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철의 쉬운 경제] 의리와 배신 사이에서
세간의 화제가 된 유명인사가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듯이 "그 세계에는 의리가 없다"고 실토하였다. 아마도,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의리'처럼 줄기차게 유행한 헛소리도 없을게다. 물정모르는 동네 조무래기들도 툭하면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자"며 패싸움을 벌렸다. 심술궂은 대가리는 미운 놈을 까닭 없이 '의리 없는 놈'으로 찍어 바보로 만들어 고개를 못 들게 하였다. 목청껏 의리를 외칠수록 나중까지 '의리'를 지키는 경우는 드물다. 옳고 그름 이전에 그저 '편 가르기'에 몰두하는 오염된 세상에서 행실과 달리 입으로만 의리를 외치기 때문 아닐까? 오래전에 유난히 의리를 강조하는 자가 주변에 있었다. 나는 '주먹도 아닌데 그 자는 부동자세로 "이 다음 형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주변에 측백나무를 심겠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맹서했다. 죽은 후에도 변치 않고 모시겠다며 내 속에 숨겨진 허영심을 자극한 셈이다. 의가 직언을 하여 옳은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라면, 맹목적 충성은 아첨과 다름없어 듣는 이의 판단을 그르친다. 백범은 마음이 올곧지 못해 왔다 갔다 하는 무항배(無恒輩)들은 가치의 기준과 행실이 그때그때 다르다고 했다. 이역 땅에서 독립운동가가 되었다가 금방 밀정으로 변하여 종잡을 수 없는 무리라는 이야기다. 일본에서 의리(ぎり,기리)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의 도리가 아닌, 계약이나 법률 같은 겉으로의 의무를 뜻한다. 베네딕트(R. Benedict)는 일본사회의 의식구조를 분석한 '국화와 칼'에서 그들은 의형, 의부, 의모에 대한 (마음에 없는)의무를 소홀히 하다가 "기리 없는 자"가 됨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기리를 너무 강조하다가는 이중인격을 조장할 수 있다는 뜻이렷다. 의리라는 말은 조선후기까지 별로 쓰이지 않다가 식민지시대에 야쿠자 문화가 퍼지면서 본래의 의(義)와는 본질이 다르게 대유행하게 되었다. 기리가 패거리의리가 되어 끄나풀들이 '가짜형님'앞에서 소리 높여 의리를 외쳤다. 그들 대부분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속담을 실천해 보인다. 맹자는 사단칠정(四端七情) 중에서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잘못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의의 실마리라고 하였다(羞惡之心 義之端也, 公孫丑 장구상6). 올바르지 않음을 거부하는 마음이 쌓여 덕(德)이 형성된다. 정조임금은 의가 바로 선 뒤에야 통치의 도가 행해지는 법이라며 "조정 벼슬아치들에게 한결같은 뜻이 없다"며 개탄했다. 욕심만 가득하여 지켜야 할 도리는 지키지 않고 입으로만 인의예지를 뇌까리니 의가 바로 서지 못하여 나라의 기반이 흔들렸다는 지적이다. 진리도 변한다고 하지만 진실은 하나임을 생각할 때, 의는 변하지 않는 진실을 지키려는 인간의 도리라 할 수 있다. 의는 사람이 가야할 올바른 도리와 진실이라면, 그들만의 세계에서 사용되는 패거리의리는 세력판도와 먹잇감에 따라 그때그때 구겨지고 찢어지는 거래관계다. 하수인들이 맹목적 추종을 요구받는 동시에 반대급부로 신변을 보호받는 가짜의리와 의(義)는 처음부터 다르다. 의가 없는 세상에서는 그저 강자에게 빌붙어 부화뇌동하려는 인사들이 준동하기 마련이다. 진실을 말하고 비리를 지적하는 사람을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 찍으려든다. 그런 관계가 형성되면서 허위가 진실을 구축하는 위선사회가 되어 갖가지 사회악이 번지기 마련이다. 진정한 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의리와 비리를 혼동하다가는 배신이 넘치는 세상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의의 바탕은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