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1>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1958년)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1>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1958년) 서구 제국주의에 침탈당해 몰락한 슬픈 아프리카의 초상 치누아 아체베(1930~2013년)가 28살에 첫 소설로 쓴 작품인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문학의 고전으로 전 세계에서 1000만부가 넘게 팔렸다. 폭력적인 서구 세력의 침탈에 대항해 부족의 문화와 풍습을 지키려는 한 남자의 모습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원주민의 생활과 문화가 서구 세력에 압도되어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을 그렸다. ◆Things fall apart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라는 소설 제목은 예이츠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영어로는 '씽즈 폴 어파트(Things fall apart)'이다. 한국어 제목이 대체로 무난하게 번역된 것 같으나 원제와는 뉘앙스가 다른 점은 어쩔 수 없다. 'Things fall apart'가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을 더 잘 드러낸다. 제목이 그렇듯,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영어로 된 아프리카 소설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영문학으로 봐야 하는가, 아프리카 문학으로 봐야 하는가. 영어라는 언어를 사용했으니 결국은 영문학에 포섭되지 싶다. 물론 두 가지 성격이 모두 있다. 아체베는 나이지리아 사람이지만, 기독교인으로 서구 정신에 익숙하고 영어를 잘 쓰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현상을 영어로 소설화했을 때 세계적인 확장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문학이라는 게 꼭 사실의 단순 전달만은 아니기에, 예컨대 한국어로 쓴 한국 문학이 우리 공동체의 전통과 정조를 담아내는 것과는 다른 경로를 취한, 세계성에 정향(定向)한 이 소설의 개념화 이면에서 아쉬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언어 측면에서 오리엔탈리즘의 한 형태가 아닌가 하는 그런 고민. 나아가 언어를 넘어선 오리엔탈리즘이 이 소설에서, 이 작가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극복되었는가에 관한 궁금증은 불가피하다. 이 소설은 다큐멘터리 또는 르포적인 성격이 강한데, 현실에 존재하는 소재 자체가 너무 뚜렷할 때 또는 현실이 그 자체로 문학적일 때 '가공'은 최소에 머물고 제대로 된 전달이 중요해진다. 그랬을 때 작가라는 프리즘은 과연 오리엔탈리즘과 얼마나 간격을 유지했는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동양을 열등한 존재로 고착하는 사고의 틀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정의한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일반적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서구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원형 오리엔탈리즘이고, 두 번째는 복제된 오리엔탈리즘이다. 복제된 오리엔탈리즘은 영국 등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제삼 세계 내부에서 대리인으로 육성된 내부의 지배 계급이 가지는 서구적 사고 체계를 말한다. 제삼 세계 지식인은 대부분 복제된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하기 마련이고 한국에서도 그랬다. 이 시기 제삼 세계의 지식인에게는 기본적으로 큰 균열이 있다. 세계를 바라볼 때 근대화라든지 근대성이라든지 하는 것과 결부된 근대 국가 모델 외에 대안이 없기에, 그 방향으로 가야 하기에, 미래는 서구에서 찾아진다. 반면 극복해야 하는 내부의 봉건성은 자기 민족과 연결된다. 그렇다고 자기 민족을 버리고 서구를 무조건 모방하면 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서양인이 아닌, 서양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서구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살아가는 땅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자신들의 유대관계, 자신들의 공동체, 즉 자신들의 플랫폼 속에서 서구와 연결된 근대화를 추구해야 했기에 자기 민족과 연결된 봉건성이 족쇄처럼 따라온다. 그 균열 속에서 제삼 세계 지식인이 흐느적거린다. 아체베의 이 소설에서는 흐느적거림 속에서 중심을 찾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자기 민족 안에 존재한 유대와 애정, 공동체성을 지켜내려는 따뜻함과 관계에 대한 애착까지 버리면서 서구화로 가야 하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이 문제를 지적한다. 단순히 영어로 쓴 소설이고 오리엔탈리즘의 흔적이 있어 서구가 이 소설에 열광했다고 판단한다면 단편적인 이해이다. 상당히 힘 있게 그리고 술술 읽히는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풀어가면서 전해야 할 메시지는 메시지대로 잘 담아낸 소설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소재 자체가 훌륭하기에 재능 있는 작가가 사건에 적절한 수준으로 잘 가필함으로써 가독성이 뛰어나고 메시지가 뚜렷한 작품을 산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건 구성 말고도 심리 묘사나 전개가 탁월하다. 첫 작품인데 노련한 소설가인 양 질질 끌지 않는다. 느릿한 전개가 없고 사건이 일상적인 흐름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총 맞아 죽을 땐 갑자기 총에 맞고, 도끼로 찍어 죽일 땐 건조하게 또 순식간에 도끼를 휘둘러버린다. 그 일이 일어나게 된 당사자의 심리 상태를 충분히 묘사하였기에 사태를 단순하고 간명하게 처리해도 독자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조지프 콘래드의 커츠와 치누아 아체베의 오콩코 조지프 콘래드는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다. 콘래드 자체는 폴란드 사람으로 아체베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다. 영문학의 고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과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을 비교해보자. '암흑의 핵심'의 커츠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오콩코라는 인물에는 모두 제국주의 및 오리엔탈리즘이 개입한다. 오콩코나 커츠 둘 다 소외와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오콩코는 오리엔탈리즘 시각에서 오리엔탈리즘 내부에서 겪는 소외고, 커츠는 밖에서 오리엔탈리즘 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겪는 소외다. 소외와 비극이 일어나는 현장은 오리엔탈리즘 안, 정확한 표현으론 오리엔탈리즘 이념이 기본값으로 깔린 아프리카 안이다. 오콩코와 커츠가 각자의 텍스트 안에서 아프리카라는 공간에 자리하면서 그 시대 그 공간의 특성상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비슷한 양상을 노정한다. 다만 두 사람에겐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정점으로 치닫기 전의 모습이 투영된다. 주인과 노예가 변증법적 전환 과정, 혹은 지양하기 직전까지 변증법적 축적의 양상을 보여주며 오콩코는 내부인으로, 커츠는 외부인으로서 각각 겪은 비극을 그렸다는 차이를 드러낸다. 오콩코와 커츠는 둘 다 문학의 영웅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흔히 희생양 이론에서 말하는 사회적 맥락과는 다르지만 둘 다 일종의 희생양이다. 둘 다 사회적인 희생양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희생양의 길을 걷고, 자기 운명에 희생되는 구조를 취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제시되는 숭고한, 무결한 인간이 아니며 적잖은 결함을 지녔다는 점에서 비극의 주인공이지만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과 다르다는 공통점도 목격된다. 다른 한편으론, 인간적인 결함을 지닌 인간이 통상 그러하듯 빠른 이해타산 속에서 남들처럼 시류에 편승하고 바뀌는 세상에 적응하면서 다른 길을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두 소설의 주인공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과 닮았다. 결함은 단지 운명으로 향하는 이정표에 불과했다. 동시에 내면의 두려움과 항상 대면하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존엄한 인간으로 싸웠다는 점에서 그들은 근대적이고 실존적인 영웅이다. 자기도 모르게 주어진 운명이 그리스 비극의 특징이라면, 오콩코나 커츠에게 드리운 운명은 굳이 스스로 찾아가지 않아도 될 운명을, 남들이 권하지 않고 회피하는 운명을 기를 쓰고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운명이다. 그럼에도 오콩코나 커츠가 인간적인 결함을 넘어서 마주하는 결말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비슷한 숭고함을 느낄 법도 하다.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숭고하다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식민주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시대 배경이 19세기 말이고 소설의 발표 시기는 1958년이니, 두 시기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시대의 절정이고, 1958년는 신식민주주의 시대에 해당한다. 소설 속 시대에서는 서구 외세와 제삼 세계의 민족 혹은 지역의 주체 사이의 갈등이 중요한 이슈였다. 내부와 외부의 갈등이 주요 모순인 19세기말과 달리 소설 발표 시기인 1958년의 신식민주주의 시기엔 외세와 민족 자결을 주창하는 주체 간의 갈등이 온존하지만 그것이 약간 뒤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외세로부터 훈련받은 제삼 세계 내의 비(非)서구 대리인이 제삼 세계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면서 독립과 매판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제삼 세계 민족의 여망과 괴리되는 현상을 보인다. 작가는 자기의 시대와 소설 속 시대를 겹쳐보며 착잡한 심정으로 소설을 썼을 것이다. 아체베는 이 두 가지를 뒤섞어서 소설로 구현한다. 1958년 시점에서 19세기 말을 그렸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폐해는 물론 나이지리아 내부의 부족 간, 인종 간, 종교 간 내부 갈등의 모습이 균형감 있게 표출된다. 남성성 및 여성성과 관련한 제삼 세계의 가부장제, 이념대립이 투사된 세대 갈등, 나이지리아 방식의 기독교 수용 등 많은 거대 담론이 삶의 풍경을 통해 서글픈 모습으로 소화되어 소설로 형상화한다. 오리엔탈리즘의 간편한 안티테제는 구조주의인데, 형상화 과정에서 아체베는 구조주의 관점을 불가피하게 채택하는 듯하다.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