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8>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1956년)
고승은 왜 고양이를 베었고, 금각사는 어떻게 불타올랐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1925~70년)의 '금각사'는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50년대 중반에 나온 작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지만, 소위 말하는 팩션은 아니다. 흔히 이 책에 탐미주의 혹은 유미주의라는 단어를 결부하는데, 그러한 평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인간 본연의 불안을 유려한 언어로 그려낸 탐미주의 문학의 절정"이란 평에서 '인간 본연의 불안'에 동의하고 '유려한 언어'에도 동의하지만, 절정은 논외로 하고 탐미주의 문학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차라리 리얼리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양보해서 탐미주의와 리얼리즘의 종합 정도? ◆점령기 일본의 '가냘픈 로맨티시즘' 작가와 작가의 시대를 살펴보자. 먼저 미시마가 동성애적 성향에서 양성적인 성격의 남성성으로 넘어가며 조금 마초적으로 자기 몸을 개조하던 시기에 '금각사'를 썼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배경은 발표 연대에 조금 앞선 미국의 일본 점령시기이다. 일본의 공식적인 역사에 미군 점령기가 표기된다. 점령으로 인해 정체(政體) 자체가 외국군에 넘어간 상태로 공식적으로 기록되며 일본뿐 아니라 독일도 그렇다. 한국은 애매하게 미군정기라는 표현을 쓰는데, 점령군으로 진주한 외국군에 의한 군정과 박정희 군부 쿠데타에 의한 군정 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미군정기란 명명은 반영하지 못한다. 소설로 돌아가면, 작가의 개인적인 전환과 작가가 살아가는 일본 사회의 전환이 맞물려 있다. 두 전환이 배면에 깔려 있어서 사소설 경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없지 않았지만, '금각사'는 시대의 아픔을 매우 강하게 노정하기에 사회적 소설에 가깝다. 박경리가 일본 문화를 비판하며 사용한 "가냘픈 로맨티시즘"이란 것이 관점에 따라 '금각사'에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싶다. 만일 이 소설에서 얄팍한 로맨티시즘이란 것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아마 표층에 있을 것이다. 그 아래로 전환기의 패전국가 국민이 갖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존재의 위기, 절망이 강하게 우러나온다. 탐미주의나 유미주의가 되려면 작용원리상 사회성이 없어야 하고, 소설로는 어느 정도 사소설 영역에 머물러야 하는데, '금각사'는 사회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소설 '금각사'에는 접대부로 보이는 어느 여성이 절에 찾아온 장면이 중요하게 그려진다. 동행한 미군은 자신의 아이를 밴 그 일본인 접대부 여성의 배를 밟으라고 주인공 미조구치를 강제한다. 점령군에게 능욕당한 동족의 아이라는, 임신하지 말아야 할 태중 아이가 하나 등장하고, 능욕당한 여인은 그 아이를 낳으려고 하지만, 능욕한 미군은 그 아이를 낙태하기를 원하고, 미군의 겁박을 받은 미조구치가 여인에게 폭력을 행사해 배 속 아이를 낙태시키는 역할을 순순히 받아들여 수행한다. 실제로 아이는 낙태된다. 거기서 표출되는 주인공의 절대 무력감과 자기 학대, 그리고 그러한 일을 가능케 한 시대에 대한 통한은 한눈에 드러난다. 점령군의 아이를 낳으려다 저지당한 일본인 접대부의 처지는 더 헤아리기 힘들다. 미시마가 그려낸 당시 시대상이다. 이러한 불모성, 사산으로 상징되는 시대 막바지의 느낌은 미군의 아이를 밴 창녀라는 타자의 개입을 통한 현상으로 우러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주인공의 두 친구 쓰루카와와 가시와기의 두 개 시선으로 포착한 여염집 여성인 꽃꽂이 선생. 쓰루카와에게 이 여자는 저 멀리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지만 가시와기에게는 성적 방종의 천박한 화신으로 바뀌게 된다. 미조구치가 같은 인물을 두 가지 프리즘을 통해 인식하는 장면에 낙태가 또 등장한다. 정확히는 사산이다. 일본 군인 즉, 패전군인 남편의 아이를 사산한다. 두 사건을 비교해보면, 창녀를 임신시킨 건 미군이었고, 꽃꽂이 선생을 임신케 한 정자 제공자는 일본군이자 법률상 배우자였다. 일본군 남편의 아이를 잉태한 단아한 일본 여성은 창녀와 당연히 대조된다. 창녀가 아닌 여성이 일본인의 아이를 잉태하지만 그 아이를 사산하고, 그 일본 여성은 결국 창녀와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창녀였던 일본 여성은 미군 점령군의 아이를 배었다가 또 다른 일본인의 방조 하에 사산이 아니라 강제로 낙태를 당한다. 이 풍경에는 일본군과 미군, 그리고 사산과 낙태라는 대구가 놓인다. 기본적으로 시대의 비극이 있고, 주인공이 모색하는 인생의 침로와 가치에 관한 갈등이 쭉 이어진다. 여성과 미(美)가 중요한 흐름이며 둘이 중첩되기도 한다. 미가 그나마 조금 긍정적이라고 한다면, 여성은 혐오적인 특성을 대변한다. ◆여성혐오와 시대의 아픔 여성 혐오적인 시각은 어머니에 대한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여성성이 대체로 창녀와 연관된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지켜내지 못한 남성들이 그려진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오쟁이 진 남성으로, 좁은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아내의 불륜을 감내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식이 못 보게 하는 정도밖에 없다. 그나마 아버지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느낌이 있다. 가부장제에서 자신 테두리의 여성을 지키지 못한 남성이 느끼는 사적인 무력감과 패전국 국민이 느끼는 공적인 열패감이 겹쳐진다. 소설에 나오는 여성은 거의 다 창녀의 유형으로 환원된다. 미조구치의 성적 체험 또한 궤를 같이한다. 창녀가 아닌 여자와는 모두 실패하고 창녀하고만 성적 관계를 맺는다. 꽃꽂이 선생과 함께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이 우이코이다. 말하자면 사쿠라 꽃 같은 느낌의 여성인 우이코는 사랑한 남자를 배신하고, 배신하며 같이 죽는다. 배신인지 결과적인 동반 자살인지 모호하지만, 아마 두 가지가 섞여 있을 것이다. 여기서 창녀가 아니면서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은 우이코다. 다만 주체로 선택한 건 죽음이었다. 사회적인 배경이 깔린 가운데 주인공이 삶의 행로를 찾는 과정에서는 쓰루카와와 가시와기가 각각 양과 음을 상징한다. 쓰루카와에서는 동성애 느낌이 있고, 가시와기는 이성애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아름다움과 빛의 영역에 속한 쓰루카와가 자살함으로써 우이코와 비슷한 결말을 맞도록 한 데서 미시마에서 유미(唯美)보다는 비관을 읽게 된다. ◆고양이의 목숨을 끊다 소설의 배경이 절이다 보니 공안이 등장한다. 개인적인 영역에서 소설에 중요하게 등장시킨 오브제는 여성이고, 패전국가와 민족적 비애라는 거대담론은 금각사 및 공안과 연결된다. 선종의 '임제록'에 나오는 살불살조(殺佛殺祖)와 공안집 '무문관(無門關)'의 남천참묘(南泉斬猫)가 인용된다. 살불살조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으로, 조사는 스님 중에 큰 스님, 한 종파의 비조가 된 사람을 일컫는다. 얼핏 죽인다는 데서 살불살조와 동일한 남천참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당대의 선승 남천보원(南泉普願)은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수행승들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고 있으므로 그 고양이를 잡아들고 말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아무 말이 없자 남천은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그날 밤 제자 조주(趙州)가 외출에서 돌아왔다. 남천이 낮의 일을 조주에게 말하자 조주는 바로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천은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소설에서 살불살조와 남전참묘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는 모티브다. 고양이가 금각사와 연결되고, 고양이를 죽이는 게 금각사에 불 지르는 것과 연결되는 식으로, 남천참묘 공안에는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 고양이를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제자가 머리에 신발을 이고 나가는 모습을 소설 마지막에 주인공이 살아야겠다고 하는 부분(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는데 실화의 결말과는 다르다)과 연결 지을 수는 없을까. 이 공안은 소설 전체를 끌고 가는 중요한 모티브다. 전후 시대를 배경으로 여성이 오브제처럼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공안이 던져지면서,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곤경의 탐색이 계속 뒤섞이며 병행한다. 주인공이 말 더듬이인 것은 개인의 삶을 사회와 거리를 두어 포괄적으로 성찰하는 장치로 설정됐다. 1인칭 시점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1인칭을 통해서 모종의 성장소설의 기능을 담당하고 존재론적인 탐구를 보여주면서, 황폐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1인칭으로 의미를 탐색하는 사람이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지를 그렸다. 일본 극우 인사인 미시마에 가진 편견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건, 어느 시대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시대의 황폐함과 개인의 절망 간의 교차로에서 의미를 발굴하는 모습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당시 시대 상황을 예민한 개인을 통해 보여주면서, 탈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탈출구를 찾는, 특정한 시대 속 예민한 개인의 사회적 실존과 개인적 실존을 모색한 리얼리즘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이 소설이 "살아야지"로 끝난 것에서 겉보기와 달리 희망의 끈을 아주 놓지는 않은 듯하다. /글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