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은 책과 함께] 돌봄, 동기화, 자유
무라세 다카오 지음/김영현 옮김/다다서재 언젠가부터 할머니의 전화를 받지 않게 됐다. 전화를 받으면 할머니는 큰아빠 이름을 불러댔다. "할머니 손녀딸"이라고 하면 "왜 네가 받냐. 나는 분명 첫째한테 전화를 걸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슷한 일이 반복됐고 슬슬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할머니한테 성질을 부릴 순 없었기에 그냥 전화를 무시하는 걸로 대응했다. 엊그제는 부재중 전화가 20통이나 찍혀 있었다. 전부 '할머니'였다. 어디 아픈가 싶어 걱정돼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 있어?"라고 묻자 할머니는 "너는 누구냐?"고 되물었다. "손녀딸"이라고 했더니 "집에 손님들이 와 있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바쁘면 인사도 않고 끊어도 되는 거냐"며 버럭 화를 냈다.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바쁘다고 했잖아.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들어!"라는 내 말에 할머니는 "가는귀가 먹어서 그래애애애액!!"라며 소리를 빽 질렀다. 둘 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고,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할머니를 좋아했다. 그녀가 90살이 되기 전까지는. 더 정확하게는 기억이 오락가락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할머니는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다섯 명의 자식은 물론이거니와 손주 10명이 태어난 날을 전부 기억했다가 생일 당일에 맞춰 전화를 걸어 축하한다며 따뜻한 인사말을 전하곤 했다. 엄마 아빠 몰래 통장에 용돈도 넣어줬다. 그랬던 할머니가 아흔 살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며 질릴 때까지 반복했고, 귀가 어두워져 대화하기도 힘들어졌다. 늙는다는 건 무엇이고, 노인을 돌본다는 건 어떤 일일까. '돌봄, 동기화, 자유'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책이다. 저자는 노인요양시설 '요리아이의 숲'의 소장인 무라세 다카오. 인지장애가 있는 고령자를 돌보는 '요리아이'는 노인을 가두지 않고, 진정제를 투여하지 않으며, 원할 땐 언제든 외출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운영 철학으로 일본 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노인들의 생활을 보살피던 저자는 노화가 진행되는 육체에 생각지 못한 잠재력이 숨어 있단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입보다 유창하게 말하는 눈빛, 무당보다 뛰어난 말솜씨,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혼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도약력···. 저자는 "자유롭지 않게 된 몸은 나에게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준다"며 "내가 지니고 있던 자기 개념이 무너지는 동시에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했던 규범에서 해방된다"고 이야기한다. 이어 "몸이 점점 자유롭지 않게 되면서 사회의 개념적인 것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늙는 것이라고 한다면, 노쇠의 세계란 과연 어떤 곳일까. 그곳이 어떤 곳이든 '늙음'이란 '노쇠=기능 저하'라는 등식에 전부 담을 수 없는 생기 넘치는 과정"이라며 "번데기 속에서 몸이 걸쭉하게 녹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듯한, 역동적이고 극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328쪽.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