운 이현령비현령 식 주제와 내용으로 비엔날레 특유의 도전성을 외면해온 역대 비엔날레와 달리 성격이 뚜렷해진 게 특징이라는 것이다. 내용의 명징함은 반대로 작가선정 폭이 협소해지는 단점을 낳는다. 하지만 '강원국제비엔날레2018'처럼 부산비엔날레 또한 이와 같은 약점을 참여 작가 수를 대폭 줄이되 집중력을 높이는 것으로 보완했다. 향후 공개될 작품 수준과 작가 선정의 적절성에서 성패가 갈리겠으나 일단 '속없이 거대한 몸뚱이'를 자랑으로 여겨온 비엔날레들과 비교하면 현명한 판단이다. 하지만 해빙기에 접어든 오늘날 한국의 남북관계를 염두에 둔 듯한 인상은 별로다. 한반도 분단과 평화는 중요한 이슈이고, 정작 비엔날레 관계자는 국내외 정치상황과 맞물린 주제설정은 아니라고 하지만 북한미술 섹션을 주요 전시로 내세운 채 한반도의 분단과 경계가 지니고 있는 현 상황을 거론한 광주비엔날레처럼 시류에 편승한 듯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이밖에도 냉전을 축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거나 공상과학이라는 테마 아래 보여준다는 미래는 생뚱맞고 고루하다. 내용은 정치적일 수 있지만 전개방식은 정치적이지 않아야할 과제도 남아 있다. 더구나 개막까지 불과 5개월 밖에 남지 않아 전시를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도 우려의 이유다. 허나 부산비엔날레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꽤나 예민하고 꼼꼼한 스타일로 알려진 감독들과 오는 6월 새롭게 문을 여는 부산현대미술관의 컨디션도 좋다. 특색 있는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도 작품을 내걸기에 매력적인 공간이다. 무엇보다 뜬구름 잡지 않는 주제의식, 콘텐츠 중심으로 돌아선 전시방향이 흥미롭다.

2018-04-15 09:26:32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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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페이스북을 삭제했다

최근 페이스북을 삭제했다. 아주 오랜 시간 운영해온 정보와 소통의 창구였지만, 문득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와는 지나치게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컸고, 누군가에게 혹시 모를 오해와 상처, 아픈 기억을 생산할 수도 있는 무대라는 판단에 계정을 없앴다. 특히 그 상처와 오해, 아픈 기억들을 숱하게 내뱉는 타인의 경험들도 내겐 또 다른 상처와 아픔이자 경험이었다. 그 경험의 사례들을 감당하기 버거움은 페이스북을 접는데 작지 않은 계기가 됐다. 페이스북을 하지 않자, 이미 주어졌으나 알 수 없던 시간을 되찾았다. 나를 응시하는 기회도 발견했다. 나와 사회 간 인식과 의식의 무게가 다를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은 덤이다. 누구나 그렇듯 '세상'에 존재하는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상징'일 뿐, 내가 나를 이해하고 있는 것만큼 진실된 나의 참모습과 사회 속 나와의 사이엔 분명한 거리가 있다. 그런 점에선 우리가 일평생 수없이 부르게 되는 이름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례로, 인칭명사 A는 '실재의 A'와 깊은 관계가 없다. 그것은 단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사물이나 현상 따위에 붙여진 '기호'이지 본질적 인간으로서의 A, 개인 고유의 정체성을 지닌 A를 내포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A는 실재 A가 아니라 세상에 기호를 등록시킨 A로서만 존재하고 통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호화된 A는 실재 A가 결핍된 A, 상징을 획득하는 대신 실재를 버려야 하는 타자로서의 A이다. 하지만 동일성향의 어떤 집단에서 상징적 존재로써의 나는 엄연히 내가 아님에도 진짜 나의 전부처럼 수용되곤 한다. 즉, 남과 다른 자신을 지정하는 '나'라는 대명사가 비록 상상의 실재, 상징적 실재, 관념적 실재, 인위적 실재를 규정하는 기호에 불과함에도 구성원들은 대개 실체화된 실재, 종극적(終理的)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겠으나 소통수단의 인위적 효용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다수는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를 자발적으로 걸러내길 주저한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지각과 의식이 진짜인냥 적시되는 적절한 포장지로 삼는다. 그리고 페이스북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그곳에서 연기를 하고 대본을 쓴다.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표적인 소통수단인 '글'을 통해 여러 상징을 만들었을 터이다. 이미지로 덧대긴 해도 주된 표상은 글이고, 글은 대개 구체적,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은폐되는 대신 상징으로서의 존재가 형성되는 틀이었다. 타자에게 실재의 전부인 양 각인되는 주요 거푸집이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달리 말해 글이라는 특정 방식이 가끔씩 현존의 나마저 변질시킨다는 부작용을 알면서도 상징과 기호로서의 나를 꾸미는데 거리낌없이 긍정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많은 이들은 '글'이 생성한 상징으로서의 나를 두고 섣불리 규정하고 지정했다. 세상에 등재시킨 기호 덕분에 단지 특정된 무엇을 확대, 재생산하며 쉽게 논하고 예단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와 같은 인식과 흐름은 억울하면서 합당한 측면이 있다. 그건 내가 아닌데 내가 되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나 스스로 그 가공의 나를 진정한 나로 각인시키려 애쓴 면도 없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결국 억울함도 합당함도 모두 내탓이다. 다만 어떤 이유로든 실재의 나와 기호로서의 내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채 거세당한 실재가 거름망 없이 수용되는 상황의 연속이 고통이라면, 나아가 그 고통을 완전히 증발시킬 수만 있다면 버리는 것이 훌륭한 메이크업이 가능한 무대를 유지하는 것보단 가치있다. 글과 말로는 극복할 수 없는 부분까지 재단되는 상황이 지속되고 의미를 거론하기 힘듦이 자각된다면, 더불어 의미를 의미롭게 설득하려는 노력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라면 차라리 나에게 나로써의 참됨을 나부터 만들어가는 게 순서다.

2018-04-01 14:50:05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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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미술, 그곳에 사람이 있다

어떤 장소나 공간 주변의 상태와 특징 등을 고려해 그 장소와 미술이 유기적 의미를 갖게 되는 미술이 '장소특정적미술'이다. 실제 장소와 개념으로써의 장소 자체에 주목하는 설치작품은 물론, 장소를 근간으로 컨텍스트(context)와 과정을 다루는 '퍼포먼스', 미술과 미술가들의 공공적 역할인 사회문제를 미술적 이슈로 삼는 '관계지향적미술', 그 문제들에 관객들의 적극적인 협업과 참여를 유도하는 '비판적미술' 등이 모두 장소특정적미술에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장소특정적미술'을 그저 특정한 장소나 공간과의 호흡 속에서 성립하는 미술로 보는데, 이는 다소 적절하지 않은 정의다. 글자 그대로 특정 장소에 존재하도록 제작된 미술품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오브제로서의 '미술'과 '장소'라는 분별적, 독립적 명사로부터 벗어나 점차 개념적으로 확장되어 왔음이 사실이며, 동시대에서 '장소특정적미술'이란 특정 장소와 상황을 미술이 수용함으로써 그 장소와 상황에 '비판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까지 일컫는 탓이다. 국내에서 '장소특정적미술'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시기는 1995년경이다. 조형예술품(조각, 벽화, 회화 등)의 설치가 의무화된 당시만 해도 '장소특정적미술'은 공공미술의 영역에 머물렀다. 때문에 미술을 공공공간에 가져다 놓은 것만으로도 도시 환경을 갱생하고 인간화한다고 여겼다. 허나 모든 공공미술작품이 아름답거나 랜드마크로써 역할 하는 것, 불특정 다수의 익명의 삶과 연계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공의 공간은 누군가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잠시 빌려 쓰는 것인데, 수준 낮은 작품들 때문에 대중이 감내해야할 피해는 의외로 컸다. 특히 작품과 장소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중시했던 작업들 가운데서도 동일한 작품이 재생산되면서 공공미술의 전위성이 자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와 같은 현상은 새로운 담론에 불을 지폈다. 이때 발생하게 된 개념이 바로 '공공성'의 실현이다. 공공성은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사회 구성원 전체의 기억과 쟁점, 삶의 맥락을 수용한다. 공공공간의 주인은 시민이며, 공공의 공간을 대여하여 사용하는 미술은 그 자체로 공공성에 관한 책임을 지녀야 한다. 그것의 올바른 성과가 공공성의 실현이다. 그러나 한국의 실정은 다소 다르다. 공동체를 빌미로 한 기관의 선전화와 도구화로써 기능할뿐더러, '장소'의 중요성을 언급하지만 결국에는 미술관으로 회귀하는 미술의 부르주아성, 특정되거나 지정된 장소와 공동체가 단지 미술가의 작업재료로 대상화되는 공동체의 소재화가 드물지 않다. 더구나 의미 있는 장소에서의 작업이 유명해져 결과적으론 미술의 자본화를 개입시키고 거주민의 거주공간과 삶을 황폐화시키는 부작용도 크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장소특정적미술'은 무엇인가. 실제 사람이 참여하거나 협업 혹은 관계맺음이 제한적이지 않은 미술, 미술가와 미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이슈들과 사람을 연계하는 미술, 공간과 장소에 실존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유관하게 행위 되는 미술 등이다. 만약 미술이 그 장소에 거주해온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주체인 '사람'을 담아내는 데 있어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그 주체가 비호응적인 상황이라면 우리에게 미술은 무엇인지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미술이 당장 먹고 살아가는데 급급한 우리에게 빵을 주거나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거푸집이 되고, 그 관계 속에서 인간가치의 회복과 소통의 매개로 작동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무시할 것도 아니다.

2018-03-18 11:36:15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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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박수근미술상

한국 현대미술 100년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서민화가, 질곡의 시대를 힘겹게 걷던 이들을 품에 안았던 작가, 어려운 창작 환경에 굴하지 않은 채 삶과 예술의 긴밀함을 회화로 승화시킨 예술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화가. 박수근을 따라다니는 여러 수식어들은 '국민화가'라는 오늘날의 칭송을 어색하지 않도록 한다. 이중섭, 김환기와 더불어 한국미술 3대 거목이라는 후대의 평가는 그의 존재감을 더욱 눈부시게 만든다. 그의 그런 예술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강원도 양구군은 지난 2016년 '박수근미술상'을 제정했다. 양구에서 태어나 성장해 그곳 양지바른 곳에 묻힌 박수근 화백의 독자적인 양식과 삶의 리얼리티를 잇는 동시대작가를 지원하고자 만들어진 상(賞)이다. 제1회 수상자는 전남 보성 출신인 황재형 작가였다. 그는 노동으로 실현된 인간화와 삶의 진실을 향한 인간애 물씬한 작품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직접 광부로써 일하는 등, 실제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형성은 진득한 인간의 이야기를 비롯해 시대가 변해도 민중의 본질, 땀의 무게는 변하지 않음을 읽게 한다. 2017년 제2회 수상자는 김진열 작가에게 돌아갔다. 김작가는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일관되게 자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기법 아래 구현해왔다. 그는 궁핍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상과 수백 년의 풍상을 겪어내며 자존하는 나무 등의 이미지를 통해 매혹적이면서도 뜨거운 생명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올해 박수근미술상을 수상한 작가는 이재삼이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과 자연을 독창적인 관점아래 감동적으로 조형화한 박수근처럼 이재삼 작가 역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양식을 구축해 온 작가로 꼽힌다. 화가 박수근 관련 이론 전문가인 박수근미술관 엄선미 관장은 "그가 주로 그린 자연은 일상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킬 뿐만 아니라, 목탄의 투박함과 정겨움이 엉긴 검은 세계는 외적인 사실주의를 넘어 형용할 수 없는 깊이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사물의 근원인 물과 바람, 달과 이슬, 빛과 기온이 교차하는 그림, 우리네 현실계를 짚고 넘는 상징적인 세계로써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재삼 작가는 목탄을 재료로 일상의 자연을 깊고 깊은 검은 공간 속 거친 듯 시적으로 담아 왔다. 소나무와 대나무, 옥수수 밭과 매화, 그리고 폭포의 정경들은 언뜻 가시적인 것이 전부인 듯싶지만, 그 내부엔 음습하나 한 없이 침잠하는 존재들, 역사와 문명의 동력이 되어준 자연환경, 오로지 그림 하나로 이겨내려 한 삶의 투쟁이 은은한 달빛처럼 배어 있다. 박수근미술상은 여타 미술상과 결이 다르다. 정체성이 명료하다. 보은과 공로, 상 자체가 하나의 기획인 상이라기 보단 박수근이라는 인간과 부합해야 하고 그가 지닌 문화예술적 맥락에서의 가치와 의미에 근접해야 한다. 박수근미술상을 제정하며 한 위대한 작가의 역사를 집중 조명해온 전창범 양구군수는 "불굴의 의지로 현실과 맞서면서 그림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은 예술가, 자연과 동질한 정서를 내재한 사람들 간 호흡 속에서 작가가 직접 체득한 그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며 "황재형이 그랬고 김진열이 그랬으며 이재삼이 그렇다"고 말했다.

2018-03-04 11:09:25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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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차라리 오지마라

전시기획자들이 감동받는 경우는 작품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보는 관람객을 만날 때이다. 그렇기에 얼마 전 깜깜한 공간에서 1시간도 넘는 영상작품을 네댓 번이나 시청하던 일부 관람객의 모습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반면 채 30분도 안 되어 10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모두 봤다며 출구로 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거나 '안 봐도 다 아는' 부류일 것이다. 작품해석에 있어 나와 다른 내공을 지닌 것이니 섭섭할 것도 없다. 다만 동시대 미술의 흐름과 경향을 파악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예술현장의 목소리를 적극 정책에 반영해야 함에도 그저 시끌벅적하게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정치인들을 만나는 건 노곤하다. 그 의미 없는 행차에 비례한 실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난 14일,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강원국제비엔날레'를 찾았다. 전시장을 방문한다는 정보는 당일 아침에서야 전달됐다. 이건 거의 통보였다. 미리 알려줬으면 어땠을까 싶었지만, 나랏일로 바쁜 사람이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필자는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일단 거주지에서 전시장이 위치한 강릉까진 멀어도 너무 멀었다. 또한, 그게 어디든 정치인들의 방문은 대체로 형식적이었다. 그 때문에 굳이 가깝지도 않은 길을 나서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부랴부랴 300㎞를 달려갔다. 장관이기 이전에 예술인이니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고, 젊은 시절 닳고 닳도록 읽은 '접시꽃 당신'으로 인한 '팬심'도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를 달리게 된 이유였다. 도종환 장관은 시리아 작가인 압둘라 알 오마리와 태백 출신인 고(故) 정연삼 작가, 장지아 작가 등 몇몇 작가의 작품에 시선을 두었다. 질문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 질문은 놀랍게도 "비엔날레 주제가 뭐죠?"였다. 비엔날레에서 주제란 행사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이고, 전시의 성격을 묶는 핵심 키워드이다. 그런데 그는 3층 전시장을 모두 돌아볼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이는 마치 시낭송회에서 시를 읊고 있는 시인이 누구인지, 어떤 시를 썼는지 깜깜한 채 듣고 있는 것과 같다. 장관은 결례한 것이 맞다. 장관이 들릴 행사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보좌관들은 직무유기에 가깝다. 다른 이들도 아닌, 동계올림픽을 대표하는 문화예술행사에 문화예술 관련 주무 부처 관계자들로 왔기에 그렇다. 난 그때야 왜 장관의 입이 유독 무거운지 알아차렸다. 물론 약간의 대화도 있었다. 하지만 총감독 앉혀 놓고 약 30분 동안 '그들끼리' 나눈 얘기라곤 산불뿐이었다. 내용만 보면 문체부 관계자들은 비엔날레가 아니라 산림청이나 소방청을 방문했어야 했다. 필자는 누구보다 깊게 예술을 이해해야 할 직업인으로 정치인을 꼽는다. 늘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법률·정책·방침 등이 현실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태도는 오히려 일반인보다 못하다. 영상작품 하나 끝까지 보지 않을뿐더러, 작가들과의 만남조차 마련하지 않는다. 의례적으로 왔다가 서둘러 자리를 뜬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정치인은 가급적 전시장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심도 없는데 왜 세금 들여 전시장을 찾나. 맞이하는 이들도 힘들다. VIP 의전이라는 전근대적 악습을 되풀이하는 것도, 국민의 공복을 국민이 모셔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죄다 마음에 안 든다. 홍경한(미술평론가·강원국제비엔날레 예술총감독)

2018-02-18 10:39:24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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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한국 문화예술행정의 수준

문화예술을 경제적인 잣대와 행정편의로만 접근하는 사례는 국내에 드물지 않다. 때론 자의적으로, 혹은 시민들이 조금만 불평불만을 늘어놓아도 철거해버리는 행정 관계자들의 예도 흔하다. 지난 2007년 작가 이반 씨는 통일부 의뢰로 도라산역 통일문화광장에 만해 한용운의 생명사상 등을 담은 14점의 벽화를 설치했다. 하지만 정부는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역의 분위기와 맞지 않다'며 해당 벽화를 일방적으로 철거 및 소각해버렸다. 작가는 거세게 반발해 소송에 나섰다. 그리고 2015년 8월 대법원은 "원작자 동의 없는 예술작품 폐기는 위법"이라며 "국가가 이씨에게 1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2013년 3월 세계적인 건축가로 꼽히는 리카르도 레고레타(멕시코, 작고)가 남긴 마지막 건축물인 제주도 '더 갤러리 카사 델 아구아(더 갤러리)'가 모 기업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멕시코 정부와 건축학계는 물론 시민들까지 나서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아시아 유일의 작품이라며 철거를 만류했지만 불법건축물, 해안 조망 등의 이유를 내세운 행정과 기업의 방침을 꺾을 순 없었다. 결국 '더 갤러리'는 무너졌다. 그 자리엔 호텔이 세워졌다. 이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을 철거한 기업과 제주도는 끊임없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구 제주대학 본관 건물을 철거(1995년) 한 경력(?)을 갖고 있던 제주도는 문화예술에 대한 시각이 안일하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무지한 행정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최근에도 벌어졌다. 지난해 12월, 부산 해운대구는 해운대 해수욕장에 2010년 설치된 데니스 오펜하임(미국, 작고)의 유작 '꽃의 내부'를 유족도 모르게 철거 및 폐기해 커다란 논란을 낳았다. 작품을 관리해온 해운대구청 관광시설관리사업소 측은 부식과 민원 제기를 폐기의 이유로 들었다. 바닷가에 있다 보니 훼손 정도가 심했던 데다가 대중성이 낮다는 일부 주민들의 요구가 작품을 내다 버린 배경이었던 것이다. 허나 해운대구청의 처사는 반문화적이자 공공미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야만적 행정의 한 사례다. 본래 있던 장소에서 이동하는 것도 작가나 유족의 의견을 거쳐야 하는데, 심지어 저작권자와도 상의 없이 분해해버린 것은 작품을 가로등이나 환기구마냥 단순한 시설물 정도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냈을 뿐이다. 민원을 철거의 이유로 삼았지만 이 또한 납득하긴 어렵다. 공공미술 작품은 공공의 재산이고, 주인은 시민 모두이다. 따라서 정 철거해야 했다면 그에 합당한 공공의 의견을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해운대구청은 그런 절차 없이 일부 민원의 말만 수용해 세계적인 작가의 유작을 부숴버렸다. 1970년대 뮌스터 시(市)는 시민들이 조지 리키와 헨리 무어의 작품에 반감을 갖자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문화계 관계자들까지 적극 나서 예술작품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담론으로까지 이끌었다. 오늘날 국제적인 문화예술행사로 거듭난 '뮌스터조각프로젝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뮌스터의 예는 우리에게 너무 먼 얘기다. 한국 문화행정가들의 예술에 대한 인식과 수준이란 유치찬란한 지역 토산품을 상징하는 조형물 앞에서 지들끼리 모여 희희낙락하는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부해도 미술감상이나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교육받은 적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2018-01-21 14:49:03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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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혈세 낭비 황당 조형물

'공공미술'은 건축물을 빛내는 보조수단이 아니다. 단순히 미적 상품으로만 기능하는 '장식'이나 홍보물은 더더욱 아니다. 공공미술은 삶의 장소에 흡수되어 대중과 상호작용하는 미적 촉매이며, 공공의 실제적 참여 아래 생산 가능한 공론의 창구다. 이것이 동시대 공공미술의 정의이고 나아갈 방향이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공공미술'에 대한 개념은 '환경조형물' 수준을 넘지 못한다. 환경조형물이 공공미술이고 공공미술이 곧 환경조형물이다. 건물 앞에 멍청하게 서 있는 조각이나 벽화 따위의 조형예술품을 생각하면 된다. 환경조형물의 세계는 코미디다. 건축주는 조형물에 대한 이해와 참여 동기가 부족한데 법은 세우라고 강요하고, 강요된 조형물시장은 저예산 고품질을 내세운 '브로커'들의 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건축주의 부당한 리베이트와 심의 담합이라는 각종 비리를 포함해 제작비용이 설치비용보다 낮은 시각공해물이 양산되는 것도 결국은 시대흐름에 맞지 않는 법 때문이다. 조형성과 내용을 보면 황당함 그 자체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만들었을까 싶은 조형물들이 넘쳐난다. 획기적인 아이디어인 냥 기안을 올렸을 사람이나 그게 좋다고 허락한 채 예산까지 집행한 사람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 이상 어떻게 더 요염할 수 있을까 싶은 증평인삼 조형물이나, 엄청나게 큰 '대게'를 들고 있는 남자를 묘사한 영덕 대게 조각, 군위군 대추모양의 화장실 조형물 등이 그렇다. 그래도 이들은 1천억 원을 들여 부산판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겠다는 부산광역시나 이벤트에 불과했던 역사를 되도 않을 정체성으로 둔갑시킨 소양강 '마릴린 먼로' 조각(강원도 인제), 엽기적인 신체절단물에 가까운 싸이 '말 춤' 조각(서울시 강남구) 보다는 낫다. 대게 조각은 너무 거룩한 나머지 어이없는 웃음을 주고, 인적 없는 공원에 19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설치했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대추탑과 대추화장실조형물은 무모한 발상과 측은한 결과에 왠지 모를 숙연함부터 앞서기 때문이다. 최근 선보인 인천공항 조형물도 비판에서 피해갈 수 없다. 제2터미널 진입로에 세워진 이 20억 원짜리 황금조형물은 지난 2016년 발표된 인천국제공항 신청사 공공조형물 당선작으로, 가방을 매고 끄는 남녀가 마주치듯 걷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문제는 덩치만 클 뿐 특별할 것 없는 시각에다 깊이 없는 작품성, 주변공간과 조화롭지 못한 황금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유명 작가인 자비에 베이앙의 스타일과도 겹친다는 것 역시 지적의 대상이다. 특히 문화적 지평으로서의 공공미술로는 한계가 있어 최종 심사 당시 심사위원 다수가 설치에 이의를 제기했음에도 그대로 진행되었다는 점은 논란의 불씨로 남아있다. 조형물이 공공미술로써 역할하려면 익명의 대중이 어떠한 문제와 사안에 대해 직접 말하는 주체여야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과 쟁점이 교차하는 사회적 소통의 매제가 되어야 한다. 미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사회적 담론의 기제로 기능해야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줄곧 공공미술로 편입되어 온 한국의 '환경조형물'에는 실제 사람이 없는 대신 대상화된 타자와 시각적 지배문화만 존재한다. 공동체에 의견을 묻고 협업해야 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한 비전'을 제시해야 하지만 문화적 권위에 기댄 폭력성만 부유한다. 그런데 그처럼 폭력적인 작품이 전국에 1만 5천개나 있다. 황당한 조형물만큼 황당한 현실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2018-01-07 11:39:20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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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생존의 값

술 한 잔 마시지 못하는데다가 온전히 작품 이야기에만 몰입할 수 없는 '뒤풀이'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부담되는 시간이다. 하지만 세상사 내 뜻대로만 되지 않듯 가끔은 그 부담스러움을 이겨내야 할 때도 있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마침 저녁 먹을 시간도 된데다 부득불 같이 가자는 지인의 청도 있고 해서 어찌어찌 하다 보니 주요 미술행사 뒤풀이에 참석하게 됐다. 덕분에 전시만 보고 귀가해 모처럼 발 뻗고 자려던 본래 계획은 어그러졌다. 뭔 밥집이 그리 멀고도 먼지, 유독 걷기 싫어하는 두 다리를 애써 위로하며 지인의 뒤꽁무니를 한참이나 좇아 찾아간 식당은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분위기가 남다른 것이 분명 자주 가던 'OO천국'이나 'OO나라'와는 격이 달랐다. 안내한 공간에 들어서니 이미 기업 경영주를 비롯해 미술계에서 나름 내로라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미술에 대한 가치관과 구조를 바라보는 시각이 워낙 달라 깊이 있는 대화까진 나눠본 적 없지만 좁디좁은 미술판이기에 평소 안면은 트고 지내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데면데면한 공기가 썩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밥만 먹고 가자는 생각에 인내하며 서둘러 식사가 나오기를 고대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차려졌다. 때깔도 좋은 것이 가짓수까지 많아 임금님 진지상이 이럴까 싶을 만큼 잘 꾸려진 밥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 싶어 살짝 엿본 가격도 매우 비쌌다. 이제 숟가락을 들고 입에 넣기만 하면 되는 상황. 헌데 문득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바로 작가들은 생계를 고민하는 현실에서 정작 본인들이 제외된 채 이처럼 잘 먹고 사는 현실이 과연 옳은가라는 자문이었다. 왜냐하면 참석자 대부분이 작가들의 작품을 매개로 살아가는 이들이었던 탓이다. 더구나 불과 한 시간 전만해도 당장 그림 한 점을 팔지 못해 민생고를 염려하던 작가들을 만났고, 다 잘 될 것이라고 위로했다. 그런데 몇 십분도 지나지 않아 식사 한 끼에 어지간한 봉급쟁이는 엄두도 못 낼 가격대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양심상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지불할 밥값은 작가들 '생존의 값'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환경과 교차되던 화려한 식사도 신경 쓰였지만 같은 자리에 있던 미술인들의 럭셔리 코스프레 자체도 못마땅했다. 비록 일부에 해당되는 사례겠으나 가난하기로 따지자면 예술 장르 중 1-2위를 다투는 미술계 종사자들이 마치 매일 수라상이라도 받는 듯한 모양새는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고, 설사 이것이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라면 구조자체가 정상이라 할 수 없었다. 특히 미술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재벌가 관계자들이 소싯적 백일장 타령을 하며 아는 척하는 것도 모자라, 그 되도 않을 얘기에 박수쳐주는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불쌍한 자세도 자리에 머물지 못하도록 했다. 그 눈꼴신 장면을 보지 않으려면 밥이고 뭐고 서둘러 일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결국 못 참고 식당에서 나왔다. 며칠 뒤 혹자에게 이 얘기를 전했을 때 그는 현실을 부정한 자격지심이거나 열등감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 자격지심일 수 있다. 내가 이해하는 현실과 그가 말하는 현실 간 격차가 존재함도 알고,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곧 사람대접의 기준임을 모르지도 않는다. 열등감이라 해도 할 말 없다. 허나 그게 뭐든 체질상 안 되는 건 그냥 안 되는 거다.

2017-12-10 13:24:54 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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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관심 절실한 미술매개자

매해 주요 언론이나 전문지 또는 협회·기관에선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으로 신진 미술평론가를 공모, 선정한다. 하지만 선정된 평론가가 동일계에 온전히 안착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름만 그럴싸하게 '미술평론가'이지, 실제론 많은 이들이 언제 등단했는지도 모를 만큼 기억 속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말며, 상의 후광은 그리 길지 않다. 일례로 몇 해 전 모 협회에서 미술평론상을 수상한 한 젊은 평론가는 현재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대체로 평론은 미술전문지들이나 언론매체, 전시기관들과 미술단체의 청탁·기획에 의존하는데, 그는 그 어느 곳에도 접근하기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어가던 평론저널과 몇몇 학술지에서의 활동 역시 민생고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능력이나 역량을 가늠할 기회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고, 빈곤한 삶을 잇는 건 기획자들도 마찬가지다. 과거 필자가 잡지 편집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한 큐레이터는 지면을 통해 "큐레이터는 대부분이 고학력자이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보다 못한 월급을 받으면서 누구보다 많은 시간 업무에 매달려야 한다."며 "미술생태계에서 대부분 '을'의 역할을 하는 계약직 회사원"이라고 토로했다. 우리나라에는 자칭 타칭 수백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을 새긴 명함을 들고 다니지만 생존에 대한 고민 없이 오로지 평론만 하는 평론가는 숫자와 무관하다. 기획자들의 형편도 매한가지다. 무대는 빈약하고 딱히 비중 있는 위상도 주어지지 않기 일쑤다. 실제로 한국에선 꽤 많은 기획자가 배출되고 있으나 그 인력과 지성이 효율적으로 활용되는 창구는 협소하다. 직업으로써 신분을 유지하기란 무척 어려울 뿐더러, 어찌어찌 지원금을 받아 전시를 꾸린들 생활의 고통을 극복하긴 요원하다. 아니, 제 돈까지 넣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데에는 전문성 부재가 일차적 원인이다. 자신만의 시각이 희미한 기획과 글을 양산하거나 동시대미술의 흐름과 경향을 읽지 못하는 것이 한 예다. 이중 평론의 경우 사고의 확대와 새로운 층위의 담론형성이 불가능한 함량 미달의 글을 뽑아 등단시키는 시스템도 문제로 지적된다. 공모라고 해봤자 대부분 지원자는 손가락에 꼽아 애초 변별력이 낮다. 그러나 재능 있는 인재를 육성하지 못하는 구조야말로 그들의 좌초를 가속화시키는 가장 큰 배경이다. 수준 있는 논제와 전시를 발표해온 평론가와 기획자들이 아예 없진 않음을 고려한다면 그들이 적절한 의제설정자로 위치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데 현실은 엇박자를 그린다는 것이다. 미술계에선 작가 못지않게 열악한 연구 환경 및 노동에 대한 대가가 얇은 미술매개자들에 대한 보호 장치가 필요함을 내외적으로 꾸준히 요구해 왔다. 이에 인천아트플랫폼이나 금천예술공장 등, 일부 지자체 산하 기관은 이론과 기획자들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문광부는 '국제문화교류 전문인력 양성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예술 전문기획자를 해외에 파견하는 프로그램도 구동 중이다. 하지만 아직까진 담론생산자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불충분하다. 글을 쓰거나 전시기획으로 먹고 산다는 건 여전히 아득하다. 예술창작의 사회적·문화적 가치증대와 선순환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미술매개자들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들의 관심 또한 보다 깊어져야 한다.

2017-11-26 11:19:59 김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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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어느 화랑주인의 행보

미술계는 작가들이 있기에 구동된다. 현실적인 측면도 그렇다. 그들이 작품을 만들거나 전시를 하게 되면 화방은 물론, 액자집, 도록제작업체, 운송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 수입을 얻는다. 큐레이터, 평론가 등도 작가들이 존재하기에 민생고를 해결할 수 있고 직업의 의미와 역할도 강조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선 미술관 및 화랑, 창작공간들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직업이 교차하는 장(場)이지만 그들에게도 작가들의 비중은 매우 크다. 창작자들이 생산하는 작품 없이는 좋은 콘텐츠도, 전시도, 공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들은 창작활동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살린다. 그러나 정작 작가들은 늘 생존의 고비를 넘나든다. 주는 만큼 받는 구조가 아닌 탓이다. 물론 교류의 결이 반드시 흑백으로 구분되진 않는데다 각자의 기여도가 다르지만, 시쳇말로 작가들 때문에 먹고 살면서도 그들에게 환원해야 한다는 인식이 희박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그 많은 화랑 가운데 소위 메이저라 불리는 화랑들 또한 작가들에 대한 인심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다. 매해 수십 내지는 수백억 원의 매출을 올리면서도 그들을 위한 지원은 그리 가시적이지 않은 탓이다. 이런 현실에서 몇 해 전 문을 연 '서울예술재단'의 행보는 눈에 띈다. 40여 년 동안 '표갤러리'를 운영해온 표미선 대표는 작가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고 창작 의욕을 고취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 끝에 지난 2015년 신문로에 '서울예술재단'을 설립했다. 2009년부터 6년간 한국화랑협회장을 지내며 직접 보고 느낀 열악한 미술환경을 개선하고 미술향유 인구 확산을 위해 사재 10억 원을 출연해 만든 비영리법인이다. 이제 3년의 역사에 불과함에도 서울예술재단은 작가와 콜렉터, 비평가, 기획자 간 상호교류를 도모하는 플랫폼으로서의 구색을 빠르게 갖춰가고 있다. 누구나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도록 재단을 사랑방처럼 꾸몄고, 후원자들과 미술계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마주하게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이 중 신진작가 및 기획자들을 대상으로 한 '포트폴리오박람회'와 '전시기획자박람회'는 호응도가 높은 핵심 프로그램이다. 전문가 리뷰와 심사를 곁들인 '포트폴리오박람회'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갖춘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 당시부터 시행해온 인재육성 프로그램이다. 올해 초 시작된 '전시기획자박람회'는 취약한 환경에 놓인 매개자 발굴을 위해 마련한 무대다. 이 두 행사는 창작비와 전시를 동시에 지원해 '기회'가 부족한 젊은 작가들과 기획자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허나 표미선 대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최근 평론가와 중견작가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또 다시 모색하고 있다. 비평집 발간과 중견작가 컬렉션이 그 예다. 혹자는 서울예술재단을 놓고 화랑 특유의 상술이 '재단'이라는 그럴싸한 옷을 입은 게 아니냐는 오해를 한다. 돈 많은 이가 벌이는 여가(餘暇) 쯤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없진 않다. 하지만 화랑업을 그만두었을 때 일생을 함께한 미술계에 무엇을 어떻게 환원할 수 있을까에 관한 표 대표의 고민은 진중하다. 그 진중함이 침실전문 유통회사인 '이브자리'를 비롯한 지인들의 도움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배경이다. 표 대표의 행보는 적어도 대가 없는 부의 이전에나 골몰하는 모습들과는 색깔이 다르다. 그리고 이 다른 색깔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할 이유다. 관심을 가져야 서울예술재단과 같은 '이로운' 공간들도 늘어난다.

2017-11-12 14:27:55 이범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