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전철 밟나, "바꿔야 산다"
"한국은 느리게 가는 자전거입니다. 그만큼 균형잡기가 힘들죠. 저성장 기조에서 한국의 성장 및 수익창출 모델의 취약함이 그대로 노출된 상태입니다."(최원식 맥킨지 서울사무소 대표)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는 2013년 '2차 한국 보고서'를 통해 한국을 '서서히 데워지는 물 속의 개구리'에 비유하며 저성장 시대를 극복할 새로운 성장모델을 주문했다. 2년이 지난 지금 맥킨지의 눈에 한국기업은 여전히 데워지는 물속 개구리다. "일본도 1990년대 말 정치권이 내부적으로 분열하고 총리가 6개월∼1년에 한 차례씩 바뀌면서 10년간 어떠한 의사결정도 잘 안됐었다. 한국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개혁시기를 놓쳐 일본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 2.6%(경제성장률), 1.5%(기준금리), 0.7%(소비자물가 상승률)…. '일본식 디플레이션'을 보여주는 한국경제의 현주소이다. 성장둔화로 가계의 소비 여력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물가상승률이 떨어지고, 반대로 물가 둔화는 가계·기업의 소비와 투자 욕구를 떨어뜨려 경기 침체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산업구조정과 기업의 체질 변화가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한국은행은 14일 올해 국내총생산(GDP) 전망치를 기존 3.2%에서 3.0%로 낮췄다. 지난해 10월 이후 3개월 만에 0.2% 포인트 내린 것이다. 국제 유가 하락과 원·달러 환율 상승 등을 고려했다는 것이 이주열 총재의 설명. ◆일본식 불황, 우려가 현실로 '한국 경제가 일본식 장기불황에 접어들 가능성이 있다'(응답자 94.4%, '일정 부분(73.6%)' 또는 '상당히'(20.8%)) 현대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2016년 투자환경 전망과 시사점' 보고서의 한 내용이다. 우리나라 기업 10곳중 9곳이 불황을 걱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목소리가 힘을 얻는 것은 최근 우리 경제의 양상이 일본이 걸어온 길과 닮아 있어서다.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를 3.1%로 잡고 있다.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도 3.0%로 발표했지만 세계경제 성장세가 예상보다 나쁘면 2%대 중반으로 추락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해외 투자은행(IB) 중에는 독일의 데카방크가 지난해 2.5%에서 2.1%로, 모건스탠리는 2.4%에서 2.2%, 다이와는 2.5%에서 2.3%, 씨티그룹은 2.5%에서 2.4%로 각각 축소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7% 그쳤다. 1965년 소비자물가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 가장 낮은 것이다. 기준금리도 1.5%까지 떨어졌다. 살아나던 부동산시장도 다시 위축되고 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1배럴 당 30달러가 무너진 국제유가는 디플레이션 우려를 키우고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에 따른 원유 수입량 감소,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의 감산 실패 등으로 저유가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경우 한국경제도 휘청일 수 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일본 경제를 보듯 경기, 물가의 동반 하강은 한 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늪과 같다고 경고한다. 실제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선진국의 경기호황,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신흥국을 각각 디딤돌 삼아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비빌 언덕이 사실상 없다.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원은 '한국 경제 긴급 진단' 보고서에서 "현재 한국은 외환 보유액이 3640억달러에 이르고, 단기 외채 비율도 안정돼 1997년과 같은 외환 위기가 올 가능성은 낮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서서히 다가오는 일본식 장기 불황의 위기"라며 "과연 우리나라가 이를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한국경제의 체력만 봐도 알 수 있다. 1989년의 일본은 GDP(국내총생산) 세계 2위, 수출액 세계 3위로 비교적 튼튼한 경제였다. 우리나라는 GDP 13위(이하 2014년 기준), 수출 6위로 더 허약하다. ◆산업 체질 개선 해야 전문가들은 저성장의 탈출구로 '새로운 성장모델'과 '체질 개선'을 제시한다. 지난달 한국경제연구원이 내놓은 '대한민국 주력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전기전자업의 경우 2010년 한국의 매출증가율은 25.55%로 4개국 중 가장 높았으나 2014년에는 4.10%를 기록해 미국 5.94%, 일본 6.68%, 중국 9.84%보다 낮았다. 해운, 화학, 자동차, 철강 등도 뒷걸음 하고 있따. 최원식 대표는 "뉴 노멀(Normal) 시대의 경영 환경은 기업들이 입맛에 맞는 먹거리를 고르기 어렵게 되었다"며 "한국 기업들도 어떤 먹거리라도 잘 소화시키는 체질로 바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잡식성 체질로 바꿀 필요성을 강조한 것. 이창용 국장은 "만성적 저성장을 막으려면 단기적 재정·통화정책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사람들이 '헬조선(지옥처럼 혹독한 한국사회)'이라고 이야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중장기적으로 출산, 보육, 교육, 서비스업 육성 등 근본적인 구조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경기부진의 원인이 낮아진 성장잠재력 때문이라면 부양을 통해 성장을 끌어올리기보다 구조개혁과 체질개선으로 경제의 실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도 절실하다. 현대경제연구원 임희정 연구위원은 "단기적으로는 경기가 회복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저물가·저성장 체제에 대비해야 할 시점"이라며 "정책 당국은 금융정책 완화와 해외투자 활성화 같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