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4000시대] ① 역사 쓴 한국 증시, 유동성의 파도에 올라타다
"사천피(코스피 4000)라니! K-팝, K-푸드에 K-증시다!", "이대로 쭉 5000까지 가자!" 코스피가 사상 처음 4000선을 돌파하며 시장에 환호가 번졌다. 지난 6월 3000선을 회복한 이후 불과 넉 달 만의 일이다. 27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오전 9시 38분 기준 코스피는 전일 대비 83.19포인트(2.11%) 오른 4024.69를 기록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AI 수요 확대와 한미 관세 협상 타결 기대, 완화 기조를 유지하는 한국은행의 스탠스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증시로 자금이 몰리고 있다. 코스피가 4000선을 넘은 것은 2021년 1월 6일 3000 고지를 밟은 지 약 4년 10개월 만이다. 올해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사태 때 2464(12월 9일)까지 떨어졌던 시기와 비교하면 코스피는 6개월 만에 63% 넘게 반등하며 역대급 회복세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번 상승은 단순히 '유동성 장세'나 '정치 안정화'로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를 누비는 시장의 돈은 빠르고 뜨겁지만, 코스피 상승은 기업 이익과 제도 신뢰 회복이라는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달라진 돈의 방향…"환율 아닌 이익을 따지는 외국인 매수" 시장에 돈이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특히 국내 증시 지수 상승을 기대하는 개인 투자자 자금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0일 기준 국내 투자자예탁금은 80조 6257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투자자예탁금은 개인이 증권사 계좌에 예치한 현금성 자금으로, 투자심리의 온도를 보여주는 대표 지표로 여기지며 보통 주가 상승 기대감이 높을수록 예탁금이 빠르게 증가하며 지난 9월 10일 이후 해당 금액은 70조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다. 아울러 신용융자 잔액도 24조2419억원으로 2021년 '빚투' 정점을 갱신했다. 과열 논란이 재점화됐지만, 그 성격은 과거와 다르다는 것이 시장의 의견이다. 이영곤 토스증권 투자전략센터장은 "2021년은 '돈이 남아 도는 장세'였다면, 지금은 '돈이 갈 곳을 찾는 장세'"라며 "외국인 매수의 핵심은 환율이 아니라 이익"이라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환율이 1450원을 넘었는데도 외국인은 팔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수급이 아니라, 한국의 반도체·전력기기·조선업이 리레이팅(재평가) 구간에 들어섰기 때문이고. 글로벌 자금이 그 중에서도 저평가된 한국 시장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본격적으로 '귀환'하며 코스피 상승세에 불을 지폈다. 10월 들어서만 3조 넘게 순매수하며 6개월 만에 시장 주도권을 되찾았다. 이들은 반도체·조선·전력기기 등 실적 가시성이 높은 업종을 중심으로 매수세를 집중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은 하반기(6월 2일~10월 24일) 동안 총 20조420억원을 순매수한 것으로 집계됐다. 기관도 2조7000억원을 순매수하며 시장 안정 역할을 했다. 외국인 보유 시가총액은 1124조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반대로 같은 기간 개인투자자는 27조원을 순매도하며 차익을 실현했다. 특히 외국인 매수세는 주요 업종 전반으로 확산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연초 대비 각각 90%, 210% 급등하며 반도체 랠리를 주도했다. HD현대중공업(116%), 한화에어로스페이스(184%), 두산에너빌리티(354%) 등 글로벌 인프라·에너지 전환 수혜주로 꼽히는 종목들도 실적 개선세를 바탕으로 큰 폭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이번 장세의 유동성은 위험한 과잉이 아니라 '기대와 실적이 정렬된 유동성'"이라며 "기업 이익이 오르고, 자금이 이를 따르는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 센터장은 "2021년은 돈이 너무 많아 부동산과 주식이 함께 오른 유동성 장세였지만, 지금은 부동산 자금이 증시로 옮겨가며 자산 선호의 무게 중심이 바뀌고 있다"며 "집단적 성공 (투자) 경험과 배당 상향이 장기 투자 유인을 만들고 있다"고 짚었다. 한편 한국은행의 스탠스도 증시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 있다. 한은은 10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2.50%로 3연속 동결했다. 내년 초 금리 인하 가능성까지 열어뒀다. 국고채 3년물 금리도 3.55%대에서 2.85%까지 하락, 자금조달 환경이 한층 완화됐다. 성장률 둔화와 물가 안정이 맞물려 금리 조정 여력이 커진 모습이다. 결국 이번 장세는 '돈이 만든 반등'이 아니라 '돈이 찾아온 이익'의 장세인 셈이다. 이영곤 토스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시장은 이제 기대가 아니라 데이터를 본다. 이익이 확인되면 자금은 망설이지 않는다"고 했다. ◆펀더멘털의 회복, 숫자로 확인되는 체력… "ROE가 이익을 끌어올린다" 유동성은 증시 상승의 불씨가 됐지만, 결국 시장을 지탱하는 건 펀더멘털이다. 한국은행과 IMF, KDI 등 주요 기관은 올해 한국의 GDP 성장률을 0.8~0.9%, 내년을 1.6~1.8%로 제시했다. 잠재성장률(1.5~1.8%) 수준의 저속 구간이지만, 기업 이익은 오히려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2025년 코스피 상장사 전체 영업이익은 213조원으로, 전년 대비 29% 증가할 전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부문에서만 100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이 예상된다. 조선·전력기기·방산 등 인프라 산업도 수주잔고 확대로 20~30%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코스피의 12개월 선행 PER은 11.8배, PBR은 1.2배 수준이다. 2021년 고점(13.5배·1.5배)에 비하면 여전히 저평가 구간에 머물러 있다. 김학균 센터장은 "이번 랠리는 유동성에만 기댄 2021년과 다르다"며 "이익이 오르고 ROE(자기자본이익률)가 개선되는 장세라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더 단단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과거에는 실적이 따라오지 못해 밸류에이션만 부풀었던 시장이었지만, 지금은 기업 이익이 실제로 회복되고 있다"며 "이익이 뒷받침되는 장세는 길게 간다"고 덧붙였다. 기업의 체질이 좋아지는 구간에서 밸류에이션 리레이팅(가치 재평가)이 일어날 수 있어 코스피 4000을 넘어 5000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김영익 서강대 교수도 "GDP는 정책 변수에 흔들리지만, 주가는 결국 생산성과 기업이익의 함수"라며 "AI 투자 확대 등이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잠재성장률을 2%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이번 4000은 단기 고점이 아니라 중기 흐름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국내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소폭 오른 모습이다. IMF의 경우는 최근 10월 보고서에서 한국의 2026년 잠재성장률을 0.9%로 상향 조정했다. KDI는 "AI·전력 인프라 투자가 민간 부문 생산성을 견인하며, 2025년 하반기부터 경기 확장 국면이 재개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JP모건 "12개월 내 코스피 5000 가능"… 제도가 바뀌면 밸류에이션도 바뀐다 글로벌 기관들은 한국 시장의 '구조적 리레이팅' 가능성에 주목한다. JP모건은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 증시는 상법 3차 개정, 배당소득 분리과세,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이 병행될 경우 12개월 내 코스피 4000~5000선 도달이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보고서는 "한국은 제조업 경쟁력, AI 밸류체인, 낮은 밸류에이션, 거버넌스 개혁 의지라는 네 가지 요인을 동시에 갖췄다"며 "이는 신흥국이 아닌 '준(準)선진국형 리레이팅 사이클'"이라고 평가했다. 김 센터장도 "과거 한국 증시가 할인받았던 이유는 이익의 불안정성과 지배구조 리스크 때문이었다"며 "이익의 변동성이 줄고, 거버넌스가 제도적으로 보완되면 프리미엄 시장으로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추진 중인 배당소득 분리과세, 자사주 소각 의무화, 충실의무 강화가 실행된다면 외국인 장기자금이 돌아올 여건이 마련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국내 상장사들의 배당성향은 평균 27.4%. 미국(45%), 일본(38%)보다 낮지만 개선 속도는 빠르다. 2025년엔 30%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IMF는 "한국의 주주환원율이 5년 내 40% 수준으로 올라가면, 코스피의 PBR은 1.5배 이상으로 리레이팅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MSCI 선진국 지수 편입 역시 핵심 변수다. 외환결제 인프라 개선, 공매도 전산화, 외국인 투자 절차 간소화가 이뤄져야 한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MSCI 편입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외국인 자금의 체류 시간을 늘리는 제도적 전환점"이라며 "유동성·펀더멘털·제도의 세 축이 동시에 맞물릴 때 비로소 4000은 일상이 된다"고 말했다. 코스피 4000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이영곤 센터장은 "지금 외국인 매수는 환율이 아니라 한국의 체력에 대한 투자"라며 "정책 불확실성만 크지 않다면 내년 말쯤엔 4000이 일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학균 센터장은 "시장의 고점은 이익이 꺾일 때 찾아오지만, 지금은 그 반대"라며 "이익이 오르고 제도가 바뀌고 있다. 이번 4000은 숫자보다 구조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시장은 단기 자금이 아니라 체류형 자금을 기다리고 있다. 완화 기조가 만든 유동성 위로 기업 이익과 제도 개혁이 맞물리며, 한국 자본시장은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돈이 시장에 몰리는 건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지만, 돈이 머무는 시장은 구조적이라며 코스피 4000은 '하나의 과정'이자 '시작점'이라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