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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홍경한의 시시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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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과 역할에 대한 정의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에게 예술은 자유의 표현이다. 벨기에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예술을 사회적인 규칙과 문화적인 구조를 나타내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예술의 개념은 복잡하고 다양한 해석을 포괄하기에 일반적으로 합의된 정의는 없다. 수 세기 동안 예술가와 사상가들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해왔지만, 예술 자체가 근거를 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명쾌한 답 또한 내놓지 못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역시 쉽게 규정하기 어렵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삶을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으나 정답은 아니다. 각종 재난의 시대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되묻고 디지털 시각 체제와 현실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는 것 자체를 예술의 역할로 꼽는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같은 이들도 있다. 이 밖에도 예술의 역할에 관한 판단은 여러 가지다. 누군가는 욕망의 표출과 행복의 실현을, 어떤 이들은 인간 존재 의미의 탐구 및 전달을 예술의 역할로 본다. 혹자는 타인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제공하거나 위안을 심어주면 예술 본연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 여긴다. 모두 맞다. 그것이 실체보다 외관을 강조함으로써 예술의 피상성과 소비주의 문화에 기여할지라도, 또는 기술을 예술의 전부로 착각하는 결과물이더라도 각각의 역할은 있다. 심지어 장식적이거나 풍수적인 작품들(미술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요소다)조차 어떤 이에겐 예술로써 제구실을 다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람마다 예술관이 다르고, 예술이 이해되는 방식에 관한 생각 또한 동일하지 않다. 미와 예술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게 답답하지만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다. 다만 예술의 정의와 역할이 무엇이든 굳이 예술가일 이유가 없는 것과 반드시 예술가이기에 가능한 것의 분간은 필요하다. 예술가와 예술가적인 것의 간극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메를로 퐁티(Merleau Ponty)는 사회 전반의 문제와 대면하고 현실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예술로 여겼다. 요셉보이스(Joseph Beuys) 같은 인물은 예술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에 충실할 것을 주문했다. 이들에게 예술(가)과 그 역할이란 사회 혁신의 동력이 돼야 한다는 공통된 믿음이 있다. 미술평론가 김영호의 말처럼 '예술은 당대의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따라서 예술은 사회적 진보와 문화적 다양성 촉진에 기여해야 하고, 부조리한 구조와 제도에 이의를 제기해야 하며, 순응적인 모든 문법에 저항하는 실천성을 보여줘야 한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술의 역할과 가치가 빈곤한 시대다. 편협의 극단에 이른 현재다. 예술가들은 보편성을 상실한 개인의 서사와 공동체적 이슈를 분간하지 못하고, 예술제도는 방향의 정립보단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바쁘다. 만약 그것이 바른길이라면 우린 예술(가)에 대해 잘못 배웠다. 그게 영원한 진실이라면 예술의 본래 기능이란 애초 존재 불가능했거나 위선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2월 같은 지면에서 나는 "예술가는 역사와 사회적 변화를 기록하는 존재다."라고 썼다. 예술작품에 대해선 그 자체로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인 문제에 대한 논평이자, 인류사에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토론을 촉구하는, 대화와 변화의 촉매제라 정의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 모든 건 결국 핵심 주체인 예술가들에 의해 선도돼야 한다는 것도, 정치를 비롯해 인간 삶을 억압하는 터전을 불태워 새싹을 돋게 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3-20 10:49:2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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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긍정과 부정 사이 ‘예술과 기술 융·복합’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은 예술적 표현과 창조적 과정을 기술적으로 통합 또는 교차시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미학체계를 구축하고 매체 및 표현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기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론 이전과 구분되는 형태의 예술에 기여할 수 있다.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은 표현의 한계를 희석시키며 예술가와 관객 모두에게 색다른 조형의 영역을 제시한다. 혁신적인 기술로 전통적인 미적 관행을 개선하거나 변형시켜 양자 간의 공생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아가 인터랙티브 설치, 가상현실(VR)과 인공지능(AI)을 이용한 작품, 디지털 플랫폼 등은 예술 작품과 관객 사이의 연결을 촉진하고 예술의 영향력 확대에 도움을 준다. 전자장치 내지는 디지털 매체, 기타 기술적 도구들이 예술의 과정과 결과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미디어아트의 선구자로 꼽히는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읽을 수 있는 도시'(The Legible City·1989)에서부터 지난 2월 영국 해이워드 갤러리에서 개막한 'When Forms Come Alive'에 참여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은 스튜디오 드리프트(Studio Drift)의 키네틱 작품 '샤이라이트'(Shylight) 등에 이르기까지, 그 수는 셀 수 없다. 여기엔 우리에게도 익숙한 미디어그룹인 에브리웨어(Everywhere)를 비롯해 예술가와 엔지니어, 프로그래머의 집합체인 팀랩(TeamLab) 등도 포함된다. 올라프 엘리아손(Olafur Eliasson), 에바 파브레가스(Eva Fabregas), 랜덤 인터내셔널(Random International), 미셀 블라지(Michel Blazy) 등의 다양한 작업도 마찬가지다. 이들 작품은 관객들에게 보다 몰입적, 촉각적, 상호작용적인 예술경험을 선사하며 예술가들이 어떻게 기술을 활용해 전통적인 예술 관행을 허무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통한 고전적 레거시 아트(Legacy art)에서부터 이머시브 아트(몰입 체험형 예술), 증강현실(AR) 등의 최첨단 도구를 이용한 작품은 장르 간 학제 간 구획 없는 동시대미술의 흐름과도 맞닿는다. 인터랙션(Interaction)을 기반으로 한 사용자 친화적인 미술과,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 방점을 둔 공간인 인터휴먼 스페이스를 추구하는 이들에겐 가장 적합한 전시모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은 다양한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잠재적 부작용도 없진 않다. 그중에서도 주목해야할 건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예술'에 대한 의미를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시각적 만족'에 무게를 두거나 자본주의 시장이 마구잡이로 전개하는 상업화의 물결 속에서 유영 중인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전시들이 그 예이다. 이는 자칫 '기술이 곧 예술'이라는 잘못된 예술관을 심어줄 수 있다. '기술이 예술의 가치'인 냥 여기는 오해의 여지도 있다. 물론 예술가들이 지나치게 도구화하고 의존함으로써 발생하는 고유 자생적 표현 능력의 상실과 피상적 감각체계의 학습에 따른 지적진화의 퇴행을 가져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예술과 기술 융·복합에 대한 관심은 기술주도형 사회에 살고 있는 동시대에선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기술을 작품에 수용하면서 동시대 현실에 공감하고 급변하는 예술 환경에 적응하는 예술가가 증가하는 것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하지만 기술은 어디까지나 시대성을 텃밭으로 한 미의식을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에 불과할 뿐 예술의 전부는 아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3-06 14:02:3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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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지역과 문화권력

글로벌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술은 이제 경계를 넘어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이 맞물려 상호작용하고 융합되는 과정 속에 자리한다. 급진적으로 진화하는 예술 개념과 방식, 매체는 장르 간 학제 간 구분 따윈 진작 소멸시켰으며, 기존의 모든 틀마저 해체하고 있다. 여기엔 국가라는 사회집단과 지역이라는 지리적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예술만 놓고 보면 우리는 아직 '지역은 지역'이라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연고주의와 정주주의에 지역의 문화생태계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 권력의 진부한 사고가 배합된 결과다. 어디서나 마주하는 지역주의 망령은 곧잘 예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절대 기준인 예술성조차 배척한다. 지역주의에 기생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잉태한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심사한다고 치자. 어느 지역을 가도 나름 힘 좀 쓴다는 인사들이 한두 명씩 심사위원으로 앉는다. '지역을 가장 잘 안다'(?)는 게 이유다. 물론 자격 여부는 중요치 않다. 동시대미술의 흐름에 둔해도 상관없다. 작든 크든 지역 내 문화 권력이라는 위치는 미술에 관한 전문성마저 뛰어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미술기관에 능력과 무관한 낙하산이 투하되거나, 심도 깊은 논의의 장에 엉터리들이 들어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미술용어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훨씬 전문가인 작가와 작품을 평하는 촌극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이뿐 아니다. 지원금을 주든, 공적 공간에 입주하든 지역에 가면 일정한 수의 관내 작가를 반드시 뽑아야 한다. 지역민들의 세금이니 지역 작가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문화 권력의 입김이 규정이 되고 정책이 된 탓이다. 그 작가들이 공적 예산을 받을 만큼의 역량과 재능을 갖췄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지역작가'라는 네 음절은 남들에겐 엄격한 기준조차 무력화하기에 충분하다. 투명성, 합리성, 공정성, 발전 지향성을 원하는 공공기관들은 괴롭다. 특히 고달픈 건 담당자들이다. 나름의 '카르텔'을 형성해 각종 지원금과 전시기회를 독차지하다시피 하면서도 불만이 생기면 온갖 꼬투리를 잡는 문화 권력을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래도 인내가 최선이다. 만약 지역 내 후배가 어떤 혜택을 받고 선배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기관 대표나 임원 대상으로 별의별 민원을 다 내니 참는 게 상책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게 누구든 소위 예술을 하는 이들이라면 언제나 새롭고 열린 태도를 지녀야 한다. 수구적 지역주의를 넘어 보다 포괄적이고 융합적인 관점을 채택해야 맞다. 또한 지역 내 문화 권력자들이 진짜 해야 할 일이란 지역만 벗어나면 아무 힘도 없는 권력의 알량함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예술가들이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지역이 아닌 대한민국의 작가들이 상호교류하고 협업할 수 있도록 힘쓰는 데 있다. 지역 내 인사들은 입버릇처럼 '지역성'을 말한다. 그러나 문화 권력의 대부분은 지역성과 지역주의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특정 지역의 정체성과 독자성이 지역 이기주의인 것인 양 곡해하곤 한다. 예술에서의 지역성은 하나의 화두이자 연구가 될 순 있어도 문화 권력의 존재방식을 정의하는 건 아니다. 문화 권력은 예술이 지역성을 토대로 창의적인 작품과 경험을 창출하고 예술가들이 보다 넓은 무대로 영역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하는 배경이 돼야 마땅하다. 지금처럼 예술의 가치기준까지 무너뜨리는 지역안배주의를 말하는 건 꽤나 후진적이다. 그 후진성을 알면서도 이어간다면 예술이 지역과 사회, 문화의 진정한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은 허상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2-20 14:16:17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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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가라는 존재

예술가라는 이유만으로도 특별하게 예우한다는 한 국외 이주 작가의 오래전 발언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이 우리네 삶의 질을 높이는 존재로 (예술가들을) 대우하기에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부럽다. 한국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한량(閑良)에 준한다. 사회적 신분은 그저 그렇고 지위 역시 불안정하다. 아직도 누군가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자발적 무직자' 정도로 본다. 가난하게 살면서 쓸모없는 일을 하는 부류로 단정하기도 한다. 가난한 건 맞다. 남들의 두어 달 월급이 연간 수입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는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술인 실태조사'(2021년, 14개 예술 분야 5000명 대상) 결과에 따르면 월 평균수입이 100만원 이하라고 응답한 예술인이 86.6%에 달했다. 연간 평균 수입이라야 755만원에 불과했다. 가난한 건 분명하나 예술가들이 넋 놓고 있는 건 아니다. '스타벅스'엔 감히 갈 수 없으나(국민의힘 한동훈·장예찬과 같은 천박한 계급주의자들의 말에 의하면 연소득 4500만원 이하의 서민이 스타벅스를 이용하는 건 사치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 무던히 애쓴다. 겸업이 보편적일 만큼 두세 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작품을 팔기 위해 고심한다. 예술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비즈니스를 공부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며 머릴 싸맬 때도 있다. 녹록하지 않다. 누구나 제프 쿤스(Jeff Koons)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돈 좀 벌겠다고 미술시장을 기웃거리지만, 괴롭다. 미적 신념은 무너지고 심적 체제의 붕괴를 느낀다. 부유층의 취미와 기호에 부응하는 형식주의에 빠진 채 예술의 허위성을 찬양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환멸까지 인다. 당장 해결해야 할 민생고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현실은 쓰다. "팔기 위해 만들지 말고 만든 것을 팔아야 한다."는 말은 야속하다. 예술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실질적인 위협으로서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나'라는 정체성마저 혼란스럽게 만든다. 모든 게 어렵다. 선택은 쉽지 않다. 예술가로서의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병행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예술가들은 예술을 한다. 베짱이 같은 존재라고 폄하해도 그림을 그리고 작업이란 것을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따라, 알 수 없는 이유로,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일부는 예술이 다른 분야처럼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유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이 인간의 경험과 감정,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예술가의 인격과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는 창조적 활동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과 쓸모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안다. 예술가는 역사와 사회적 변화를 기록하는 존재다. 기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문화와 사회의 진화에 기여한다. 그들의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 자체로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인 문제에 대한 논평이자, 인류사에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토론을 촉구하는, 대화와 변화의 촉매제다. 이처럼 예술가는 문화적, 정서적, 지적 발전에 필수적인 통찰력을 제공하고 인간 경험의 풍부함과 다양성에 도움을 준다. 작품을 통해 구성원 간 공감과 연결을 촉진하면서, 경제의 중요한 기여자로서 위치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린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꽤나 중요한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자긍심과 보람을 갖도록 독려해야 옳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2-07 13:43:42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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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상품과 작품

상업미술작품의 지향점은 명확하다. '돈'을 버는 것이다. 생산의 목적도 이익이다. 따라서 대중의 취향과 선호도를 중시한다. 미술이 인류 공통의 문제에 어떠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는 관심 영역이 아니다. 어떻게든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고 구매 욕구를 자극해 '지갑'을 열도록 하면 그만이다. 상업미술작품은 기능성과 효율성을 따진다. '화폐'로 치환해야 할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장식적이다. 색채와 구성 역시 시각적 화사함을 지닌다. 앙증맞은 캐릭터와 귀여운 동물 형상이 곧잘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여기엔 그래야만 대중이 좋아할 것이라는 나름의 판단이 개입돼 있다. 상업미술작품은 엄밀히 말해 '상품'이다. '작품'은 문화 공공재로서 예술성을 추구하고 감동이나 영감을 주는 반면, 상품은 시각적 만족감이 먼저다. 작품은 예술가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독창성을 중시하지만, 상품은 시장이 원하는 일정한 규격과 방식 아래 존재한다. 상품의 가격은 마켓(Market)의 수요와 공급, 생산 비용, 소비자 취향 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상징적 재화인 작품의 가격은 '사회적 의사표시로서의 미술'의 경제성에 맞춰진다. 일반 경제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다. 작품은 사회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예술가의 정신으로 세계를 탐구한 결과이다.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당대 환경에 가장 적합한 모더니티를 구축하기 위한 '논의의 매개'이기도 하다. 단순히 목적 없는 쾌락인 '미(美)'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질문과 자문이 교통하는 가교인 것이다. 상품은 그렇지 않다. 실체보다 외관을 강조함으로써 피상성과 소비주의 문화에 기여한다. 사회 전반의 문제와 대면한 채 현실의 삶에 참여하는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미학적·미술사적 혁신과도 무관하다. 사실상 돈 있는 자들의 기호에 의존하고 순응하는 것이 전부다. 이처럼 상품과 작품은 가치와 의미, 역할 면에서 판이하다. 서로 다른 목적에 봉사하고, 서로 다른 의도에 의해 추진되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치가 매겨진다. 하지만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술전문가라는 사람들마저 매력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것과 공동체의 삶과 커뮤니티의 정체성, 사회적 현상을 투영하는 작품을 분별하지 못한다. 심지어 일부는 장터에서의 인기가 미술의 척도라고까지 생각한다. 소비중심주의적인 상품을 '시대 흐름'의 주체로까지 해석한다. '트렌드'와 등치시키며 말이다. '시대 흐름'과 '트렌드'는 개념에서 양자 간 간극이 있다. 전자가 한 시기에 걸쳐 일어나는 광범위하고 총체적인 움직임이라면, 후자는 일시적이며 특정적인 대중의 선택, 찰나의 유행, 스타일에 국한된다. 그 둘을 동일 선상에 놓는 건 무리다. 트렌드가 시대 흐름을 이끄는 전위(前衛)란 어불성설이다. 그럴 수도 없다. 상품은 상품이고 작품은 작품이다. 물론 상품일지라도 고유성, 비동일성을 지닌다면 그 또한 작품이 될 수 있다. 작품으로 출발했으나 상품에 불과해지는 경우도 없진 않다. 경계가 불분명해진 오늘날 더욱 그렇다. 더구나 시대에 따라 미술의 의미도 바뀐다. 다만 어떤 시대가 됐던 작품은 당대성이라는 화두를 놓은 적이 없다. 상품은 그때그때 취향 공동체에 읍소하며 잘 팔면 됐다. 특히 작품은 사회 발전을 향한 담론 형성, 건강한 방향을 촉진해왔지만, 상품은 단지 자신의 이익이 다였다. 상품과 작품을 혼동해선 안 된다. 비록 자본주의에 의해 작품의 지위가 모호해지고 예술사 외 시장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생존을 다퉈야 하는 처지가 됐어도 본질은 불변한다. 여전히 상품은 상품이고 작품은 작품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1-23 11:03:15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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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측근 심기'가 상식이자 정상인 사회

미술인들의 다수는 미술관장이 되는 방법으로 학연과 지연, 연줄, 처세 등을 꼽는다.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능력은 기준이 아니다. 그러니 누가 봐도 미술관장에 부합한다고 평가받는 인사들은 아예 지원조차 하지 않는다. 투명하고 객관적인 절차로 선임된다는 믿음 따윈 없다. "어차피 내정되어 있을 텐데"라는 인식이 크다. 그리고 이는 대체로 사실이다. 실제로 검증된 전문성과 무관한 인물이 정치권력 혹은 지방자치단체장과의 '친분' 덕분에 관장자리를 꿰찬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가족끼리 잇따라 관장직을 '세습'해 논란의 중심에 서거나 후보에서 탈락한 이가 임면권자와 같은 계열이라는 이유로 기사회생한 후 관장에 선임된 예도 있다. 전 직장에서 심각한 물의를 일으킨 인사가 다른 미술관장으로 영전한 경우도 똑같다. 최근 불거진 대구미술관장 선임 잡음도 그 연장이다. 지난 1일 취임한 노중기 관장은 홍준표 대구시장과 고교 동기다. 전시 기획이나 기관 운영에 대한 경험이 없다. 많은 이들이 전문성과 행정력에 의문을 갖는 이유다. 더구나 그는 지난해 8월 막을 내린 대구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 전시 중이던 일부 작품을 떼곤 홍 시장의 초상화를 내걸어 도덕성 시비에 휘말린 바 있다. 미술인들은 지난 2일 <대구광역시 대구미술관 관장 선임에 대한 미술인 항의 성명>을 냈다.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이 없고, 부도덕한 단체장이 친분을 내세워 독재적이고 상식 이하의 인사를 했다"며 대구시를 비판했다. 대구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측근 챙기기, 시정 사유화"라고 주장하며 노 관장의 자진 사퇴와 임명 철회를 주문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2022년 7월 1일 취임식에서 "오랫동안 대구를 지배했던 수구적 연고주의와 타성에서 벗어나 더 개방되고 자유로운 자세가 중요하다"며 "혈연과 학연, 지연에서 벗어나 능력이 검증된 유능한 인재를 모시겠다"고 했다. 지난해 12월엔 "대구시정 전반에 만연한 기득권·부패 카르텔을 깨야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번 관장 임명 건으로 그의 발언은 단지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자신이 만든 '학연 카르텔'로 인해 결국 홍 시장 본인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것을 시인한 꼴이 됐다. 이와 관련해 오정은 미술평론가는 지난 1월 4일 블로그에 올린 '카르텔 속 미술관 관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시장의 초상화를 그려 그 시장 산하에 있는 미술관에 전시한 화가가 얼마 뒤 미술관 관장으로 임명된 것은 상식 수준을 벗어난다"고 꼬집었다. 다른 글에선 "시민을 위한 공공성보다는 특정 정계 인사와의 친분을 드러내고, 전문성을 무시한 채 재편되는 관료 조직의 위압을 보여준 미술관"이라며 개탄했다. 그러나 "국공립미술관의 임원직이라면 관련 경험 등 납득할 만한 근거하에 채용과 인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오 평론가의 바람은 공허한 메아리인 게 현실이다. 언제부터인가 갖가지 연(緣)에 의한 측근 심기가 상식이자 정상인 것처럼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정부, 지자체를 불문한다. 미술관장뿐만도 아니다. 지역문화재단 대표나 박물관장 자리 등도 매한가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젠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회가 바른 사회인 냥 비춰질 정도다. 어쩌다 세상이, 문화예술계가 이 지경이 됐을까.■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1-10 14:17:4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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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문화민주주의’의 후퇴 속 저무는 한 해

한 해가 저문다. 하지만 전년 대비 달라진 건 없다.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윤석열은 대통령이다. 아직 3년 반이나 남았다. 희한하게도 유독 이 부분에서만 시간이 더디다. 느린 세월의 유속만큼 다양한 일들이 있었으나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건 있다. 바로 지난해 9월 UN총회에서의 '바이든 날리면' 의혹과 16번의 해외 순방 동안 약 600억원을 비용으로 지출했다는 것, 그리고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논란 등이다. 관계개선을 명분으로 한 일본에 대한 일관된 저자세와 과거사 '퍼주기' 정책도 상기할만한 장면이다. 이 중 '바이든 날리면'은 또다시 청각테스트를 해야만 하니 그냥 넘기자. '김건희 특검법'이 발의된 직후 발생한 윤 대통령의 아내 김건희의 '명품백' 수수 사실도 지나가자. 수해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지난 7월 두 번째 나토 순방에서조차 경호원과 수행원 16명을 대동하고 명품숍에 들릴 만큼 '명품'에 남다른 애착을 지닌 그다. 짚어봐야 할 것은 해외순방이다. 윤 대통령은 약 1년 반의 임기 동안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며 전 세계를 누볐다. 순방 비용은 올해 책정된 예산 249억원을 다 쓰고도 모자라 예비비 329억원까지 추가로 끌어 썼다. 같은 기간 이명박과 문재인 전 대통령도 비슷한 횟수로 해외에 나갔지만 순방비는 윤 대통령이 역대 최대다. 문제는 순방 효과다. 일각에선 막대한 경제 성과를 말하지만 많은 수가 '가계약'(양해각서, MOU)이다. 그 사이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65조원가량 줄었고, 윤 대통령이 진두지휘한 부산엑스포(2030세계박람회)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패하며 막을 내렸다. '잭팟' 운운하던 폴란드 방산수출도 무산될 처지에 놓였다. 그 외에도 많다. 외교적 성과가 거의 없거나 가성비가 최악이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의 외교 개념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이다. 지난해엔 16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태원 압사 참사가 있었다. 정부는 예방과 대비,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12월 현재까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찾아볼 수 없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노동자로 일하다 숨진 김용균 씨 사건도 마찬가지다. 24살의 청년이 작업 중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으나 원청 기업 대표를 비롯해 관련자 중 실형을 선고받은 이는 아무도 없다. 언제나 그러했듯 대한민국엔 피해자만 있다. 작년이나 올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또 있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대치적 대북 상황, 물가상승과 성장률 둔화, 고금리에 따른 경기침체는 현재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없다. 그만큼 올 한해 서민들의 삶은 버겁고도 퍽퍽했다. 미술계는 어떠했을까. 미술 시장의 침체를 빼면 1년 전과 대동소이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유인촌이 다시 문체부 장관으로 컴백했다는 것과,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새롭게 선임돼 업무에 들어갔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이점은 발견하기 어렵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광주비엔날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등 여러 국제행사가 의무적으로 치러졌으며 두 번째 한국을 찾은 프랜차이즈 아트페어인 영국의 '프리즈'는 또 한 번 '대박'을 터뜨리며 돈을 쓸어갔다. 하지만 지난해와 다를 바 없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위기에 있다. '땡윤 뉴스'의 부활은 5공 시대로의 회귀를 떠올리게 하고 언론사들에 대한 검찰의 빈번한 압수수색은 이제 새로운 뉴스거리도 아니게 됐다. 전문성 없는 '친윤 검사'의 방송통신위원장 내정은 언론 장악을 위한 포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풍자한 전시에 참여한 예술인만 특정해 정부 지원금 수령 내역을 뒤지는가 하면 국회 전시 예정이었던 정치 풍자 미술 작품 기습 철거,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 가수 이랑 공연 배제 등 통제와 표현의 자유 침해는 이미 일상으로 들어와 있다. 그만큼 문화민주주의도 후퇴하고 있다. 그 후퇴의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2-12 13:14:22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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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죽음과 탄식의 강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에는 '쾌락의 정원'(Garden of earthly delights)이라는 걸작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Hieronymus Bosch)가 15세기경 나무판 위에 유채로 그린 세 폭짜리 제단화(Triptych)다. 바로크 시대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작품 '시녀들'(Las Meninas), 그리스 신화 속 세 여신을 그린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삼미신'(The Three Graces) 등과 함께 프라도를 대표하는 주요 작품이다. 대 피테르 브뤼헬(Pieter Bruegel the Elder)의 '뒬러 흐릿'(Dulle Griet) 등의 작품에서처럼 여타 미술 흐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쾌락의 정원'은 괴이하고 난해하며 신비롭다. 몽환적인 구성과 분위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과 상상력을 촉발한다. 특히 수만 가지 욕정과 욕망, 타락의 징후들을 하나로 모아 놓은 장면에선 시각적 흥미로움과 더불어 인간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세 개의 그림 중 가장 왼쪽은 '낙원'이다. 선악의 구분 없는 에덴동산(Garden of Eden)이 배경이다. 주인공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이들을 축복하는 창조주다. 작품 위 호수를 비롯한 초현실적인 풍경은 이상세계(Utopia)를 나타내며 신을 중심에 둔 두 인물은 그 자체로 인간의 기원이자 정욕의 절제 및 출산을 통한 성의 순수성, 건강한 생명성을 통한 아름다운 인간사를 말한다.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중간그림은 '현실의 쾌락'을 다룬다. 그림 속 인간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비유기적 물체들과 암흑을 상징하는 올빼미 등의 각종 짐승들에게 둘러싸여 난잡한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유혹과 방탕함이 하나로 뒤섞인 아수라장 속에서 향락을 즐기느라 정신없다. 그림 곳곳에 식욕, 육욕, 죄악이 가득 차 있다. 맨 오른쪽 그림은 앞선 이야기의 결말이다. 타락과 방종의 인간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저울'은 인간의 죄를 잰다. 짐승들은 사람들을 괴롭힌다. 어떤 것은 사람을 하나씩 잡아먹은 후 기포에 가둔 채 생지옥이랄 수 있는 아래 구멍으로 내려보낸다. 또 다른 것은 사람을 꼬치처럼 꿰어 나른다. 향락에 찌든 사람들은 몸이 잘리고 찔려 혼비백산한다. 이제 낙원에서의 인간은 온데간데없다. 추하고 고통스럽다. 당시 그림의 주제는 대부분이 '권선징악'이었다. 주로 계몽, 선도, 교화, 파종의 목적으로 쓰였다. 낙원과 인간계, 지옥을 순차적으로 형상화한 '쾌락의 정원'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 지침도 같다. 탐욕과 교만은 죄를 짓는 것이요, 도덕적·윤리적·종교적 가치에 반하는 무분별한 행위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원인임을 '경고'한다. 하지만 보슈의 경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인간은 여전히 탐욕의 바벨탑(Tower of Babel)을 쌓고 있다. 탐욕의 상징인 '돈'에 정신과 마음을 뺏긴 채 살아가며, 허세와 '오만'도 넘친다. 쾌락을 추구하는 무절제하고 감각적인 '욕망' 역시 끝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단테의 《신곡》(La commedia)에 나오는 인간 '악의 본성'으로 갈음된다. 악의 본성은 현실에 만연해 있다. 온갖 이유로 자행되는 '전쟁'이라는 이름의 학살, 이타성을 상실한 갈등과 대립, 일상에서조차 빈번한 유무형의 폭력이 그렇다. 그 본성은 무능하고 파렴치한 정치, 진영에 따라 양심과 정의의 온도마저 달라지는 위정자들, 태만하나 권력욕에 눈이 먼 어용 지식인들의 난립, 불평등과 부조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욱 짙어진다. 하지만 저항은 없다.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할 이성과 철학이 들어설 자리도, 모든 질병의 치료제인 사랑도 없다. 그렇게 우린 다 같이 저승을 감싸고 흐르는 죽음과 탄식의 강 아케론(Acheron)을 건너 모든 희망이 사라진 깔때기 모양의 지옥으로 향하는 중이다. 점점 더 청동으로 된 지옥문을 향해 속도를 내고 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1-29 13:44:11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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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레지던시'의 위기

레지던시(Residency)는 예술가들이 예술창작 공간에 일정 기간 거주하며 작품 활동과 국내외 예술 교류, 전시, 학술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제로 한 프로그램을 뜻한다. 작가들은 1년 안팎의 입주 기간 동안 전문 인력의 조력과 작업실, 제작 비용, 설비, 시설 등을 지원받는다. 국내 최초의 레지던시는 1995년부터 개관한 광주광역시의 '팔각정스튜디오'다. 공원관리실을 개조해 사용했다. 2008년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창작스튜디오 정책이 본격 전개되면서 현재는 200여개의 공사립 레지던시가 운영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대표적인 레지던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문화재단의 금천예술공장, 인천문화재단의 인천아트플랫폼 등이다. 서울문화재단의 서교예술실험센터와 신당창작아케이드, 부산문화재단의 홍티아트센터, 청주시립미술관의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대전문화재단의 테미예술창작센터도 주목받는 레지던시에 속한다. 이 중 인천아트플랫폼은 레지던시를 통해 예술가의 존재 및 창작 활동에 대한 인식과 가치의 사회적 '공유'에 앞장서 왔다. 15년 가까이 예술인 역량 강화, 국제 교류, 지역민 대상 예술 교육 등을 진행하며 낙후된 원도심을 새롭게 변모시킨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인천의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특성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를 높이고 창작 활동에 반영할 수 있었던 '리서치투어'를 포함해, 문화예술 활동으로 평화도시로서 인천과 서해 5도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가고자 마련된 '백령도 평화예술 레지던시' 등은 플랫폼만의 색깔 있는 기획으로 꼽힌다. 하지만 인천아트플랫폼은 현재 존립 위기에 직면했다. 인천시가 플랫폼의 주요 목적 사업인 레지던시 기능의 잠정 중단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의 공론화 과정조차 없었고 대체할 공간 또한 마련하지 않은 채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계는 사실상의 폐지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인천아트플랫폼 외에도 레지던시 기능을 중단하거나 시설 자체를 없애는 기관이 늘어나면서 지난 30여 년 동안 지역민의 거점 공간이자 예술인 등용문으로 인정받아온 제도 자체가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우연인지 흐름인지 헤아리긴 어려우나 창작공간 생태계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는 형국임엔 틀림없다. 실제로 지난 4월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이 운영을 맡았던 대구 1호 레지던시인 '가창창작스튜디오'가 문을 닫았다. 2009년부터 지역 예술단체 및 예술인, 시민단체의 자발적 참여로 홍대 앞 예술생태계 활성화에 기여해온 서교예술실험센터도 운영 종료 수순을 밟고 있다. 경기문화재단의 경기창작센터는 2021년 레지던시 입주작가 공모를 취소한 이후 운영을 멈춘 상태다.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역시 현 부지에 제2문학관을 건립하기로 하면서 지속성이 불투명해졌다. 이 밖에도 국내 주요 레지던시로 꼽히는 곳들마저 인력과 예산을 대폭 축소하는 추세다. 이에 미술계는 '정리'의 전 단계가 아닌지 우려한다. 저변을 넓혀가고 있는 'K아트' 바람에 역행하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레지던시의 본질은 창작 진흥이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거푸집으로, 주민의 문화적 질 향상과 사회문제 해결 및 사회통합을 위한 담론 구축에도 크게 기여해왔다. 특히 사회적 창의성을 비롯한 미적 다양성 확대에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만큼 레지던시의 의미와 가치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뿐더러, 오랜 시간 한국 예술 창작의 기본 토대가 돼 왔다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존립 여부의 '키'를 쥔 일부 정책 실행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레지던시를 다다익선식 성과주의가 결합된 행정 사업의 연장으로 본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를 밀어낸 자리에 스타벅스 입점을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은 인천시의 사례처럼 산업 영역에서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우선한다. 레지던시의 위기도 여기서 비롯된다. 문화예술에 대한 몰이해와 천박한 가치관을 지닌 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레지던시의 앞날은 밝지 않다. 아니, 건강한 문화예술의 미래를 기대할 수가 없다. 해결 방안은 결국 문화예술에 관한 올바른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지자체장을 잘 뽑는 것뿐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후진국으로 향하고 있는 작금의 나라 꼬락서니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투표의 중요성을.■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1-16 13:03:29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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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건축물미술작품제도' 폐지가 답이다

한국엔 '건축물미술작품제도'라는 게 있다. 이 제도에 따라 1만㎡ 이상 건축물을 신축 및 증축할 경우 건축주는 의무적으로 건축비용의 일정 금액(0.1~1%)을 회화, 조각, 공예 등의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 작가들의 생존권 보장과 도시문화 환경 개선, 생활공간의 질적 수준 제고 등의 명목으로 만들어졌다. 1972년 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을 모태로 한 이 제도에 의해 전국 곳곳에 세워진 공공미술작품(조형예술품 포함)만 2만여 개를 웃돈다. 적게는 개당 1000만~2000만원에서 많게는 10억원이 넘는다. 모르고 지나쳐서 체감이 안 될 뿐 사실상 우리 주변에 '돈 덩어리'가 즐비하게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제도, 비리와 부정의 온상이다. 리베이트가 보편화돼 있어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작품 하나 설치하려면 작가는 매개 업체에 대략 30%를 떼 줘야 한다. 이면계약을 통해 건축주에게 제작비의 절반 내외를 되돌려주는 것이 관행이다. 작가는 산출가의 절반값에 작품을 만들어야 하고, 작가로부터 받아 꿍친 돈은 불법 비자금이 된다. 대다수의 작가는 제도의 혜택과 거리가 멀다. 전문 대행업체와 소수의 작가들이 독점하다시피 하니 기회도 적다. KBS의 최근 보도에서처럼 그나마도 발주자인 건축주가 특정 작가를 노골적으로 밀어주거나 작가로서의 경력도 없는 오너의 친인척 작품까지 구입하는 부조리가 팽배하다. 전문가인지 의심스러운 자들이 앉아 있는 심의위원회는 있으나마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설치된 작품들은 대개 눈 뜨고 못 볼 수준이다. 아파트를 포함해 거리에 있는 높은 빌딩 앞 조악하거나 흉물스러운 작품들의 다수는 심미적 환경 조성이라는 제도의 본래 목적과 상관없다. 이런 현실에서 공공재로서의 건축물미술작품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정부는 건축물미술작품제도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2011년 도입된 '선택적 기금제'가 대표적이다. 건물에 직접 미술품을 설치하는 기존 방식과 더불어 설치비용의 70%를 문예진흥기금으로 출연할 수 있도록 이원화한 것이다. 하지만 기금제를 선택하는 건축주는 얼마 되지 않는다. 원인은 사유재산 확보 차원에서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건축주들의 고정된 의식에 있다. 다시 말해 건축물에 작품이 들어서면 건축물의 가치가 올라가고 그곳에 설치된 작품은 자기 것이 되지만 기금출연은 그냥 내버리는 돈처럼 여기는지라 건축주들이 기금제를 잘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은 환원 요율도 기금제 선택을 꺼리게 한다. 기금제를 이용할 경우 미술작품을 직접 설치할 때 비용의 100분의 70만 납부하면 되나, 이면계약 등을 통해 그보다 훨씬 낮은 예산으로도 설치가 가능하다. 이는 기금제에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는 실질적인 이유다. 혹자는 건축물미술작품제도의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현명한 해법은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다. 그동안 별별 수를 다 써봤지만 소수의 업체와 거간꾼들의 배만 불리는, 백약이 무효한 제도임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동시대 공공미술의 흐름과도 동떨어진 낡은 제도라는 사실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로 처음 도입된 1970년대는 어땠을지 몰라도 현재로선 현장과 동떨어진 몹쓸 제도다.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남는 것 없어도 당장의 민생고 해결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작품을 만들어야만 하는 작가는 당연하고, 거지발싸개 같은 작품들을 매일 봐야 하는 시민 모두에게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 특히 어째서 사유재산을 미술품에 사용하라고 강제하는지 이해 못 하는 건축주에게 당신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곧 국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확대시키는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강조한들 그들이 과연 얼마나 공감할까. 역시 폐지가 답이다. 그래도 꼭 필요하다면 아예 '의무기금제'로 바꾼 후 그 돈으로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는 게 낫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1-01 11:10:1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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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하기 어려운 시대

당대 예술 환경 중엔 몹쓸 것이 많다. 예술 검열도 그 중 하나다. 최근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풍자한 전시에 참여한 예술인만 특정해 정부 지원금 수령 내역을 뒤져 파문을 낳았다. 여당 대표가 한 가수를 찍어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고등학생이 그린 만화 '윤석열차' 논란은 표현의 자유가 대한민국에 과연 존재하는지를 되묻게 하는 예였다. 예술 검열은 예술가의 창의성과 작품의 다양성을 제한한다. 또한 예술가의 자기검열을 심화시킴으로써 제한 없이 이뤄져야 할 창작 활동 자체를 위축시킨다. 수십 년간 투쟁해 얻은 '말할 수 있는 권리'까지 흔드는 행위라는 점에서 일련의 검열 사건은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문공부 국장이 촬영현장까지 찾아와 양주를 마시며 시시콜콜 검열하던 영화 '거미집' 속 1970년대와 현재가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도긴개긴이다. 위의 사례에서처럼 지금도 예술 검열은 전방위적으로 교묘히 지속되고 있으며, 정부와 기관에 비판적인 예술인을 배제하는 일도 이어지고 있다. 환경이 고약하면 어디 기댈 곳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편가르기식 이념에 찌든 어용지식인 집단을 비롯해 미술인들의 권익을 위한다며 별의별 단체가 존립하고 있으나 대개는 자질과 전략, 현실감각이 부족하다. 그런 그들에게 어떤 희망적 대안을 기대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대한민국의 주요 정책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 그런데 장관 운이 없다. 그것도 지지리 없다. "나랏돈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말이 되나."(8월 28일, 조선일보)라며 공공지원을 볼모로 예술가들을 길들이고 사상을 정화하겠다는 유인촌 같은 사람이 문체부 장관이 되는 시대라서 그렇다. 이런 상황에선 제아무리 깨어있는 눈과 정신으로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말한들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예술가들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건 성공의 정치다. 미술을 통한 의미적 담론생산은 옛말이다. 그저 어떻게 하면 미술로 돈을 벌 수 있을까를 고심하지만 사회적 의사표시로서의 미술의 경제성이 곧 미술품의 가격이고, 그것의 생산 및 소비순환 방식이 예술경제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미술판이 부르주아 계급의 놀이터가 되고 미술이 그들의 고급 장난감으로 전락하는 양상과 더불어, 부의 축적만 이루면 된다는 양 아무런 책임감 없이 '상품'을 생산하는 데 열중하는 예술가들을 보면 안타깝다. 조변석개하는 취향 군락에 의지해봤자 10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점에서 딱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뭔 의견이라도 내놓을라치면 정치·제도 권력이 언제 어느 때 목을 조여 올지 알 수 없는데다,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급급한 경제현실이다 보니 유무형의 올가미를 피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개인을 나무랄 순 없다. 결국 이래저래 예술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럼에도 명성의 박제화와 성공의 정치 사이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묵묵히 세상을 기록하고 낭독하는 작가들이 있다. 정치적·사회적 관계망에 거주하는 인간들이 겪는 삶의 냉혹함을 통찰하고 생존자들을 위로하며 당대 긴급한 문제들을 표상화하는 이들이다. 마침 순천의 문화공간인 '기억공장 1945'에서는 10월 26일까지 박치호 작가의 초대전이 이어진다. 서울의 '정문규미술관'은 같은 날부터 한 달 동안 김재홍 작가의 초대전을 연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관람하길 권한다. 동시대 정치와 문화, 사회, 정서를 관통하는 예술가들의 강력한 '논평'을 만날 수 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0-18 11:58:2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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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저항' 상실한 한국의 비엔날레

지난 달 1일 청주공예비엔날레와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일제히 개막했다. 같은 달 7일에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막을 올렸으며,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와 대구사진비엔날레도 21일과 22일 각각 문을 열었다. 오는 14일에는 지역 환경을 반영한 미술축제인 부산바다미술제가 약 한 달간의 여정에 들어간다. 비엔날레(Biennale) 홍수다. 서울, 광주, 부산, 대구, 창원, 청주 등 웬만한 지방자치단체치고 비엔날레 하나 없는 곳 없다. 전 세계 200여개의 비엔날레 중 거의 10% 이상을 차지할 만큼 한국은 비엔날레로 넘친다. 가히 '비엔날레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수만 많지 동시대미술의 실험실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비엔날레는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부분 예술의 기능과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장(場)과도 거리가 멀다. 글로벌 흐름 속에서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타진하고 문화적 맥락에서의 담론 생성에 얼마나 혁신적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한국의 비엔날레는 고유의 정체성이 약하다. 그냥 일정한 주기마다 한 번씩 열리는 관 주도형 행사다. 시기는 겹치고 주제 또한 유행에 부합한다. 2018년엔 비엔날레에 '북풍'이 불기도 했다. 당시 국정 키워드는 북한이었다. 최근엔 너도나도 기후, 재난, 여성, 이주, 소수자, 난민, 팬더믹(pandemic) 등을 꺼내놓고 있다. 그러니 내용도 거기서 거기다. 새로운 스타 및 작가 발굴의 플랫폼으로서 기능은 제대로 할까. 그렇지 않다. 외국 작가들이 참여하지만 국제행사에 부합하기 위한 장치일 뿐 지역작가 안배주의가 만연하다. 비엔날레급이라고 볼 수 없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은 외국인 감독이 비엔날레를 맡아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비엔날레란 자신만의 카르텔을 더욱 견고히 하는 세(勢)의 무대이자 더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한 '포트폴리오'인 경우가 많다. 이 밖에도 억지로 녹여내는 지역성과 나열에 그치는 전시 형식, 어설픈 관객 참여 프로그램 등도 문제로 꼽힌다. 비엔날레가 문화기반시설처럼 변질되자 대중은 물론 전문가들의 관심도 저하되고 있다. 실제 많은 이들은 이제 광주비엔날레보다 프리즈 아트페어(Frieze Seoul)와 같은 대형 상업전시에 주목한다. 미술계 헤게모니마저 아트페어가 주도하는 형국이다. 세계 유수의 국제 미술행사들은 제도화된 미술관 기획전이나 여타 상업전시에서 볼 수 없는 전위적·도발적인 작업들로 채워진다. 실험성을 텃밭으로 한 미술 담화의 생성과 미적이고 사회적인 공론의 성취를 중시한다. '100일간의 저항'으로 불리는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가 대표적이다. 낡고 관습적인 언어에다 편향성 내에서조차 주류가 지배하는 베니스비엔날레(la Biennale di Venezia)가 아니다. 비엔날레는 제안하고 투쟁하는 공간이다. 인류가 처한 다양한 문제를 번역 및 공론화하며 새로운 방향의 제시를 존립의 목적으로 한다. 궁극적 목표는 전시에서 받은 자극이 일상에서 실천될 수 있도록 상호 소통하는 것에 있다. 비엔날레의 건강성은 미술 언어로 우리 사회의 모더니티를 적시하며, 미래 지향적인 문화적 토론을 통해 지구촌 공동체의 삶을 변화시키는 에너지 유무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한국의 비엔날레들은 내수용인 도쿄 비엔날레(Tokyo Biennale. 9.23-11.5)보다도 못하다. 세계 5위니 뭐니 하며 자화자찬하지만 내 보기엔 베니스비엔날레 아류인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대개의 비엔날레형 국제행사들은 파괴적·혁명적·문화적 논쟁의 길을 포기하고 있다. 대신 미술이란 장르를 조각, 건축, 미디어, 수묵, 공예, 공공미술, 서예 등으로 세세히 쪼갠 분야별 지역 미술행사로 전락하는 중이다. 이것도 나름 변별점일까. 글쎄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0-04 11:40:0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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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행정의 벽

김구림의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24년 2월 12일까지 이어진다. 당대 최고의 실험미술가로 꼽히는 작가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다. 1960년대 초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회화, 퍼포먼스, 전자예술, 비디오아트 등이 고루 출품됐다. 작품 수만 230여점에 달한다. 지난 7일엔 어느 한 장르로 귀속되지 않는 작가의 동시대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공연을 새롭게 구성해 주목을 받았다. 김구림이 직접 연출한 이 공연에는 영화와 무용, 음악, 연극을 잇는 4개 파트 70여명의 공연단이 함께 했다. 특히 마지막 파트인 연극 '모르는 사람들'에는 작가가 직접 출연해 동일 언어 속 불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를 은유함과 동시에 세월을 초월한 현역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 많은 이들의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구순을 바라보는 김구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전시는 아쉬울 수 있다. 비좁은 공간에 작품을 다닥다닥 늘어놓는 수준에 그친 전시 구성(그가 남긴 아방가르드 유산에 대한 탐구 따윈 찾을 수 없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를 실망시킨 건 자신의 마지막 개인전이 될지도 모를 전시에 꼭 선보이고 싶었던 작품들을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실제 그는 개막식이 열린 지난 달 24일 "아방가르드(전위)한 것이 하나도 없어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고리타분한 것들만 늘어놨다"며 행정 규제 등으로 자신의 주요 작업을 재현하지 못한 데 대한 분노와 섭섭함을 밝혔다. 김구림이 그토록 시도하길 원했던 작품은 광목천으로 건물을 감싸는 '현상에서 흔적으로'이다. 그러나 미술관의 반대에 부딪혔다. 등록문화재인 미술관 외벽에 작품을 설치하려면 타기관과의 협의 등이 필요한데 물리적으로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 서양 근대 모더니즘 양식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본관은 2008년 7월 등록된 문화재 375호이다. 등록문화재에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선 문화재보호법과 그 밖의 관련 법규 등 종합적 검토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일반 건축물이 아니다 보니 여러 절차와 시간이 소요됨이 사실이다. 다만 등록문화재는 현상변경이 원칙적으로 금지된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규제가 적다. 외형을 보존하되 '활용'에 방점을 둔다. 또 다른 등록문화재인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나 구 벨기에 영사관을 리모델링해 사적 제254호로 지정된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도 마찬가지다.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건축물에 어떤 손상도 주지 않는다. 천만 감는 것이지 나사 하나 사용할 일이 없다. 의지만 있다면 등록문화재의 현상변경 신고에 해당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행 가능성을 고민해 볼 수도 있었고, 내년 2월 마무리되는 8개월의 전시기간 동안 실현 가능하도록 대안을 찾는 등의 적극적 소통이 있었다면 작가의 섭섭함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행정의 벽은 높았다. 끝내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재현되지 못했다. 작가가 원할 경우 오래된 건물의 벽을 허물거나 문화유적을 비롯한 미술관 건물의 주추가 드러나는 작품까지 허용하는 외국과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원형에 손상이 가지 않는 한 창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한다. 우린 다르다. 행정이 예술을 앞선다. 균형도 아니다. 무조건 우위다. 미술관은 동시대성이 반영된 혼돈의 실험실로, 오브제로, 작가들의 자율성을 간섭하지 않는 탈규제의 공간이 돼야 하지만 갑갑한 행정은 미술관도 예외 없다. 의식 있는 기획자, 작가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한다. 심지어 예술의 창의성마저 행정의 일부로 귀속시킨다. 이는 국공립미술관 모두 같다. 건조한 행정은 미술의 진보를 가로막는 한국미술 발전의 최대 걸림돌이다. 김구림의 불발된 작품이 의미하는 것처럼 관에 집어넣어야 할 대상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09-20 13:54:33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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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죽 쒀서 남 줬던' 키아프, 올해는 다를까

한국화랑협회가 주관하는 국내 최고의 아트페어인 '키아프 서울'(Kiaf SEOUL)과 영국의 프랜차이즈 페어인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이 9월 6일부터 10일(프리즈는 9일 폐막)까지 코엑스 전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올해로 제22회를 맞는 키아프는 이번 행사에 국내 갤러리 약 140개를 포함한 20여개국 약 210개 화랑을 통해 1300여명의 작가 작품을 소개한다. 독일 디 갤러리를 비롯해 최근 용산에 둥지를 튼 일본의 화이트스톤 갤러리 등이 외국 화랑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프리즈에는 전년과 비슷한 국내외 120여개 갤러리가 출사표를 던졌다. 가고시안, 하우저앤워스, 페이스, 데이비드 즈워너, 화이트큐브, 타데우스 로팍을 포함 세계 정상급 화랑들이 대거 포진했다. 밀레, 피카소, 폴 세잔, 앙리 마티스, 루치오 폰타나, 루시안 프로이트, 에곤 실레 등 서양 거장들의 작품도 마스터스 섹션에서 만날 수 있다. 두 개의 아트페어를 같은 공간에서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에 관람객들의 반응은 뜨겁다. 8만원에서 25만원까지 하는 입장권도 불티나게 팔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김구림 전, 리안갤러리의 이강소 전, 아트선재센터의 서용선 전, 구띠갤러리의 김종숙 전 등 페어 개최 기간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이벤트도 많다. 하지만 한 지붕 두 행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속엔 걱정도 있다. 안방까지 내주었는데 주도권은 프리즈가 쥐자 '죽 쒀서 남 줬다'는 평가가 나온 2022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공간 내 관람 인원에서부터 느껴지는 온도차, 많게는 8000억원으로 추정된 프리즈 대비 약 10분의 1에 불과했던 매출 규모, 주요 판매 작품의 대부분이 외국 작가 작품이었던 현실은 지금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올해는 어떨까. 일단 지난해가 준비 부족 상태에서 치러진 느낌이었다면 금년엔 대비된 흔적들이 엿보인다. 주최 측인 화랑협회는 참여 갤러리들이 추천한 작가 20명을 소개하는 하이라이트와 채색화 특별전 등의 프로그램을 구동하고 국제 예술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룰 법한 이슈들을 모은 토크도 마련했다. 또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던 '키아프 플러스'를 키아프의 한 섹션으로 재배치하는 등 나름 차별화를 꾀하려 애썼다. 하지만 프리즈와 체급을 맞추기엔 여전히 부족한 인상이 짙다. 뭔가 풍성해 보이지만 글로벌 위상을 담보할 키아프만의 선명한 색깔은 잘 읽히지 않는다. 문제는 작품이다. 올해도 '장식'에 머무는 얄팍한 출품작들이 주를 이룬다면 미학적 가치와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 즐비한 프리즈와의 격차는 또다시 확연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막은 올랐고 이번 행사가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미술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아니면 많은 이들이 우려하듯 '독사과'를 덥석 물은 것인지는 나흘 뒤면 알 수 있다. '젊음'과 '역동성'을 강조하는 키아프와 페어 참가 갤러리 120개 중 100여개를 아시아 및 한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갤러리로 채우며 '돈 되는 아시아' 공략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프리즈와의 경쟁 결과에 따라 키아프는 향후 세계적인 페어로 발돋움할 수도, 아니면 외국 유수 페어의 위성 행사로 전락할 수도 있다. 키아프는 현재 그 기로에 섰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09-05 14:37:57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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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미술진흥법'인가 '미술유통법'인가

1962년 한국 최초의 영화 기본법인 '영화법'이 제정됐다. 1999년 예술의 자유 보장 및 건전한 공연활동 진흥을 위한 '공연법'이 만들어졌다. 2016년엔 문학에 대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지원 근거를 마련한 '문학진흥법'이 공표됐다. 이 밖에도 출판, 음반 등의 개별법이 속속 국회 문턱을 넘었다. 하지만 미술 분야 전체를 통일적으로 규정하는 법령은 없었다. 예술의 주요 장르 중 하나지만 '문화예술진흥법'상 세부 장르로만 다뤄졌다. 이에 (사)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 등 미술계 21개 단체는 문화예술진흥법으론 미술진흥을 위한 실효적 체계구축에 한계가 있고, 미술 생태계의 다양한 주체를 포괄하지 못한다며 '미술진흥법'의 조속한 마련을 촉구해왔다. 미술진흥법이 지난 6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21년 법안 발의 이후 2년여 만이다. 핵심 내용은 체계적인 미술진흥정책 추진과 미술 서비스업 신고 제도를 포함한 미술업계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 구축, 작가의 권리 보장을 위한 '추급권(미술품재판매보상청구권)' 도입 등이다. 이중 추급권이 가장 큰 이슈다. 추급권은 미술품이 거래될 때마다 작가나 상속권자가 작품 판매 금액의 일부를 작가 본인이나 유족이 청구할 수 있도록 한 양도 불능의 상속 가능의 권리이다. 연주될 때마다 저작권료를 받을 수 있는 음악 작품과는 달리 미술품은 일단 한 번 양도하고 나면 원저작자에겐 더 이상 추가 수입이 생기지 않는다. 이에 다른 예술작품과 수입 형평성을 맞추면서 원활한 창작활동까지 보장하기 위해 생겨난 제도가 추급권이다. 1920년 프랑스가 처음 도입한 이후 영국,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등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시행 중이다. 캘리포니아 등 미국 일부 주에서도 실행되고 있다. 그러나 추급권 도입을 둘러싼 미술계 구성원 간 시각차가 뚜렷하다. 작가를 포함한 창작자들은 미술 시장의 투명성 확보 및 건강한 미술생태계 확립 차원에서 환영하는 분위기인 반면, 화랑이나 옥션 등 미술 유통업계는 한국 미술 시장 성장을 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두 입장 다 수긍과 반론이 가능하다. 현재로선 지엽적인 측면을 벗어나 미술진흥이라는 소실점 아래 미술관계자들의 다층적, 다발적 논의가 과제로 남았다. 여기엔 국립현대미술관이 맡고 있는 기존 정부미술품 대여 기관 외, 지자체 및 공공기관으로 관리대상을 확대한 '공공미술은행'이나 '미술진흥원' 설치와 같은 미술진흥 전담 기관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문제는 미술진흥법의 정체성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본 방향과 철학이 두루뭉술하다. 경매업, 화랑업, 미술품 대여·판매업, 미술품 감정업, 미술 전시업 등 33개의 조항 중엔 문화예술에 대한 존중보단 자본주의적 속성을 지닌 것이 수두룩하다. 이는 미술진흥법이 '미술유통법' 내지는 '미술업자법'처럼 비춰지는 이유다. 실제로 미술진흥법은 미술품에 대한 가치 평가 또는 취득과 처분에 관한 의견을 제공하는 전문가의 업무를 '미술품 자문업'으로 규정하거나 전시기획과 개최, 운영주체를 '서비스업자'로 묶고 있다. 초기 거론되던 평론가를 비롯한 이론가, 연구자들에 대한 안전망은 다루지 않는다. 이들은 미술진흥에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지만 고용형태가 불분명한데다 초현실적인 평론비와 원고료를 받고 있다. 심지어 10년 혹은 20년 전 평론을 재사용해도 그에 대한 저작료 등의 보상은 전혀 없다. 이외에도 '시각적 매체를 이용하는 표현'으로 한정하고 있는 '미술'에 대한 정의는 전근대적이고, '미술창작자'에 대한 정의는 아예 빠졌다. '예비 전문 인력 양성 지원'에 대한 부분 역시 누락됐다. 어떤 면에선 '미술업계 제도화'라는 명분 아래 제정된 '규제법'이라는 인상까지 심어준다. 미술진흥법은 손볼 데가 많다. 시행령에 앞서 보다 섬세한 논의와 조율이 필요한 게 한둘이 아니다. 시행령이 미술계에 미칠 파장을 생각하면 미술인들 먼저 의견을 모으고 합의된 개선안을 정부에 제시해야지 않나 싶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08-23 13:07:22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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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작지만 색깔 있는 아트페어

아트페어(Art Fair)는 미술품을 사고파는 장터다. 최근 부쩍 늘어난 신생 페어까지 합하면 국내에만 100여개에 달한다. 개인 및 협·단체, 기업, 문화재단이 주관하는 것에서부터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아트페어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아트페어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SEOUL, 키아프 서울)다. 한국화랑협회가 주관하는 국내 최대의 미술품 마켓이다. 지난해부터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영국 프리즈(Frieze)와 공동주최하며 글로벌 아트 플랫폼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22회를 맞은 올해 역시 9월 6일부터 닷새간 장을 연다. 장소는 코엑스다. 국내 최장수 아트페어인 '화랑미술제'(1979~)와 2012년 설립된 '아트부산' 등도 주요 페어로 꼽힌다. 나머진 고만고만하다. 소위 메이저를 제외하면 대개는 개념과 형식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자기 색깔 선명한 아트페어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몇몇은 관점과 대상, 접근방법 등에서 기존 페어들과 맥락을 달리한다. 2012년 출범한 '브리즈 아트페어'(Breeze Art Fair, 2023.8.18-20. 노들섬 노들갤러리, 이하 브리즈)도 그렇다. 사회적기업 ㈜에이컴퍼니가 주최하는 브리즈는 한국국제아트페어나 화랑미술제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출품작 수는 물론 매출에서도 비교할 바가 안 된다. 하지만 브리즈는 '젊은 미술'의 산실로 통한다. 이는 생물학적 측면만이 아닌 성장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발전하는 상태로서의 젊음이다. 작품들 또한 마찬가지다. 브리즈는 10년의 세월 동안 1000여명의 신진 창작자들을 발굴, 지원함으로써 미술계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경력이 적고 미술품 유통채널을 확보하지 못한 청년작가들에겐 소중한 무대다. 10대1 내외의 경쟁률을 나타낼 만큼 작가들의 호응도도 높다. 학력, 전공 유무와 상관없이 작품성과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우선하는 탓이다. 브리즈는 작품만 팔지 않는다. 예술가들이 현장에 어떻게 진입할 수 있는지, 예술에 있어 중요한 것과 알아야 할 것에 대해 조언하고 의견을 나눈다. 앞으로의 작업에 힘이 될 동료와 수집가들을 만나도록 장려하며 예술 활동에 필요한 여러 방안을 공유한다. 작가들 간 네트워크 조성, 전문가(평론가, 법률가, 기획자 등)들을 연결하는 오리엔테이션 및 현실에 입각한 강연 프로그램 등이 그 예다. 상생의 고민을 담은 지역과의 연대도 눈길을 끈다. 이른바 '로컬트랙'이다. 로컬트랙은 지역작가들의 중앙 진출을 돕고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코자 지역의 기업이나 문화재단과 협력하는 협업 프로그램이다. 2022년 울산에 이어 올해는 부천문화재단, 제주문화예술재단이 함께한다. 향후 '글로벌트랙'을 통해 지구촌 청년미술인들 간의 교류로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전례 없이 난립하는 페어 속에서 그림 매매라는 본연의 목적 외, 건강하고 지속성을 지닌 미술생태계 구현에 관한 브리즈의 지향적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술 인프라를 생성하기 위한 노력과 풍부한 문화유산을 구축하기 위한 실천들은 브리즈가 반드시 영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일러준다. 하지만 개인 기업이 짊어지고 가기엔 때로 벅차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작가 발굴은 사회적 책임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들의 올곧은 성장은 곧 문화적 자산이 된다는 점에서 이제라도 공공의 역할이 필요해 보인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08-08 11:52:4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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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언론의 위기와 대안

최근 한 광역자치단체 산하 문화예술기관장이 바뀌었다. 새롭게 선임된 이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측근이다. 문화예술 경력은 없다. 누가 봐도 '낙하산'이고 '보은인사'다. 하지만 지역 언론 어느 곳에서도 문제의식을 내비치지 않았다. 전문성과 역량을 가늠할 수 없는 인사가 정치권과의 연줄을 통해 선임됐지만, 비판적 보도는 없었다. 권력에 무비판적인 언론의 '침묵'은 흔하다. 권력 영합주의적 기사는 넘쳐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사적 소유형태로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 민간언론일수록 심하다. 왜 그럴까. 여기엔 수익구조가 놓여 있다. 다수의 중소 언론사에도 적용되는 것이지만, 지역 민간언론은 지자체에 의해 연명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재 대상이면서 동시에 매우 중요한 광고주로, 경영 안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자금줄'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내부에도 원인이 있다. 언론사는 지자체나 관계 기관이 제공한 보도자료를 지면에 옮기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따옴표 저널리즘'이다. 사실 여부는 따지지 않는다. 책임질 일도 없다. 비판적 혹은 심층적 분석기사는 드물다. 받아쓰기 기사에 비하면 몇 배의 노동력과 시간, 비용을 들여야 한다. 특히 적은 인력과 예산으로 살림을 꾸려야 하는 지역 언론사의 입장에선 녹록한 과정이 아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목을 매는 수익구조는 성역 없는 취재를 불가능하게 한다. 정치권력에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아예 홍보비를 집행하지 않는 식으로 '관리'를 당하다 보면 권력 감시 역할의 부재를 낳고 '관언유착'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럴수록 정보 편향성은 심화되며 독자의 알권리 역시 무시되거나 왜곡된다. 기자들은 좀 다르지 않을까. 훌륭한 기자도 있다. 하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날 기자들의 적지 않은 수는 언론인이라기보단 글 쓰는 회사원, 홍보 직종에 몸담고 있는 구성원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혹자에겐 정계 진출을 위한 발판이다. 유시민 작가와 변상욱 전 YTN 앵커의 말처럼 누군가에게 언론사는 출세를 위한 도구이자 '간이 정류장'인 셈이다. 일부를 제외하곤 언론은 건강한 담론 생성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체제가 굳어가는 듯한 인상이 짙다. 저널리즘의 기업성도 심각하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가중될수록 독자의 신뢰를 잃는다는 점이다. 신뢰를 잃은 언론은 생존을 위한 고립이 더욱 심화되고, 살기 위해 다시 자본과 권력의 시종이 된다. 본질은 퇴행, 좋게 말해 악순환이다. 언론의 사명은 정직한 보도다. 공익과 정의의 편에서 사실을 추적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다. 언론의 힘도 그것에서 나온다. 많은 언론사들이 정론과 직필, 정도의 길을 표명하는 것도 그 중요성을 알고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론직필을 지키는 건 어렵다. 자본주의 시대, 온갖 회활(獪猾)한 유무형의 권력 앞에 지식인으로서의 책무가 몸에 밴 사회의 목탁 내지는 시대의 등불이 되기엔 기자 개인의 희생이 너무나 크다. 오랜 시간 '위기'를 말해왔으나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선 언론사도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다. 대안은 정론을 지켜가는 언론과 연대하려는 독자들의 현명한 선택이다. 한부라도 구독하며 소액이라도 후원해야 한다. 공정하고 투철한 직업의식을 지닌 기자를 응원하며 홍보비나 기타 재원으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거나 고사시키려는 권력에 다 같이 저항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우군이 되어 주는 것이다. 물론 언론 또한 책임의식과 사명감을 잃지 않아야 한다. 독자와 함께 지속가능한 저널리즘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또한 유효해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언론은 강자의 나팔수 노릇에서 벗어나 약자의 편에 서서 본연의 본분과 책임의식을 다할 수 있다. 시민 민주권력은 그렇게 탄생한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07-26 13:29:35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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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유인촌의 귀환

지난해 3월, 서울문화재단은 창립 18주년을 기념해 대표적 'MB맨'으로 통하는 유인촌에게 '특별공로상'을 수여했다. 과거 재단대표이사로 재직하는 동안 촬영한 광고 출연료 2억7000만원을 기부금으로 기탁한 '선행'이 근거가 됐다. 당시 재단대표는 홍보자료를 통해 "사재 기부금으로 문화예술에 지원한 선행을 알리기 위해 특별공로상을 드린다"며 "대한민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노고"에 깊이 감사하다고 했다. "서울시민과 문화예술계 그리고 서울문화재단 임직원의 마음을 담았다"는 말도 덧댔다. 어이가 없었다. 이명박 정부시절인 2008년 2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 직후 철 지난 색깔론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예술기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크게 위축시킨 '숙청 활극'의 장본인이었던 유인촌에 대해 문화예술지원기관의 대표라는 이가 "대한민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노고" 운운하니 어찌 기가 막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돈 몇 푼 기탁했다는 이유로 '코드'라는 형태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진보인사 적출에 앞장섰던 인물에게 서울시민과 재단 직원까지 언급하며 감사하다고 하는 역사인식의 부재는 절망 그 자체였다. 문화예술을 정치와 이념의 잣대로 탄압한 유인촌의 행태는 동종업계에서도 지적됐다. 그와 연극계 선후배 관계인 최종원은 2010년 8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문화 예술의 정책적 대안을 제시해야 할 주무장관이 이념적인 잣대로 좌파, 우파를 나누기 시작하고, 그냥 남의 목 자르고, 자기 패거리를 집어넣고 하는 그런 형태들이 굉장히 잔혹하다"고 했다. 이제 와 문화예술에 대한 서울문화재단의 철학을 묻고 싶진 않다. 비민주적이고 왜곡 편향된 가치관에다 막말과 욕설로 온갖 구설수에 올랐던 자에게 상까지 주며 치하하는 모습만으로도 이미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와 있다. 그리고 특별공로상은 서울문화재단의 부끄러운 역사로 남았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미술자료 전문박물관이다. 한국근현대미술 아카이브 구축을 목표로 주요 사료를 정리하고 이를 발판으로 국내외에 정확한 미술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2008년 설립됐다. 운영자인 김달진 관장은 1980년대부터 미술자료 수집에 공을 들였으며 공공문화유산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에도 앞장서 왔다. 지난해 7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대중과의 접점 차원에서 '선인장이 자라는 박물관'이라는 제목의 웹드라마를 제작해 온라인에 송출했다. 총 8화 분량의 이 드라마는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박물관 내부의 일상과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버무려 소개했다. 덕분에 다소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박물관의 이미지 개선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난 시청하지 않았다. 아니, 이명박 정권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전횡을 일삼던 유인촌이 박물관장 역으로 출연한 장면 이후 덮었다는 게 맞다. 웹드라마 제작 사례가 문화예술계에 어떤 의미를 남길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그 의미의 한 축이 이념 및 정치 성향으로 예술가들을 가르고 억압한 주인공이라면 아무리 좋은 내용도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에도 유인촌에 관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럼에도 그를 재차 소환한 이유는 거창한 '완장'을 차고 다시 나타나서이다. 지난 6일 대통령실은 그를 '대통령 문화체육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문화예술인 출신에 다양한 행정 경험을 두루 갖춘 이력을 임명 배경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내 시각엔 집권 2년 차 들어 노동, 시민, 사교육, 공직자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카르텔'로 규정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정작 'MB맨'들과 검찰 출신들을 정부 요직에 대거 기용하며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견고히 구축 중인 대통령다운 인사의 연장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유인촌의 귀환은 벌써부터 많은 이들의 우려를 낳고 있다. 어떤 이는 엄혹한 과거의 망령이 돌아오고 표현의 자유와 창작의 자유가 사라진 폭정의 시대가 열렸다고 했다. 혹자는 극우적 태극기부대 정권으로 향하는 윤석열 정부의 걸음에 국민의 우려와 시름이 깊다고 한다. 과거에 근거한 염려지만 윤석열 정부의 유인촌 문화특보 임명이 의미하는 게 결국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펼쳤던 블랙리스트의 재연을 주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희석되지 않는다. 문화예술계에 가한 유무형의 폭력마저 관용으로 대한 채 면죄부를 주는 우리 예술계 종사자들의 남루한 문제의식과 무딘 비판력을 생각하니 다가올 미래가 섬뜩해지기까지 한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07-12 14:19:10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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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시각예술과 '생성형 AI'

'생성형 AI'(Artificial Intelligence)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만으로 인간이 10시간에 걸려 해야 할 일을 10초로 줄여준다. 자율적으로 작품을 생성할 수 있는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과 딥 러닝(deep learning) 기술을 활용해 기존 작품을 분석하고 패턴을 학습하며 인간 예술가의 직접적인 입력 없이도 여러 예술적 스타일을 모사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원한다면 도상에 대한 기초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더라도 그럴싸한 그림 하나쯤은 쉽게 얻을 수 있다. AI는 기술적 장벽을 간단하게 뛰어넘게 만듦으로써 보다 많은 이들이(예술가 포함) 예술적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AI 덕분에 인간은 제작 시간과 노동력을 줄이게 돼 경제적 효과를 보다 극대화할 수 있게 됐다. 인간 예술가와 실시간 상호 작용을 통한 협업 예술 프로젝트를 구현하는 등 예술적 표현을 탐구하는 데에도 AI는 유용한 '도구'다. 도구라는 건 '수월해짐'의 문제다. 인간이 했던 일들 중 일부를 용이하게 만들어준다. 기술발전으로 인한 육체노동의 보완에서 인지 영역으로의 확장까지 그 폭도 넓다.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 시각예술 장르 등도 그 너비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생성형 AI가 만든 이미지(Artificial intelligence art)는 '창의'에 속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말 그대로 '생성'이다. 독자성, 독창성, 창작과는 거리가 멀다. 현재 시점에서 AI가 생성한 이미지란 다른 사람들의 사진과 작품, 화풍 등의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재조합 되는 모방이기 때문이다. 인간 감수성이 배어 있는 예술과 일정한 규칙에 의해 조립되는 AI 예술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이미지만으로도 예술이라 여기는 오해 탓에 창작으로 인식되는 것일 뿐, 실제로는 기존 자료를 표면적 유려함으로 산출한 전산프로그램에 불과하다. 제아무리 '자율학습' 과정을 거쳐도 원본이 있기에 결과도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창작에 있어 인간 역시 경험, 지식, 환경에 의한 학습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창작에는 일반적으로 학습된 것 외에도 상상력이나 영감, 감정, 인지 능력, 사고 능력 등이 개입된다. 일정한 데이터에서 패턴을 추출하고 도상을 분류해내는 AI와는 완전히 다른 체계다. AI는 논리 및 알고리즘 프로세스에 의탁하고 그 시스템은 통계적 추론에 의지한다. 그것은 인간처럼 상상할 수 없고, 의식과 자기인식보다는 인간 지능을 시뮬레이션하거나 본뜨고 흉내 낸다. 모델에 의존한 데이터 및 컴퓨팅 접근 방식에 의해 완성된다. 혹자는 AI가 예술에 기여해온 각종 기술적 장치나 프로그램(소프트웨어)들처럼 인간에 의해 온전히 조율되고 지정되는 '예술 도구'의 연장이라면 그 결과물 또한 예술작품이 아니냐고 한다. 합당한 의견이다. 다만 이땐 AI 자체가 아니라 그 AI를 이용한 인간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 요소들이 고려돼야 한다. AI로 만든 자신의 결과물이 개인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의식해야 하며 저작물 전체에서 차지하는 실질적 비중도 따져봐야 한다. 만약 어떤 예술가가 순전히 AI가 만든 작품을 예술로 '선언'한다면, 그것이 지각적(perceptual)인 것이 아님을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개념이 수반돼야 할 것이다. 예술가에게 AI는 예술적 창의성을 기술 발전과 결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강력한 수단이다. AI를 통한 조형방식의 풍요로움과 경험 방식의 다양성,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한 예술 지평의 확대는 예상되는 미래다. 과거 사진이 그러한 것처럼 AI 작품 역시 하나의 새로운 예술분야로 안착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AI로 인한 긍정적 예술발전이 가능하려면 이용자는 문화적, 윤리적 가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AI의 활용은 원저작자의 허가를 얻거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는 것, AI를 이용했음을 고지하는 것과 더불어 '창작윤리'에 부합하면서도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창작윤리란 학습자로서 지켜야 할 학습윤리와 연구자로서 지켜야 할 연구윤리를 포함,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이들이 창작과정에서 반드시 고수해야 할 원칙이나 행동양식을 의미한다.■ 홍경한(미술평론가·LHC Larchiveum 총괄 디렉터)

2023-06-13 13:56:05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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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문화예술 불모지 '강원도'

인천시립미술관이 2027년 개관을 목표로 한 걸음씩 발을 내딛고 있다. 시립박물관은 확장 이전되지만 미술관은 미추홀구 인천뮤지엄파크에 신규로 들어선다. 이곳엔 4곳의 전시공간을 비롯해 세미나실과 수장고 등이 조성된다. 현재는 설계 단계에 있다. 도립미술관 건립도 이어지고 있다. 충청남도는 오는 12월 도립 충남미술관을 착공한다. 홍성군을 소재지로 2025년 개관 예정이다. 경상북도도 2018년 이후 5년 만에 도립미술관 조성을 재추진하기로 했다. 건립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미술관 건립 용역에도 착수한 상태다. 충청북도 또한 도립미술관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모습이다. 충북 지사는 지난 달 10일 열린 서울 '충북갤러리' 개관식에서 도립미술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충북도는 충북문화재단과 함께 도 내 하드웨어 구축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예술 기반 조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모두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출범 10여년 남짓한 세종특별자치시를 제외한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 강원도만 도립미술관이 없게 된다. 하지만 강원도에서는 관련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06년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적은 있으나 17년째 지지부진한 상태다. 2015년경 건립을 희망하는 춘천, 원주, 강릉 등 4개 시·군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마쳤음에도 더 이상의 진척은 보이지 않고 있다. 강원도의 경우 기초자치단체에서 세운 미술관조차 그리 많지 않다. 2022년 '전국 문화기반시설 총람'(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하면 강원도 내 등록된 기초단체미술관은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 강릉시립미술관, 인제 내설악예술인촌 공공미술관을 포함 총 5곳이다. 이는 강원도 인구(153만 여명)의 절반도 안 되는 인구(67만 여명)임에도 제주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김창열미술관 등 모두 7개의 공립미술관을 거느리고 있는 제주특별자치도와 비교된다. 14개에 달하는 경기도와 11개의 공립미술관을 운영 중인 전라남도 등과는 수적 차이가 더욱 뚜렷하다. 강원도의 문화예술 인프라 부족은 일반 통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달진미술연구소가 발표한 '2022년 전시공간의 변화, 128개 개관'에 따르면 서울 64개를 비롯해 경기도 18개, 전북전남 5개, 제주도 3개 등 전국에서 전시 공간이 증가했으나 강원도는 0개를 기록했다. 2021년엔 5개의 공간이 새롭게 문을 열었고, 코로나가 발발하기 전인 2019년엔 8개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갈수록 쪼그라드는 모양새다. 문제는 전시 공간 조성을 포함한 여러 문화예술 육성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여타 지방자치단체들과 달리 강원도는 그나마 있던 것마저 하나둘씩 없애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강원도는 도 내 유일의 국제시각예술행사인 '강원트리엔날레'(舊 강원비엔날레)에 대한 예산을 대폭 삭감해 사실상 식물행사로 전락시켰다. 주관 기관인 강원문화재단은 예산이 없어 예술감독조차 선임하지 못할 처지다. 이에 폐지 수순을 밟고 있는 것 아니냐는 전망까지 나온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2019년 시작한 '평창국제평화영화제'도 올해부터 도 내 개최가 중단됐다. 강원도와 고성·인제 등 5개 군이 함께 주최해온 'PLZ 페스티벌' 역시 축소되거나 외부 운영이 불가피해졌다. 2016년 이후 매년 겨울 선보여 온 평창대관령음악제 '겨울음악제'도 예산 항목 자체가 사라지면서 폐지됐다. 여태껏 별 탈 없이 잘 운영되던 것들이다. 지역 언론은 지난해 6월 국민의힘 김진태 지사 취임 후 혈세를 낭비하는 보조금 지원사업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이런 사태가 본격화됐다고 지적한다. 몇 안 되는 문화자산마저 고사시키면서 강원도 예술인들은 '문화예술 불모지'로 변해가는 고향을 등지고 있다. 바깥에선 강원도가 원시적인 문화 생태로 회귀하는 것을 우려한다. 문화예술 진흥은 경제 성장과 사회적 결속을 촉진한다. 또 문화 활동에 대한 투자와 장려가 활발할 때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강원도는 관심 자체가 아예 없다는 인상이 짙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선 '최문순 전 지사가 공들였던 행사를 지우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진짜 그런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문화예술에 대한 철학이 빈곤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05-30 15:16:13 김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