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서울] (133) 을미사변 순국 충신 기리는 제단 있던 중구 '장충단공원'
청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의 세력을 키워나가자 러시아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단행한다. 이 시기 조선에서도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 세력을 축출하려는 반일 움직임이 포착된다. 위기감이 커진 일본은 1895년 인아거일(러시아와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 정책의 핵심 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한다. 이듬해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해 자주 국가임을 선포하고, 순국한 군인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 장충단을 세운다. ◆치욕의 공간서 치유의 공간으로 '충을 장려하는 제단'이란 뜻을 가진 '장충단'은 오늘날 현충원과 같은 기능을 했다. 순국한 군인을 기리는 장소로,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가 이뤄졌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이후 일본은 조선에 사는 자국민을 위해 제향 공간인 장충단을 공원으로 만들어 1921년 개원한다. 장충단에 벚나무를 심고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해오던 일본은 1932년 이곳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 '박문사'를 짓고 대륙 침략을 독려하는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건립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광복이 된 뒤 정치집회 장소로 이용돼 오던 장충단은 1984년 근린공원화된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지난 10일 오후 장충단공원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오면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공원은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엘프족(게르만족 신화에 등장하는 요정) 신발처럼 생겼다. 발뒤꿈치에 있는 장충정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생태연못, 수표교, 벽천, 다담에뜰(휴게소), 이한응 선생 기념비, 이준 열사 동상, 문화행사마당, 파리장서비, 지압보도, 전시관, 사명대사 동상, 장충단비가 차례로 들어섰다. 입구에서 사람들은 맞는 건 '장충정'이라는 현판이 붙은 작은 정자다. 할아버지들은 정자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고, 젊은이들은 정자 마루에 걸터 앉아 스마트폰으로 웹서핑을 했다. 정자 앞에는 이 일대에 과거 장충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충단비'가 세워졌다. 과거 장충단은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위치했으나 일제에 의해 훼손돼 현재는 장충단비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비석 앞면에는 황태자였던 순종 황제가 쓴 '장충단'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졌다. 당시 육군 부장이었던 민영환은 비석 뒷면에 장충단을 세우게 된 배경과 의미를 143자로 적어 놓았다. 마을 주민들은 장충단비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 이웃과 담소를 나눴다. 내복을 뒤집어 입고 나온 한 어르신은 "아이고 하늘에 구름 좀 봐 예쁘다. 공원만 한 게 없어 그치?"라며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누군가가 "할머니, 왜 옷을 거꾸로 입으셨어요?"고 묻자 "몰라 내 맘대로 할 거야. 그냥 그러다 가는 거지"라고 큰 소리로 답했다. ◆복원 안 돼 아쉬움 남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유림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사실을 폭로하고 식민 통치의 폭력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장충동공원에 남아 있다.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에서 남쪽으로 좀 더 내려오면 쓰리피스 정장(양복 재킷, 조끼, 바지)을 갖춰 입은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상의 주인공은 이준 열사다. 그는 1904년 대한보안회를 조직해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획득을 저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애쓰다 순국했다. 그 옆에는 이한응 열사비가 마련됐다. 외교관을 지내는 동안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죽음으로 항쟁하기 위해 1905년 자결했다. 이 사건은 일제 침략을 반대하는 민족운동의 계기가 됐다. 비석에는 "슬프다. 나라는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은 평등을 잃어버려 모든 외교에 치욕이 망극하니 진실로 핏기를 가진 이면 어찌 이를 참을 수 있으리오"로 시작하는 유서가 새겨졌다. 장충단공원의 북쪽에는 '장충단, 기억의 공간'이 조성됐다. 전시관에서는 '장충단의 건립 배경'과 '국권 침탈에 따른 장충단의 시련' 등을 주제로 한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기억의 공간 전시 자료에 따르면, 건립 당시 장충단의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장충단 설치 과정을 기록한 '장충단영건하기책'과 일제강점기 때 자료에 의하면 장충단은 조경 공사를 먼저 시행한 후 1900년 착공해 1901년 6월 완공됐다. 제사를 지내는 단사는 3층 축단 위에 15칸 규모로 세워졌다. 건물 뒤로 산줄기가 이어졌으며, 앞마당은 흙으로 덮고 건물 입구에 돌을 깔아 진입 동선을 구성했다. 이외에 전사청, 장무당, 양위헌, 고직처소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경성부공원계획지도를 보면 남산공원과 비교해 장충단의 규모가 작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 일제가 장충단에 세운 박문사와 육탄3용사 동상이 철거됐지만 한국전쟁으로 경내 건물들이 다수 파괴되고 정부 수립 후 공원시설이 설치돼 현재까지 과거 제향 공간으로서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장충단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기억의 공간을 방문하면 된다. 문 여는 시간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주말과 공휴일은 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