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백악관 찾은 정용진, AI 유통 협력으로 승부수 띄울까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미국 백악관 핵심 인사들과 만나며 글로벌 네트워크 보폭을 넓히고 있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하는 인사를 만나 인공지능(AI) 관련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미국 정부가 추진 중인 'AI 수출 전략'이 국내 유통업계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린다. 정 회장은 현지시각으로 12일 저녁 J.D 밴스 부통령과 만찬에 앞서 백악관을 찾아 마이클 크라치오스 과학정책실장과 단독 면담을 갖고 미국 정부의 AI 전략과 연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정 회장은 이날 면담에서 유통 선진화를 위한 첨단 기술 도입에 관심을 표했다.크라치오스 실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하는 인물로, 현재 미국 상무부가 추진 중인 '미국 AI 수출 프로그램(America AI Exports Program)'의 설계자다. 미국 AI 수출 프로그램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자국의 기술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2025년 하반기부터 본격 가동한 핵심 대외 전략이다. 이 프로그램은 인공지능(AI) 최적화 반도체와 서버 등 하드웨어부터 클라우드 인프라, 파운데이션 모델(LLM), 사이버 보안 체계까지를 하나의 '풀스택(Full-Stack)' 패키지로 묶어 동맹국에 수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한미 양국은 지난 10월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주간에 '한-미 기술번영 MOU를 체결하며 AI 분야 협력을 확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판매를 넘어 미국의 AI 기술 표준을 동맹국에 이식함으로써 중국 등 경쟁국의 기술 영향력을 원천 차단하려는 의도로 풀이되며, 도입 기업에는 미 연방 정부 차원의 직접 대출, 투자 보증, 기술 지원 등 파격적인 혜택이 제공된다. 최근 신세계그룹 계열사 G마켓도 알리바바가 보유한 AI 기술과 협력에 나섰다. 이는 신세계그룹이 자체 기술 개발보다 검증된 외부 기술을 수혈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을 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경쟁사인 쿠팡이 지난 10년 간 수조원을 들여 자체 물류 알고리즘을 내재화하며 '우리는 미국의 기술 기업'이라고 천명한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다. 신세계가 미국 정부라는 강력한 우군을 등에 업는다면 소프트웨어와 인프라를 동시에 혁신해 기술 격차를 좁힐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는 정 회장이 관심을 표한 미국 AI 수출 프로그램이 실제 도입될 경우 신세계그룹 차원 물류망에 AI를 적용해 배송 및 재고 효율을 높이는 '물류 시스템 고도화'가 이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마트 등이 산지로부터 신선식품을 들여올 때 AI가 데이터를 분석해 적정 가격을 산출하는 데 도움을 주는 '프라이싱(Pricing)' 기술의 접목, 이커머스 사업 부문에서 고객이 검색하거나 찾아본 상품 기록을 바탕으로 AI가 최적의 맞춤형 상품을 제안하는 '개인화 상품 추천' 서비스가 한층 강화될 것이라 전망된다. 업계 관계자는 "AI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물류 고도화부터 신선식품 가격 책정, 고객 맞춤형 상품 추천 등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경쟁사인 롯데그룹은 이미 AI 혁신에 나섰다. 신동빈 회장의 강력한 의지 아래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판단하는 '에이전틱 AI(Agentic AI)'를 전사에 도입하며 유통 혁신에 속도를 내고 있다. 롯데 유통군은 지난 8월 '제1회 AI 컨퍼런스'를 열고 쇼핑, 상품기획, 운영, 경영지원 등 4대 핵심 분야에 자율형 AI를 적용하는 '에이전틱 엔터프라이즈' 비전을 공식화했다. 이를 위해 전담 조직 '라일락(LaiLAC)' 센터를 신설하고 2030년까지 통합 AI 플랫폼을 구축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현재 롯데는 그룹 통합 AI 플랫폼 '아이멤버'를 업무 전반에 활용하는 한편, 롯데마트의 신선식품 품질 관리와 세븐일레븐의 경영주 지원 챗봇 등 실무 영역에서도 AI 내재화를 가속화하며 쇼핑 1번지 재도약을 노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세계와 롯데의 전략이 AI 쇼핑 시대 전환기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AI 도입 자체가 목적이 아닌, 명확한 문제 해결을 위한 시스템과 신뢰 구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AI는 쇼핑의 근본적인 고객 여정을 완전히 재설계하는 기술로, 소비자의 검색 비용을 0원으로 만드는 시대를 열었다"고 진단했다. 서 교수는 "검색 쇼핑 시대의 승자가 쿠팡과 네이버였다면, AI 쇼핑 시대는 완전히 새로운 경쟁의 장이 열린 것"이라며 "신세계와 롯데 등 전통 유통 기업들이 외부 AI 기술과의 동맹 등을 통해 다시 한번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AI가 소비자의 의도를 너무 정교하게 파악할 때 느끼는 불쾌한 골짜기를 극복하고, 개인정보 보호를 통한 고객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기술 도입의 선결 과제"라고 강조했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단순히 AI 기술을 도입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하고, 이를 실행할 시스템과 인프라, 사람에 대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고객 행위 분석과 예측, 배송 루트 및 창고 최적화 등 유통의 각 분야마다 요구되는 모델과 데이터가 다른 만큼, 이에 대한 철저한 사전 분석과 치밀한 계획이 필수적"이라고 조언했다. /손종욱기자 handbell@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