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5>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1966년)
본디오 빌라도와 예수, 사탄이 함께 행복해지는 소설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 미하일 불가코프의 대표작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의 사후 26년만인 1966년에 발표됐다. 불가코프가 1940년 3월 사망하기 3주 전까지 실명의 고통을 무릅쓰고 10여 년 분투하며 완성한 작품이다. 한때 잘 나가는 극작가였던 불가코프는 한순간에 '국내 망명 작가'가 돼 계속되는 상연 금지와 출판 금지 속에서 지병과 투쟁하며 필생의 대작을 남기고 분노 속에 죽었다. 비운의 작가 불가코프의 이 작품은 소비에트에 대한 풍자소설, 시공간을 넘나드는 환상소설, 그리고 현란한 문체의 카니발소설로 읽히며 독자로부터는 물론 작가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예수를 못박은 본디오 빌라도를 소재로 한 소설 이 정도로 방대한 규모의 작품을 이 정도의 확고한 장악력으로 집필한 작가는 많지 않다. 무엇보다 소재 면에서 독특하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자장에 강력하게 포섭된 서양에서 화가·음악가는 물론이고 많은 작가가 성서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 했지만, 본디오 빌라도를 붙들고 이렇게 완성도 높은 소설을 쓴 사람은 불가코프 말고는 없을 것이다. 소설에는 세 공간이 등장한다. 예루살렘, 모스크바, 그리고 너머의 공간. 대표 인물로는 예루살렘에 예수와 빌라도, 마태가 있고, 모스크바에는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있다. 볼란드는 두 세계를 연결하는, 너머의 세계에 속한 존재이다. 세 공간 중 이야기가 전개되는 두 축은 2000년이란 시간 간격을 둔 예루살렘과 모스크바이다. '파우스트'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그레트헨이나 메피스토펠레스에서 얼핏 마르가리타와 볼란드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무대의 규모와 웅장함은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파우스트'를 능가한다. 세계관과 주제가 다르다. '파우스트'의 주제가 고전적인 진리와 구원 같은 것이라면,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진리와 구원은 물론 사회 비판, 풍자, 사랑, 종교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읽기에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다. 만화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덮고 나면 심오한 주제의 무게에 체할 수도 있다.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데에는 작가가 20세기 초반 사람이기 때문에 당대의 신학 연구 동향을 참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를 비롯하여 빌라도, 유다, 바라바, 가야바 등의 형상화엔 당대의 한계가 투영되었겠지만, 소설이기 때문에 굳이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다만 이 소설에서 그린 빌라도가 실제 본디오 빌라도와 분명하게 달랐으리란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빌라도는 그려진 것처럼 지식인이 아니었고, 잔인하고 출세 지향적인 용병 스타일의 무장(武將)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빌라도가 예수를 죽인 사람임에도 기독교 일각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만들어 추앙했다. 예수 사후에 제자들이 기독교를 만들면서 기독교가 유대교의 소수 종파로 남아 있다가 로마 권력과 제휴하며 제국의 종교가 되는 경로를 걸었고,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핍박받는 상황에서 이처럼 로마제국 내에서 선교하다 보니 친로마적인 태도를 보였다. 빌라도가 로마를 대표하는 인물이기에 빌라도를 척지는 것은 선교전략과 약간은 충돌했다는 관점이 가능하다. 성서의 기록에는 빌라도가 자신은 죽이기 싫어하면서 주변의 압력에 밀려 예수를 죽인 것으로 돼 있다. 여기서 예수가 신성 모독에 따른 투석형으로 죽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십자가형은 로마 형벌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을 십자가형으로 죽인 경험이 있다. 변방인 나사렛의 청년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에 1초도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기록된 빌라도의 모습은 후대에서 만들어진 역사일 확률이 높다. 빌라도는 이 소설에 묘사된 것처럼 그렇게 고뇌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 고뇌는 거장을 통한 고뇌였다. ◆예루살렘과 모스크바 소설에서 예루살렘은 모스크바와 겹쳐진다. 직접 겹쳐지는 게 아니라 두 가지 매개 방식으로 겹쳐진다. 볼란드란 존재를 통해서 두 공간이 이어지고, 모스크바에 사는 거장이 쓴 소설을 통해서 빌라도가 묘사되어 두 공간이 연결된다. 후자는 흔히 말하는 액자 소설이라기보다는 상호 간섭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뫼비우스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의 소설과 소설 속의 현실이 상호 간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현실이 변화하는 것으로 나온다. 보통 액자 소설이 이렇게 간섭까지 일으키지 않고 영향과 파장 정도만 드러내는 것과는 판이하다. 마지막엔 소설과 현실이 혼동된다. 볼란드는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다. 예루살렘에서 빌라도 옆에 있었고, 마태 옆에도 있었고, 거장과 거장의 후계자 격인 시인 베즈돔니 등 모두의 옆에 있다. 기독교에서 보통 사탄은 타락하여 추방당한 천사라고 말하는데, 볼란드를 사탄이라고 규정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다. 결정적으로 볼란드와 예수 사이에 대립 관계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우열 관계도 명확하지 않다. 마지막에 보면, 예수가 마태를 보내서 안식을 주라고 부탁을 한다. 성서의 기술로는 예수가 물러가라고 하며 공격해야 할 존재에게 소설에서는 오히려 부탁을 한다. 공간의 겹침 외에 인물의 겹침이 목격된다. 예수와 거장.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당대 기득권의 박해와 사회적 소요 속에서 희생당한 젊은이다. 소설에서 빌라도는 예수의 억울한 죽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를 살해한 사람이면서 역설적으로 예수의 무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기득권의 핍박은 모스크바에서 재현돼 문학을 통한 거장의 핍박으로 이어진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예수와 거장이 의미상 중첩되며 거장은 불가코프의 대리인이자 분신이다. 소설가는 자신을 시대의 핍박을 받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 예수가 사후에 부활이라는 형태로 새로 살아났듯이 거장도 부활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살아서 인정을 못 받고 핍박받은 불가코프도 죽어서 이 소설로 어마어마한 이름을 얻게 된다. ◆만 이천 번의 보름달을 보면서 괴로워한 뒤에 얻는 구원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고 지적되는 이유 중 하나가 거장이 죽었는지 납치당했는지 헷갈리게 써놨다는 점이다. 앞뒤를 다르게 썼다. 어디서는 죽었다고 돼 있고, 어디서는 납치됐다고 돼 있다. 개인적으로 죽었다고 쓰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맥락과 관계를 보면 아무튼 사라지기는 해야 하는데, 납치라고 하면 SF영화인 '에이리언'이 돼버리고, 죽어야만 종교 영화가 된다. 소설에서 중요한 장면은 통념이 어떠하든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으로, 불가코프가 이 소설에서 설정한 핵심장치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 그리고 역사에 (끔찍하게) 남은 일을 함으로써 2000년 동안 고독과 후회 속에서 산 빌라도는 거장의 소설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 이게 소설 속 소설의 힘이다. 거장이 빌라도에 관한 소설을 쓰고, 예수가 읽고, 나중에 빌라도와 예수가 걸어가면서 화해한다. 이런 빌라도의 캐릭터에 비추어 빌라도가 스탈린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어떤 이들은 볼란드가 스탈린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소설에 소비에트 비판이 뚜렷하지만 불가코프가 특정한 인물로 스탈린을 상징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스탈린 체제를 우화처럼 전반적으로 모스크바에 깔아버린 듯하다. 2000년을 왔다 갔다 건너뛰면서 종국에 빌라도가 구원을 받고, 거장은 안식을 받는다. 볼란드는 두 세계를 넘나들다가 너머의 세계로 사라진다. 볼란드는 한 마디로 편재(遍在)한다. 앞서 볼란드가 예수보다 상위의 존재로 느껴진다고 했는데, 단적으로 볼란드의 세발의자가 이러한 위계를 뒷받침하는 건 아닐까. 세발의자가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떠올릴 수 있기에, 불가코프의 소설에서 볼란드를 조금 더 높은 신의 개념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지 싶다. 이 책에는 판타지와 로맨스가 있고 종교와 구원에 관한 얘기, 사회 비판이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닮지 않았다. 전형성과 계급성이 없다. 당시 러시아 상황에서 불온한 서적으로 간주될 만하다. 인류 문명 전체에서는 당연히 탁월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미완성이라고 한다. 몇 가지 부정확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긴 소설을 조용히 혼자 은밀하게 쓰다 보니 노트북도 파일도 없는 상황에서 작가가 실수했을 법도 하다. 병마와 싸우며 죽음 직전에 간신히 마무리했으니 그럴 소지가 다분하다. 빌라도는 만 이천 번의 보름달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자기의 과오때문에, 한 번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죽지도 않고 그 밤이 오면 계속 괴로워한다. 그 저주가 거장의 소설을 통해서 풀린다. 거장도 마르가리타와 함께 안식을 찾으니 아무튼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가 러시아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면,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세계의 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비운의 작가 불가코프에게 이것이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할까.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