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5>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1957년)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5>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1957년) 이탈리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1923~1985년)의 '나무 위의 남작'(1957년)은 '반쪼가리 자작'(1952년), '존재하지 않는 기사'(1959년)와 함께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을 구성한다. 환상과 알레고리를 특징으로 한 칼비노의 3부작은 '현대인들의 족보'로 일컬어진다. '나무 위의 남작'은 18세기를 배경으로 하며, 루소, 디드로, 나폴레옹 등 역사의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나무 위의 남작'이 역사소설은 아니다. 역사의 유명 실존 인물과 나무 위에서 살아가는 남작이란 기이한 가상의 인물이, 실제 사건과 소설 속 사건을 가로세로로 직조하며 전혀 새로운 의미의 텍스트를 만들어간다. ◆나무 위에서 살며 땅을 사랑하다 작가 칼비노는 1923년 쿠바에서 태어났고 조국인 이탈리아에 돌아와서는 토리노 대학에서 농학을 공부했다.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했다. 아버지가 농학자, 어머니가 식물학자이니까 '나무 위의 남작'은 말하자면 소설로 계승한 가업인 셈이다. '나무 위의 남작'의 주인공은 코지모 디 론도 남작이다. 남작은 귀족 작위에서 가장 낮은 작위에 해당한다. 예컨대 공작이 아니라 남작이라는 설정은 코지모 디 론도를 경계인으로서 더 예민하게 변화를 지각하는 인물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봉건성을 대표하는 지배계급의 첨예한 상징으로 남작을 택했다. 시대 배경은 계몽주의에서 혁명을 거쳐 왕정복고의 시기까지를 포괄한다. 187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있었고, 1804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1815년 나폴레옹의 워털루전투 패배와 왕정복고라는 서양사의 중요한 현장이 소설의 무대이다. 유럽에서 1815년은 혁명의 시대에 이은 반동 시대의 시점이다. 1815년 체제를 메테르니히 체제라고 한다. 소설에서 코지모 디 론도 남작이 나무 위에 올라가 나무 위의 삶을 시작한 게 1767년 6월 15일이다. 따라서 1815년 무렵에 남작의 나이가 60살이 된다. 노년에 돌입하는 시기를 메테르니히 체제가 등장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일단락되는 시점에 맞춰 놓았다. 대략 5년 정도 더 지나서 남작은 죽는다. 봉건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서양사의 격변기를 산 남작의 성향은 복합적이다. 공화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는가 하면 때로 보나파르트주의자 같다. 나폴레옹을 추종하고 옹호하고 찬미한다. 또한 남작에게는, 우리에게 별로 익숙지 않은 프리메이슨 성향이 목격된다. 종교성이 강한 비밀스러운 느낌의 조직인 프리메이슨은 기독교, 계몽주의, 자유주의 등의 키워드로 종합된다. 남작은 민중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전면적인 민중주의자는 아니다. 민중과 교감하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여전히 귀족 계급의 일원인 남작으로 산다. 남작은 나폴레옹과는 직접 만나고, 볼테르·루소와는 서신을 주고받는다. 볼테르에 우호적이어서 볼테르주의자로 불리기도 한다. 계몽주의자라는 뜻이다.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라는 남작의 언급은 계몽주의적인 합리성과 냉철함을 보여준다. "나무 위에서 살았고 땅을 사랑했으며 하늘로 올라갔노라"라는 남작의 묘비명이 작가가 이 책에서 하려는 말의 요약이다. 12살에 달팽이 때문에 남작이 나무 위로 올라감으로써 소설에서 이분법적 세계가 펼쳐진다. 선과 악이 대립하고 구시대와 신시대가 대립하고 계급과 계급이 맞장을 뜬 시대다. 이분법적 세계에서 남작은 '나무 위'로 거처를 옮겼지만 그러나 절대 은둔하지는 않았다. 돌기둥 위에서 평생을 산 고대의 기독교 성자처럼 세상과 유리되지 않았다. 남작은 세상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살았다. 단지 나무 위에서 살 뿐이다. 사실 알려진 은둔은 은둔이 아니다. 누군가 은둔했다면 사람들이 누군가의 은둔을 몰라야 한다. 신비주의 계열의 은둔자들은 은둔한 게 아니라 은둔한 표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식별된 모든 은둔은 정도 차이만 있을 뿐 현실 참여적이다. 나무 위의 남작이 은둔자라면 남작은 역설적으로 현실에 더 잘 참여하기 위한 더 좋은 방법으로 은둔을 선택했다고 해야 한다. 땅을 제대로 보고 싶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론이 나무 위로의 은둔이다. 소설은 얼핏 이분법적 세상을 그리지만, 남작을 통해 이분법적 세상을 통합하려고 노력한다. 통합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현실주의자이다. 소설의 말미에 남작의 사상은 포용으로 표현된다. 포용의 세계관을 가진 계몽주의 시대 현실주의자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그는 동시에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이상주의 인간형을 표상한다. 나무 위의 남작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이분법의 문법으로 작동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상주의를 통해 하나의 세상을, 남작을 추구한다. 이분법적 세계의 일원론적인 통합과 승화를 묘비명이 말한다. ◆소화불량의 오바이트 사랑 비올라는 남작의 첫사랑이자 평생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어긋나는 사랑이다. 두 사람이 근접한 성향의 인물로 보이긴 하지만 넘어설 수 없는 본원적 차이가 둘 사이에 있다. 낭만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비올라는 열정적이고 때로 자기 통제를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퇴폐적이면서 절제돼 있고, 위계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바로크적인 질서를 체화한 인물이다. 비올라의 성향이 낭만주의와 바로크를 결합한 것이라면, 남작에서는 고전주의와 계몽주의가 융합하여 나타난다. 두 사람이 사랑의 접점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남작에게 비올라는 저편에 있는 사람이다. 사실 문학에서 그리는 사랑은 대체로 저편의 사랑이다. 이편에서 소화되어 제대로 배변되는 사랑이 아니라 저편에서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하다가 토해내는 유형의 사랑이다. 막힌 것 같고 안 넘어가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코끼리를 삼낀 악어? 현대 소설에서는 트림을 하고 설사도 하는 다양한 유형의 '소화'의 사랑을 자유롭게 그려내는 편이지만, '나무 위의 남작'은 조금 더 고전주의적인 사랑을 그린다. 남작이 죽는 방법을 두고 작가의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확고한 종언이 나쁘지 않았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주인공이 죽는 방법도 괜찮았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는 폐지공이 책 대신 압착기에 압착되어 죽는다. 보후밀 식 승화가 '나무 위의 남작'에서는 열기구 타고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얼핏 보후밀 소설의 선택이 더 깊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건 너무 직접적인 승화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의식했을 작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까지만 그리고 실제로 죽는 모습을 생략한다. 상승의 죽음이 참신하진 않더라도 우아한 방식이었다. 사랑과 죽음이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라면 남작의 삶은 치열하게 현실과 부대낀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알제리, 모로코가 나오고, 왕위계승 전쟁, 절대 왕정, 예수회, 이슬람, 그리고 지중해의 해적까지 등장한다. 남작 형제들의 이상은 18세기 계몽주의에 닿아 있기에 "이상과 빛과 18세기의 희망은 모두 재가됐다"는 끝부분의 표현이 자연스럽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나는 이 19세기, 출발도 좋지 않았고 계속 나빠지기만 하는 이 세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말은 1957년 시점에서 당대에 하는 평가이기도 하였을 텐데, 지금 우리가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평가 같기도 하다. ◆1인칭 관찰자 시점, 우화와 환상 소설의 시점은 1인칭 관찰자 시점이고, 거의 완벽하게 이 시점이 유지된다. 객관성과 모호성을 동시에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니라 1인칭 관찰자가 기술하는 형식이기에 나름의 객관성을 실현하지만, 전지적 시점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모호성을 남긴다. '이렇게 전해진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등의 표현이 중의적으로 좀 재미있게 사용된다. 의미의 무게를 늘릴 수 있고, 강요하지 않는 서술이 가능해진다. 우화와 환상이 많이 나온다. 한데 이것이 리얼리즘에 입각한다. 나무를 세세하게 묘사하고, 나무 위에서 용변을 어떻게 해결하고 잠을 어떻게 자는지 등 구체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환상적이고 더 비현실적이 된다. 텍스트마다 다르겠지만 소설에서 비현실적 현실의 과감한 생략은 생생한 현실을 지목한다. 어느 소설에서든 질질 끌지 않고 확확 넘어가는, 즉 생략하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는 생략하지 않고 아예 환상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쓴다. 현실에서 명백하게 불가능한 것을 생략과 비약을 통해 다른 현실과 이어버리면 웜홀을 통해 다른 세계로 직행하듯 독자는 오히려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에 다른 문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인다. '나무 위의 남작'의 세계는 (소설 안의) 현실 세계다. 현실 세계에서 비현실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합리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을 많이 함으로써 독자가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을 환상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의도는 우화이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그리지 않고, 문 앞을 서성이다 문 너머로 슬그머니 사라지는 카프카와는 다르다. 그렇더라도 전언의 핵심은 아마 동일할 것이다. 작가가 소설에서 남긴 다음 문장처럼. "남을 배려하지 않는 세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며 세상 모든 것,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호의적이지 않은 세대의 출현으로 세상은 변해버렸다. 이제 나무 위로 당당히 걸을 수 있는 코지모 같은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