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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홍경한의 시시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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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빛바랜 '벽화마을'

'아트인시티(Art in City)'라는 이름의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2006년부터 2년간 전국 각지에서 진행됐다. '소외지역 생활환경 개선'을 명분으로 한 대규모 정부 주최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시행을 위해 '공공미술추진위원회'가 출범됐고 첫해에는 복권 기금 12억2500만원을 지원받아 공모사업 10곳, 시범사업 1곳 등 총 11개 프로젝트를 벌였다. 공공미술의 방식으로 생활문화 환경을 개선한다는 의도와는 달리 '장식적 공공미술'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으며 2007년 종료됐지만, 당시로선 보기 드문 마을 단위의 종합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낙후된 인상을 심어줬던 서울 이화동 일대는 물론 부산, 경기, 대구, 광주 등 곳곳에 분포된 시행 마을은 전에 없던 시각적 활기로 채워지는 성과도 있었다. 이 중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일대를 무대로 한 '낙산 공공미술 프로젝트'에는 3억5000만원의 예산을 투입해 서울사대부속여자중학교 외벽과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낙산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에 벽화, 스트리트퍼니처, 조형물 표지판 등을 제작·설치하고, 간판 바꿔 달기와 같은 사업을 전개했다. 방송통신대학과 이화동 사무소 외벽에도 작품을 남겼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소규모 봉제 공장이 모여 있던 이화동은 해당 프로젝트로 인해 성공적인 벽화마을로 거듭났다. 해바라기와 잉어계단은 '이화동 벽화마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으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2010년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에 소개되며 반향을 일으킨 '날개벽화'는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관광객들을 마을로 유입시키는 역할을 했다. 흥미롭게도 이후 전국에는 '벽화 열풍'이 불었다.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수백 개의 벽화마을이 생겨났고, 너도나도 물고기, 날개, 해바라기 그림을 담장에 새겼다. 모두들 2007년부터 조성된 통영 '동피랑마을'이나 이화동 벽화마을을 꿈꿨다. 하지만 부작용도 컸다.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벽화마을을 방문했고, 그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도 늘었다. 소음과 쓰레기, 사생활 침해를 비롯해 다양한 문제들이 속출했다. 과잉 관광(Over tourism) 상태에 이르면서 주민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서울권역 내 벽화마을을 대표하던 이화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을을 상징하던 물고기계단 등의 일부 작품은 주민들에 의해 철거됐고, 날개벽화는 작가가 직접 지웠다. 그에 비례해 관광객들의 방문도 서서히 줄었다. 한때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화동 벽화마을에 대한 관심은 불과 10년도 안 돼 뚝뚝 떨어졌다. 벽화가 지워지니 인적도 지워졌다. 여타 지자체들의 형편은 더욱 좋지 못했다. 주목도는 낮아졌고 사업 빈도수도 줄었다. 물론 지금도 저예산으로 시각적 효과를 낼 수 있는 벽화마을을 조성 중인 지방자치단체가 있으나, 예전만큼 '핫한 아이템'은 아니다. 그런데 이는 예상된 것이었다. 일단 명분이 없었다.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문화 나눔이나, 쾌적한 예술적 환경에서 주민들이 생활할 권리의 실현 따위는 단지 이상에 불과했다.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 함양은 고사하고 관광 이익이 지역민에게 돌아가는 경제적 선순환과도 거리가 멀었다. 벽화의 내용 또한 실망스러웠다. 독창성이 없었고, 색깔도 주제도 다들 비슷했다. 수준도 조악해 미적, 예술적 가치는 거의 없었다. 그마저도 관리가 안 돼 변색과 훼손되기 일쑤였다. 결국 이내 시들해지는 운명도 같았다. 공공미술이 그렇듯 지역의 정체성이 반영되지 못하거나 주민 주체가 이뤄지지 않는 한 벽화마을 또한 오래갈 수 없다. 공공의 장에서 대중과 지역 사안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촉매로서의 가능성까진 아니더라도 한낱 환경 미화용 장식품이나 개발 논리를 포장하는 용도로의 벽화마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리고 명분과 주민 공감대 형성 없이 '구경거리'로만 접근한다면 현재 조성 중인 일부 지자체들의 벽화마을 운명도 불 보듯 뻔하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6-26 13:52:1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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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작가 경력과 분별의 시각

미술이라는 고급 콘텐츠를 거래하는 거대한 상업 플랫폼인 아트페어. 한국의 아트페어는 숫자 면에서 압도적이다. 약 15년 전만 해도 30여개에 불과하던 것이 2021년엔 80여개로 치솟았고 현재는 100여개를 웃돈다. 고만고만한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가 20여개가량 난립하는 것도 그렇지만 한해 이렇게 많은 아트페어가 열리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다. 아트페어가 넘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적 관심이 높아서일까, 아니면 경제성장으로 인한 대중들의 미술품 구매력 상승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아트페어의 과잉은 어느 하나를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각각의 요소들은 맞물려 있을뿐더러, 미술 작품 컬렉션을 투자의 대안적 개념으로 보는 시대 흐름 등도 주요 요인이다. 그러나 가장 정답에 가까운 건 '작품의 팔릴 가능성'이다. 고객 유인 효과에서도 그렇고 작품 판매의 여지 측면에서 역시 군집 형태가 개인전 혹은 개별 화랑에서의 전시보다 낫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열리는 소규모 아트페어와 개인 및 공공기관, 기업 주도형 페어들도 동일한 맥락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아트페어의 수만큼 생산자인 작가들의 참여도 부쩍 늘었다. 하지만 아트페어가 작가들에게 반드시 경제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돈 내고 참여하는 아트페어라면 판매 부진 시 발생하는 손해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귀엽고 앙증맞은 동물이나 예쁜 꽃 그림, 기타 장식용 그림과 부적 같은 작업이라면 모를까, 판매 수익은 고사하고 작품 운송료조차 건지지 못하는 예도 드물지 않다. 명성, 독창성, 적절한 가격대, 기술적 완성도, 취향, 트렌드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되는 탓이다. 아트페어는 경력 면에서도 그리 유의미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아트페어에 출품하는 빈도가 잦을수록 그 작가에겐 '페어 작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게 된다. 페어 작가란 '상업 작가'와 동의어다. 그런데 정부와 지자체가 시행하는 예술가 지원 제도의 다수는 작가들이 상업적인 활동과 거리를 두더라도 창작의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둔다. '화폐'로 치환해야 할 수단으로서의 미술과 '사회적 의사표시'로서의 미술을 구분한다. 작가 경력에 있어 무게감이 약한 또 하나는 공모전이다. 등용문 역할을 맡고 있지만 가치 있게 쳐주지 않는다. 솔직히 어떤 공모전에서 어떤 상을 받든 대단하게 보는 전문가는 별로 없다. 일부일지라도 심각한 비리의 역사를 갖고 있어 인식이 좋지 않은데다 생활 예술인들의 무대로 보는 게 현실이다. 협·단체들의 돈벌이 수단이라는 시각도 공모전 경력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이유다. 물론 공모전은 전시 기회가 적은 신진 작가들에겐 그나마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장이 되곤 한다.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기회인 셈이다. 그렇더라도 최선의 선택인지는 의문이다. 대안 공간이나 신생 공간에서의 전시,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끼리 뭉쳐 치르는 임시 공간에서의 실험적인 전시 경력보다 결코 낫지 않다. 작가 경력에 있어 유의해야 할 예는 또 있다. 바로 삼류 상업 갤러리와 어울리면 3류 작가가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어떤 화랑과 비즈니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경력에 매우 중요하다. 이 밖에도 별 볼 일 없는 10번의 전시보다 공신력 있는 공간에서 여는 한 번의 개인전이 경력에 훨씬 유리하며, 기획전일지라도 수준 낮은 작업의 작가들이 즐비하다면 가급적 참여하지 않는 게 좋다. 궁극적으론 경력에 반영된다. 아트페어 홍수다. 이런저런 전시들이 숱하게 개최된다. 하지만 대개는 의미를 갖지 못하고, 참여가 곧 가치 있는 경력으로 치환되는 것도 아니다. 창작 활동의 연속성과 예술가로서의 성취를 원한다면 작품성만큼 무언가를 제대로 분별하는 시각 또한 중요하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6-12 10:50:05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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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한국 공공미술이 나아갈 방향

한국 공공미술의 역사 반세기, 그동안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다. 공공미술의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하는 지에서부터 실천 방식의 오류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도 다양했다. 특히 시간의 두께에 비해 시민 삶의 일부로 스며드는 '생활의 미술'로 인정받기엔 여러모로 미흡했다. 우리의 공공미술은 아직 건축물 내외를 장식하는 부속물로 이해된다. 공들여 만들었지만 공공의 주체인 시민들에게 외면받은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인천공항처럼 막대한 세금을 쓰고도 관리조차 제대로 못 하는 공공기관 주도형 작업 또한 넘쳐난다. 세상에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문화 행위로서의 공공미술은 거의 발견할 수 없는 반면 도시 흉물화를 부추기는 '비싼 쓰레기'는 지금도 지천이다. 외국은 다르다. 모든 작품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구성원들은 시각적인 질을 높이는 것 저편의 의미를 지닌 무언가에 관심을 가졌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작품 대신 약속과 참여가 우선시되는 작품들을 공공의 공간에 위치시켰다.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당대성이 반영된 작업들도 심심찮게 선보였다. 일례로 영국 작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은 지난해 런던 국립 초상화 갤러리의 육중한 청동 문에 45점의 여성 초상화로 구성된 'The Doors'라는 제목의 작품을 새겼다. 공공시설의 출입문에 각인되며 수많은 시민과 공유된 이 초상화들은 전 세계 주요 기관의 컬렉션에서 오랜 시간 소외돼 온 여성 예술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넓게는 여성의 인권에 대한 작가의 발언이기도 했다. 2022년 9월 이란에서는 이란 여성 마샤 아미니(Masha Amini)가 히잡을 부적절하게 착용한 혐의로 도덕 경찰에 구금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죽음은 이란을 넘어 세계적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시위대는 거리로 나와 여성의 생명과 자유를 외쳤다. 이에 이란 작가 쉬린 네사트(Shirin Neshat)는 런던의 한 건물에 'Woman. Life. Freedom'이라는 제목의 영상 작업을 선보이며 자유와 기본 인권을 위한 이란의 투쟁을 구현해야 한다고 외쳤다. 2022년 6월 캐나다 토론토의 한 거리에는 코끼리 형상의 청동 조각상 'Couch Monster'가 세워졌다. 캐나다 예술가 브라이언 융겐(Brian Jungen)에 의해 시도된 이 공공예술 프로젝트엔 거대한 코끼리가 등장한다. 1885년 화물열차에 치여 사망한 서커스 코끼리 점보(Jumbo)다. 작가는 점보를 통해 평생을 인간에 의해 갇히고 이용당하는 야생동물의 비극을 말하고, 인간과 동물의 공존에 대해 질문했다. 이 밖에도 소수자를 위한 배려로서의 공공미술, 지역을 반영할 수 있는 장소 특정적(place-specific) 성격의 공공미술, 시대의 발언으로 존재하는 공공미술 작품은 세계 도처에 있다. 공공미술은 메시지다. 민주적 의사표시로서의 사회적 행위다. 지역의 이슈와 자신의 주변 환경에 대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경험이기도 하다. 공공미술도 미술이라면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논의의 매개가 돼 마땅하며, 미술을 통해 보다 건강한 사회 구축에 일조해야 한다. 한국의 공공미술은 이제라도 공공미술이 부르주아적 유산으로부터 이탈한 결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중을 위한 미술이자 대중의 참여를 통해 완성되는 미술이라는 것도 간과하면 안 된다. 더불어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처럼 의미 있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하는 불합리한 체계가 합당한지 짚어보고 존치 여부 역시 고민해야 한다. 공공미술의 밝은 미래를 원한다면 그래야 한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5-22 14:12:3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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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터무니없는 공공기관 원고료

지난 2020년 한 공공기관으로부터 평론 청탁을 받았다. 공무원인 담당자는 입주 작가가 원한다며 상세한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메일에는 집필해야 할 작가 작품에 대한 정보와 함께 '원고 분량 A4 4장 이내', '정리된 원고 A4 1장 별도'라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적혀있었다. 거절했다. 25만원이라는 원고료가 문제였다. 한 달 가까이 걸리는 원고 집필 시간과 작품연구에 따른 정신적·육체적 노동에 대한 보상치곤 지나치게 적었다. 작품을 보기 위해 작업실까지 왕복 700킬로미터를 오가는 데 소용되는 교통비와 세금까지 포함된 '글 값'이 25만이라는 건 사실상 재능기부를 하라는 얘기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21년, 동일한 기관에서 또다시 평론을 의뢰했다. 이번엔 해당 기관의 지원으로 전시할 작가가 직접 연락했다. 원고료는 30만원이라고 했다. 물론 세금공제 전, 교통비도 그 30만원 내에서 모두 해결해야 했다. 역시 거절했다. 개선되지 않은 환경에선 평론 작성이 불가능함을 담당자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며칠 뒤 작가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그는 담당자에게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돈에 맞는 비평가를 찾으면 될 것 아니냐"는 핀잔마저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작가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지적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그들의 탁상행정과 내부규정, 수당 규격별 지급액 기준 등이 잘못되었을 뿐이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언젠가는 역사적, 문화적, 예술적 틀 안에서 작가와 작품을 맥락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평론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고, 다른 관점과 해석을 통한 예술적 담론의 풍부함 및 표현의 지속적인 진화에 기여하는 비평가들에게 걸맞은 정책이 실현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변한 건 없다. 비평가와 연구자들의 생산물에 대한 낮은 보상체계도 달라지지 않았다. 실제로 2023년 10월 국내의 한 비엔날레가 비평가들에게 제시한 평론비는 30만원이었다. 지난 4월 모 공립미술관이 밝힌 원고료 또한 25만원에 불과했다.(굳이 비교하자면 명목임금은 25만~30만원이지만 실질임금은 '0원'에 가까운 셈이다. 쉽게 말해 그냥 공짜로 써달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공립미술관이나 공공기관의 다수는 이처럼 터무니없는 글 값을 책정해놓고 있다. 평론만으론 생활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니 점점 전업 비평가가 줄어들고, 비평가를 희망하는 후배들 또한 드물어지고 있다. 당장 굶을 것이 훤한데 어느 누가 비평가를 꿈꾸겠는가. 어떻게 해야 이런 현실을 타개할 수 있을까. 일단 미술평론가협회의 적극적인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 협회차원에서 해당 사안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있다. 그게 어렵다면 비평가들끼리의 '연대파업'도 하나의 대안이다, 그렇다면 "돈에 맞는 평론가를 찾으면 될 것 아니냐"는 어느 공무원의 오만한 발상과 발언을 접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상상이다. 평론가협회는 무기력하고, 공공기관 자료에 이름만 올려도 좋다며 무상노동조차 감수하는 대체가능 인력이 있다. 경험 많은 비평가조차 비평계가 처한 현실을 외면한 채 개념 없이 응하곤 한다. 수모에 근접한 대우에도 아무 말 없으니 기관들은 달라질 이유를 찾지 못한다. 법으로 정하지 않는 한 처참한 글 값이 그대로일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다행인 것은 오는 7월 26일 시행되는 '미술진흥법'에 비평가들의 글 값이 다뤄진다는 소식이다. 공공기관의 평론비 등을 규정화한다는 것이 요지인데, 아직 단정하긴 이르지만 기획자나 비평가들의 기획비와 원고료 산정 문제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선 고무적이다. 미술진흥법으로 비평가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5-01 11:20:51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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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과 '타자(他者)의 고통'

평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전쟁, 자본주의를 숙주로 한 계급주의의 만연, 민주주의의 근본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핍박, 빈곤과 차별은 지금도 변함없다. 국가에 의해, 이념에 의한 국민의 희생 역시 여전하다. 무능한 정치권력과 부실·부재한 국가정책에 의한 무명의 가슴 아픈 죽음도 많다. 2018년 제주도립미술관은 제주 4·3 항쟁 70주년 특별전을 마련했다. 20세기 동아시아 제노사이드(Genocide)를 주제로 한 이 전시는 국가폭력에 의해 발생한 피해자의 상흔을 기억하고, 인권회복과 상생,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기획됐다. 제주 4·3을 비롯해 광주 5·18 민주화운동, 하얼빈 731부대의 만행, 난징대학살, 대만 2·28 민중봉기, 베트남 전쟁 등 현대사의 비극을 다양한 미술 언어로 다뤘다. 눈에 띄는 작품은 재중 동포 작가 권오송의 '일식'(Eclipse, 2018)이다. 5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수묵화에는 전염병 확산과 대량 살상 무기를 연구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한 일본 731부대의 잔인함이 고스란히 담겼다. 4·3 항쟁이 발생한 제주도 조천 북촌을 그린 강요배의 작품 '불인'(不仁, 2017)과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헬리콥터를 영상으로 담은 딘큐레((Dinh Q. Le)의 '농부와 헬리콥터'(2006)에는 국가폭력을 경험한 자들의 상처가 새겨졌다. 2019년 크리스토프 뷔헬(Christoph Buchel)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녹슨 선박인 '바르카 노스트라'(Barca nostra, 2019)를 끌어다 놨다. 이탈리아어로 '우리의 배'를 뜻하는 이 어선은 2015년 5월 천여 명에 가까운 난민을 태운 채 리비아를 떠나 지중해를 건너던 중 침몰했다. 뷔헬의 작품은 떠들썩한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시대의 참상을 돌아보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일종의 추모비였다. 이 밖에도 포토몽타주,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 등 다양한 조형적 방법을 통해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꾸준히 표현해온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를 비롯해 끝없이 되풀이되는 파시즘을 언급해온 피오트르 우클란스키(Piotr Uklanski) 등, 타락한 공동체와 국가를 둘러싼 '악(惡)'의 잔재들을 특유의 문법으로 적시해온 작가들은 적지 않다. 사진을 통해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고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낸 골딘(Nan Goldin)이나, 인종이나 계급, 성별을 뛰어넘는 인류 공통의 평등에 초점을 맞춘 작업으로 유명한 닉 케이브(Nick Cave) 등이 그렇다. 티에스터 게이츠(Theaster Gates), 제시 트레비뇨(Jesse Trevino), 티파니 정(Tiffany Chung), 마크 브레드포드(Mark Bradford), 페이스 링골드(Faith Ringgold), 조이스 J. 스콧(Joyce J. Scott) 등도 동일한 범주에 든다. 국가와 성별, 피부색은 다르지만 이들은 장르를 넘나들며 인간이 만든 재앙과 폭력적인 역사를 현재로 소환해 경각심을 일깨우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는 점에선 결이 같다. 폭력과 불의, 억압과 부조리 같은 문제들에 대해 성찰을 유발하는 작업이라는 것도 공통분모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예술의 사회적 실천 방식은 억압과 폭력의 현실에 대한 서사적 발언에 있다. 이는 예술의 역할에 부응하는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인간이 자행해온 야만성을 고발하며 질문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의 위치와도 맞닿는다. 미술시장이 요구하는 '제품'이 넘쳐나는 작금이지만, '장사'를 예술로 착각하는 세상이지만 아직 소외된 자, 힘없는 자, 방황하는 자들의 곁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참다운 예술가들이 있다.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채 남겨진 자로서 슬픔과 비애로 점철된 세상을 증언하며 예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는 그들이 있기에 우린 역사적 진실을 직시하고 광기에 쓰러진 이들을 추념할 수 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4-17 11:33:12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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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한국 떠나겠다"는 한 거장의 절망

미술인들은 영상이나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와 방식으로 전시를 기록한다. 그림과 설명(비평)을 엮은 인쇄물인 '도록'(圖錄)도 그 중 하나다. 창작 여정에 관한 포괄적인 문서이자, 한 전시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임을 알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비롯한 미술 관련 기관들 또한 도록 제작에 공을 들인다. 그 자체를 예술 생태의 일부로 인식하며 또 다른 형태의 전시로 본다. 따라서 관계자들은 예술가와 큐레이터의 지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을 보존하기 위해 고민하는 한편 오류나 실수엔 상당히 엄격하다. 만약 그 대상이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 작가와 전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최근 발간된 김구림(88) 작가의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김구림 전, 2023.8.25.~2024.2.12. 서울관) 도록은 그런 기본 개념이 거의 없다. 불빛이 들어오는 컬러 작품을 흑백처럼 둔갑시켰고, 하얀 바탕의 작품들을 누런색 배경으로 바꿔 놓았다. 심지어 작품 전체를 어둡게 덮어 원본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창작'해 놨다. 이게 과연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에서 만든 것인가 싶을 정도다. 작품의 색을 임의로 변경하거나 트리밍(trimming)을 가하는 행위 등은 저작권법상의 '동일성 유지'에 위배된다. 원칙적으로 법은 저작물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해 변경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림의 도록 속 작품들은 '원작 훼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심각하게 변형돼 있다. 영국 테이트 모던에 소장된 작품도 피해가지 못했다.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수차례에 걸쳐 도록 수정 혹은 재발간을 요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가가 교정을 보고 승인한 사항이니 귀책도 작가에게 있다는 식인 모양이다. 물론 작가는 인정하지 않는다. 양측 간 온도 차는 현재도 뚜렷하다. 중요한 건 도록 편집자가 김구림의 작품을 재료 삼아 자신만의 '예술 행위'(?)를 펼칠 동안 관리 감독의 주체인 미술관은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작가의 허락을 받았다는 미술관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학예사가 보기에 원작과 다르다면 바로잡았어야 옳다. 그게 전문가의 자세요, 작품의 소장 및 연구의 바탕이 되는 도록의 가치를 보호해야 할 국립기관으로서의 당연한 책무다. 문제는 소통 거부다. 미술관에서 발간한 것이니만큼 도록에 대한 최종 책임은 김성희 관장에게 있다. 그러나 그는 면담 요청에도 바쁘다는 이유로 묵살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진짜 그리 다망한가. 그럴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첫 관장으로 임명된 지 이제 반년 남짓이니 할 일도 많을 것이다. 다만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만남을 청해도 그랬을까. 김구림은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원로 작가다. 국제적 인지도를 지닌 한국 실험 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런 그가 지난달 28일 평창동 작업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엔 지난 2월 막을 내린 초대전 당시 출품하려던 작품이 불허되고, 작가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전시 구성 등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엉터리 도록의 출판과 대화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상처 난 자존심도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원인일 것이다. 현 사태를 바라보는 미술계의 시각은 곱지 않다. 오정은 미술평론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은 그 위상과 권위에 걸맞은 태도로 미술가를 존중하고 의견을 경청하며 갈등을 풀어나가는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시기획자 김찬동은 지난 1일자 한 칼럼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위작 시비로 절필하고 고국을 떠나 쓸쓸히 작고한 천경자 화백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적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곱씹어야 할 발언들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4-03 12:31:11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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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과 역할에 대한 정의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에게 예술은 자유의 표현이다. 벨기에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예술을 사회적인 규칙과 문화적인 구조를 나타내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예술의 개념은 복잡하고 다양한 해석을 포괄하기에 일반적으로 합의된 정의는 없다. 수 세기 동안 예술가와 사상가들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해왔지만, 예술 자체가 근거를 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명쾌한 답 또한 내놓지 못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역시 쉽게 규정하기 어렵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삶을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으나 정답은 아니다. 각종 재난의 시대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되묻고 디지털 시각 체제와 현실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는 것 자체를 예술의 역할로 꼽는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같은 이들도 있다. 이 밖에도 예술의 역할에 관한 판단은 여러 가지다. 누군가는 욕망의 표출과 행복의 실현을, 어떤 이들은 인간 존재 의미의 탐구 및 전달을 예술의 역할로 본다. 혹자는 타인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제공하거나 위안을 심어주면 예술 본연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 여긴다. 모두 맞다. 그것이 실체보다 외관을 강조함으로써 예술의 피상성과 소비주의 문화에 기여할지라도, 또는 기술을 예술의 전부로 착각하는 결과물이더라도 각각의 역할은 있다. 심지어 장식적이거나 풍수적인 작품들(미술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요소다)조차 어떤 이에겐 예술로써 제구실을 다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람마다 예술관이 다르고, 예술이 이해되는 방식에 관한 생각 또한 동일하지 않다. 미와 예술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게 답답하지만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다. 다만 예술의 정의와 역할이 무엇이든 굳이 예술가일 이유가 없는 것과 반드시 예술가이기에 가능한 것의 분간은 필요하다. 예술가와 예술가적인 것의 간극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메를로 퐁티(Merleau Ponty)는 사회 전반의 문제와 대면하고 현실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예술로 여겼다. 요셉보이스(Joseph Beuys) 같은 인물은 예술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에 충실할 것을 주문했다. 이들에게 예술(가)과 그 역할이란 사회 혁신의 동력이 돼야 한다는 공통된 믿음이 있다. 미술평론가 김영호의 말처럼 '예술은 당대의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따라서 예술은 사회적 진보와 문화적 다양성 촉진에 기여해야 하고, 부조리한 구조와 제도에 이의를 제기해야 하며, 순응적인 모든 문법에 저항하는 실천성을 보여줘야 한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술의 역할과 가치가 빈곤한 시대다. 편협의 극단에 이른 현재다. 예술가들은 보편성을 상실한 개인의 서사와 공동체적 이슈를 분간하지 못하고, 예술제도는 방향의 정립보단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바쁘다. 만약 그것이 바른길이라면 우린 예술(가)에 대해 잘못 배웠다. 그게 영원한 진실이라면 예술의 본래 기능이란 애초 존재 불가능했거나 위선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2월 같은 지면에서 나는 "예술가는 역사와 사회적 변화를 기록하는 존재다."라고 썼다. 예술작품에 대해선 그 자체로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인 문제에 대한 논평이자, 인류사에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토론을 촉구하는, 대화와 변화의 촉매제라 정의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 모든 건 결국 핵심 주체인 예술가들에 의해 선도돼야 한다는 것도, 정치를 비롯해 인간 삶을 억압하는 터전을 불태워 새싹을 돋게 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3-20 10:49:2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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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긍정과 부정 사이 ‘예술과 기술 융·복합’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은 예술적 표현과 창조적 과정을 기술적으로 통합 또는 교차시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미학체계를 구축하고 매체 및 표현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기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론 이전과 구분되는 형태의 예술에 기여할 수 있다.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은 표현의 한계를 희석시키며 예술가와 관객 모두에게 색다른 조형의 영역을 제시한다. 혁신적인 기술로 전통적인 미적 관행을 개선하거나 변형시켜 양자 간의 공생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아가 인터랙티브 설치, 가상현실(VR)과 인공지능(AI)을 이용한 작품, 디지털 플랫폼 등은 예술 작품과 관객 사이의 연결을 촉진하고 예술의 영향력 확대에 도움을 준다. 전자장치 내지는 디지털 매체, 기타 기술적 도구들이 예술의 과정과 결과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미디어아트의 선구자로 꼽히는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읽을 수 있는 도시'(The Legible City·1989)에서부터 지난 2월 영국 해이워드 갤러리에서 개막한 'When Forms Come Alive'에 참여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은 스튜디오 드리프트(Studio Drift)의 키네틱 작품 '샤이라이트'(Shylight) 등에 이르기까지, 그 수는 셀 수 없다. 여기엔 우리에게도 익숙한 미디어그룹인 에브리웨어(Everywhere)를 비롯해 예술가와 엔지니어, 프로그래머의 집합체인 팀랩(TeamLab) 등도 포함된다. 올라프 엘리아손(Olafur Eliasson), 에바 파브레가스(Eva Fabregas), 랜덤 인터내셔널(Random International), 미셀 블라지(Michel Blazy) 등의 다양한 작업도 마찬가지다. 이들 작품은 관객들에게 보다 몰입적, 촉각적, 상호작용적인 예술경험을 선사하며 예술가들이 어떻게 기술을 활용해 전통적인 예술 관행을 허무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통한 고전적 레거시 아트(Legacy art)에서부터 이머시브 아트(몰입 체험형 예술), 증강현실(AR) 등의 최첨단 도구를 이용한 작품은 장르 간 학제 간 구획 없는 동시대미술의 흐름과도 맞닿는다. 인터랙션(Interaction)을 기반으로 한 사용자 친화적인 미술과,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 방점을 둔 공간인 인터휴먼 스페이스를 추구하는 이들에겐 가장 적합한 전시모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은 다양한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잠재적 부작용도 없진 않다. 그중에서도 주목해야할 건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예술'에 대한 의미를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시각적 만족'에 무게를 두거나 자본주의 시장이 마구잡이로 전개하는 상업화의 물결 속에서 유영 중인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전시들이 그 예이다. 이는 자칫 '기술이 곧 예술'이라는 잘못된 예술관을 심어줄 수 있다. '기술이 예술의 가치'인 냥 여기는 오해의 여지도 있다. 물론 예술가들이 지나치게 도구화하고 의존함으로써 발생하는 고유 자생적 표현 능력의 상실과 피상적 감각체계의 학습에 따른 지적진화의 퇴행을 가져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예술과 기술 융·복합에 대한 관심은 기술주도형 사회에 살고 있는 동시대에선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기술을 작품에 수용하면서 동시대 현실에 공감하고 급변하는 예술 환경에 적응하는 예술가가 증가하는 것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하지만 기술은 어디까지나 시대성을 텃밭으로 한 미의식을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에 불과할 뿐 예술의 전부는 아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3-06 14:02:3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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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지역과 문화권력

글로벌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술은 이제 경계를 넘어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이 맞물려 상호작용하고 융합되는 과정 속에 자리한다. 급진적으로 진화하는 예술 개념과 방식, 매체는 장르 간 학제 간 구분 따윈 진작 소멸시켰으며, 기존의 모든 틀마저 해체하고 있다. 여기엔 국가라는 사회집단과 지역이라는 지리적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예술만 놓고 보면 우리는 아직 '지역은 지역'이라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연고주의와 정주주의에 지역의 문화생태계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 권력의 진부한 사고가 배합된 결과다. 어디서나 마주하는 지역주의 망령은 곧잘 예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절대 기준인 예술성조차 배척한다. 지역주의에 기생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잉태한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심사한다고 치자. 어느 지역을 가도 나름 힘 좀 쓴다는 인사들이 한두 명씩 심사위원으로 앉는다. '지역을 가장 잘 안다'(?)는 게 이유다. 물론 자격 여부는 중요치 않다. 동시대미술의 흐름에 둔해도 상관없다. 작든 크든 지역 내 문화 권력이라는 위치는 미술에 관한 전문성마저 뛰어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미술기관에 능력과 무관한 낙하산이 투하되거나, 심도 깊은 논의의 장에 엉터리들이 들어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미술용어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훨씬 전문가인 작가와 작품을 평하는 촌극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이뿐 아니다. 지원금을 주든, 공적 공간에 입주하든 지역에 가면 일정한 수의 관내 작가를 반드시 뽑아야 한다. 지역민들의 세금이니 지역 작가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문화 권력의 입김이 규정이 되고 정책이 된 탓이다. 그 작가들이 공적 예산을 받을 만큼의 역량과 재능을 갖췄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지역작가'라는 네 음절은 남들에겐 엄격한 기준조차 무력화하기에 충분하다. 투명성, 합리성, 공정성, 발전 지향성을 원하는 공공기관들은 괴롭다. 특히 고달픈 건 담당자들이다. 나름의 '카르텔'을 형성해 각종 지원금과 전시기회를 독차지하다시피 하면서도 불만이 생기면 온갖 꼬투리를 잡는 문화 권력을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래도 인내가 최선이다. 만약 지역 내 후배가 어떤 혜택을 받고 선배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기관 대표나 임원 대상으로 별의별 민원을 다 내니 참는 게 상책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게 누구든 소위 예술을 하는 이들이라면 언제나 새롭고 열린 태도를 지녀야 한다. 수구적 지역주의를 넘어 보다 포괄적이고 융합적인 관점을 채택해야 맞다. 또한 지역 내 문화 권력자들이 진짜 해야 할 일이란 지역만 벗어나면 아무 힘도 없는 권력의 알량함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예술가들이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지역이 아닌 대한민국의 작가들이 상호교류하고 협업할 수 있도록 힘쓰는 데 있다. 지역 내 인사들은 입버릇처럼 '지역성'을 말한다. 그러나 문화 권력의 대부분은 지역성과 지역주의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특정 지역의 정체성과 독자성이 지역 이기주의인 것인 양 곡해하곤 한다. 예술에서의 지역성은 하나의 화두이자 연구가 될 순 있어도 문화 권력의 존재방식을 정의하는 건 아니다. 문화 권력은 예술이 지역성을 토대로 창의적인 작품과 경험을 창출하고 예술가들이 보다 넓은 무대로 영역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하는 배경이 돼야 마땅하다. 지금처럼 예술의 가치기준까지 무너뜨리는 지역안배주의를 말하는 건 꽤나 후진적이다. 그 후진성을 알면서도 이어간다면 예술이 지역과 사회, 문화의 진정한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은 허상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2-20 14:16:17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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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가라는 존재

예술가라는 이유만으로도 특별하게 예우한다는 한 국외 이주 작가의 오래전 발언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이 우리네 삶의 질을 높이는 존재로 (예술가들을) 대우하기에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부럽다. 한국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한량(閑良)에 준한다. 사회적 신분은 그저 그렇고 지위 역시 불안정하다. 아직도 누군가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자발적 무직자' 정도로 본다. 가난하게 살면서 쓸모없는 일을 하는 부류로 단정하기도 한다. 가난한 건 맞다. 남들의 두어 달 월급이 연간 수입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는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술인 실태조사'(2021년, 14개 예술 분야 5000명 대상) 결과에 따르면 월 평균수입이 100만원 이하라고 응답한 예술인이 86.6%에 달했다. 연간 평균 수입이라야 755만원에 불과했다. 가난한 건 분명하나 예술가들이 넋 놓고 있는 건 아니다. '스타벅스'엔 감히 갈 수 없으나(국민의힘 한동훈·장예찬과 같은 천박한 계급주의자들의 말에 의하면 연소득 4500만원 이하의 서민이 스타벅스를 이용하는 건 사치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 무던히 애쓴다. 겸업이 보편적일 만큼 두세 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작품을 팔기 위해 고심한다. 예술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비즈니스를 공부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며 머릴 싸맬 때도 있다. 녹록하지 않다. 누구나 제프 쿤스(Jeff Koons)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돈 좀 벌겠다고 미술시장을 기웃거리지만, 괴롭다. 미적 신념은 무너지고 심적 체제의 붕괴를 느낀다. 부유층의 취미와 기호에 부응하는 형식주의에 빠진 채 예술의 허위성을 찬양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환멸까지 인다. 당장 해결해야 할 민생고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현실은 쓰다. "팔기 위해 만들지 말고 만든 것을 팔아야 한다."는 말은 야속하다. 예술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실질적인 위협으로서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나'라는 정체성마저 혼란스럽게 만든다. 모든 게 어렵다. 선택은 쉽지 않다. 예술가로서의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병행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예술가들은 예술을 한다. 베짱이 같은 존재라고 폄하해도 그림을 그리고 작업이란 것을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따라, 알 수 없는 이유로,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일부는 예술이 다른 분야처럼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유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이 인간의 경험과 감정,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예술가의 인격과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는 창조적 활동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과 쓸모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안다. 예술가는 역사와 사회적 변화를 기록하는 존재다. 기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문화와 사회의 진화에 기여한다. 그들의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 자체로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인 문제에 대한 논평이자, 인류사에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토론을 촉구하는, 대화와 변화의 촉매제다. 이처럼 예술가는 문화적, 정서적, 지적 발전에 필수적인 통찰력을 제공하고 인간 경험의 풍부함과 다양성에 도움을 준다. 작품을 통해 구성원 간 공감과 연결을 촉진하면서, 경제의 중요한 기여자로서 위치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린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꽤나 중요한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자긍심과 보람을 갖도록 독려해야 옳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2-07 13:43:42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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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상품과 작품

상업미술작품의 지향점은 명확하다. '돈'을 버는 것이다. 생산의 목적도 이익이다. 따라서 대중의 취향과 선호도를 중시한다. 미술이 인류 공통의 문제에 어떠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는 관심 영역이 아니다. 어떻게든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고 구매 욕구를 자극해 '지갑'을 열도록 하면 그만이다. 상업미술작품은 기능성과 효율성을 따진다. '화폐'로 치환해야 할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장식적이다. 색채와 구성 역시 시각적 화사함을 지닌다. 앙증맞은 캐릭터와 귀여운 동물 형상이 곧잘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여기엔 그래야만 대중이 좋아할 것이라는 나름의 판단이 개입돼 있다. 상업미술작품은 엄밀히 말해 '상품'이다. '작품'은 문화 공공재로서 예술성을 추구하고 감동이나 영감을 주는 반면, 상품은 시각적 만족감이 먼저다. 작품은 예술가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독창성을 중시하지만, 상품은 시장이 원하는 일정한 규격과 방식 아래 존재한다. 상품의 가격은 마켓(Market)의 수요와 공급, 생산 비용, 소비자 취향 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상징적 재화인 작품의 가격은 '사회적 의사표시로서의 미술'의 경제성에 맞춰진다. 일반 경제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다. 작품은 사회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예술가의 정신으로 세계를 탐구한 결과이다.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당대 환경에 가장 적합한 모더니티를 구축하기 위한 '논의의 매개'이기도 하다. 단순히 목적 없는 쾌락인 '미(美)'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질문과 자문이 교통하는 가교인 것이다. 상품은 그렇지 않다. 실체보다 외관을 강조함으로써 피상성과 소비주의 문화에 기여한다. 사회 전반의 문제와 대면한 채 현실의 삶에 참여하는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미학적·미술사적 혁신과도 무관하다. 사실상 돈 있는 자들의 기호에 의존하고 순응하는 것이 전부다. 이처럼 상품과 작품은 가치와 의미, 역할 면에서 판이하다. 서로 다른 목적에 봉사하고, 서로 다른 의도에 의해 추진되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치가 매겨진다. 하지만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술전문가라는 사람들마저 매력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것과 공동체의 삶과 커뮤니티의 정체성, 사회적 현상을 투영하는 작품을 분별하지 못한다. 심지어 일부는 장터에서의 인기가 미술의 척도라고까지 생각한다. 소비중심주의적인 상품을 '시대 흐름'의 주체로까지 해석한다. '트렌드'와 등치시키며 말이다. '시대 흐름'과 '트렌드'는 개념에서 양자 간 간극이 있다. 전자가 한 시기에 걸쳐 일어나는 광범위하고 총체적인 움직임이라면, 후자는 일시적이며 특정적인 대중의 선택, 찰나의 유행, 스타일에 국한된다. 그 둘을 동일 선상에 놓는 건 무리다. 트렌드가 시대 흐름을 이끄는 전위(前衛)란 어불성설이다. 그럴 수도 없다. 상품은 상품이고 작품은 작품이다. 물론 상품일지라도 고유성, 비동일성을 지닌다면 그 또한 작품이 될 수 있다. 작품으로 출발했으나 상품에 불과해지는 경우도 없진 않다. 경계가 불분명해진 오늘날 더욱 그렇다. 더구나 시대에 따라 미술의 의미도 바뀐다. 다만 어떤 시대가 됐던 작품은 당대성이라는 화두를 놓은 적이 없다. 상품은 그때그때 취향 공동체에 읍소하며 잘 팔면 됐다. 특히 작품은 사회 발전을 향한 담론 형성, 건강한 방향을 촉진해왔지만, 상품은 단지 자신의 이익이 다였다. 상품과 작품을 혼동해선 안 된다. 비록 자본주의에 의해 작품의 지위가 모호해지고 예술사 외 시장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생존을 다퉈야 하는 처지가 됐어도 본질은 불변한다. 여전히 상품은 상품이고 작품은 작품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1-23 11:03:15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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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측근 심기'가 상식이자 정상인 사회

미술인들의 다수는 미술관장이 되는 방법으로 학연과 지연, 연줄, 처세 등을 꼽는다.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능력은 기준이 아니다. 그러니 누가 봐도 미술관장에 부합한다고 평가받는 인사들은 아예 지원조차 하지 않는다. 투명하고 객관적인 절차로 선임된다는 믿음 따윈 없다. "어차피 내정되어 있을 텐데"라는 인식이 크다. 그리고 이는 대체로 사실이다. 실제로 검증된 전문성과 무관한 인물이 정치권력 혹은 지방자치단체장과의 '친분' 덕분에 관장자리를 꿰찬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가족끼리 잇따라 관장직을 '세습'해 논란의 중심에 서거나 후보에서 탈락한 이가 임면권자와 같은 계열이라는 이유로 기사회생한 후 관장에 선임된 예도 있다. 전 직장에서 심각한 물의를 일으킨 인사가 다른 미술관장으로 영전한 경우도 똑같다. 최근 불거진 대구미술관장 선임 잡음도 그 연장이다. 지난 1일 취임한 노중기 관장은 홍준표 대구시장과 고교 동기다. 전시 기획이나 기관 운영에 대한 경험이 없다. 많은 이들이 전문성과 행정력에 의문을 갖는 이유다. 더구나 그는 지난해 8월 막을 내린 대구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 전시 중이던 일부 작품을 떼곤 홍 시장의 초상화를 내걸어 도덕성 시비에 휘말린 바 있다. 미술인들은 지난 2일 <대구광역시 대구미술관 관장 선임에 대한 미술인 항의 성명>을 냈다.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이 없고, 부도덕한 단체장이 친분을 내세워 독재적이고 상식 이하의 인사를 했다"며 대구시를 비판했다. 대구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측근 챙기기, 시정 사유화"라고 주장하며 노 관장의 자진 사퇴와 임명 철회를 주문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2022년 7월 1일 취임식에서 "오랫동안 대구를 지배했던 수구적 연고주의와 타성에서 벗어나 더 개방되고 자유로운 자세가 중요하다"며 "혈연과 학연, 지연에서 벗어나 능력이 검증된 유능한 인재를 모시겠다"고 했다. 지난해 12월엔 "대구시정 전반에 만연한 기득권·부패 카르텔을 깨야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번 관장 임명 건으로 그의 발언은 단지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자신이 만든 '학연 카르텔'로 인해 결국 홍 시장 본인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것을 시인한 꼴이 됐다. 이와 관련해 오정은 미술평론가는 지난 1월 4일 블로그에 올린 '카르텔 속 미술관 관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시장의 초상화를 그려 그 시장 산하에 있는 미술관에 전시한 화가가 얼마 뒤 미술관 관장으로 임명된 것은 상식 수준을 벗어난다"고 꼬집었다. 다른 글에선 "시민을 위한 공공성보다는 특정 정계 인사와의 친분을 드러내고, 전문성을 무시한 채 재편되는 관료 조직의 위압을 보여준 미술관"이라며 개탄했다. 그러나 "국공립미술관의 임원직이라면 관련 경험 등 납득할 만한 근거하에 채용과 인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오 평론가의 바람은 공허한 메아리인 게 현실이다. 언제부터인가 갖가지 연(緣)에 의한 측근 심기가 상식이자 정상인 것처럼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정부, 지자체를 불문한다. 미술관장뿐만도 아니다. 지역문화재단 대표나 박물관장 자리 등도 매한가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젠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회가 바른 사회인 냥 비춰질 정도다. 어쩌다 세상이, 문화예술계가 이 지경이 됐을까.■ 홍경한(미술평론가)

2024-01-10 14:17:4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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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문화민주주의’의 후퇴 속 저무는 한 해

한 해가 저문다. 하지만 전년 대비 달라진 건 없다.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윤석열은 대통령이다. 아직 3년 반이나 남았다. 희한하게도 유독 이 부분에서만 시간이 더디다. 느린 세월의 유속만큼 다양한 일들이 있었으나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건 있다. 바로 지난해 9월 UN총회에서의 '바이든 날리면' 의혹과 16번의 해외 순방 동안 약 600억원을 비용으로 지출했다는 것, 그리고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논란 등이다. 관계개선을 명분으로 한 일본에 대한 일관된 저자세와 과거사 '퍼주기' 정책도 상기할만한 장면이다. 이 중 '바이든 날리면'은 또다시 청각테스트를 해야만 하니 그냥 넘기자. '김건희 특검법'이 발의된 직후 발생한 윤 대통령의 아내 김건희의 '명품백' 수수 사실도 지나가자. 수해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지난 7월 두 번째 나토 순방에서조차 경호원과 수행원 16명을 대동하고 명품숍에 들릴 만큼 '명품'에 남다른 애착을 지닌 그다. 짚어봐야 할 것은 해외순방이다. 윤 대통령은 약 1년 반의 임기 동안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며 전 세계를 누볐다. 순방 비용은 올해 책정된 예산 249억원을 다 쓰고도 모자라 예비비 329억원까지 추가로 끌어 썼다. 같은 기간 이명박과 문재인 전 대통령도 비슷한 횟수로 해외에 나갔지만 순방비는 윤 대통령이 역대 최대다. 문제는 순방 효과다. 일각에선 막대한 경제 성과를 말하지만 많은 수가 '가계약'(양해각서, MOU)이다. 그 사이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65조원가량 줄었고, 윤 대통령이 진두지휘한 부산엑스포(2030세계박람회)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패하며 막을 내렸다. '잭팟' 운운하던 폴란드 방산수출도 무산될 처지에 놓였다. 그 외에도 많다. 외교적 성과가 거의 없거나 가성비가 최악이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의 외교 개념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이다. 지난해엔 16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태원 압사 참사가 있었다. 정부는 예방과 대비,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12월 현재까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찾아볼 수 없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노동자로 일하다 숨진 김용균 씨 사건도 마찬가지다. 24살의 청년이 작업 중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으나 원청 기업 대표를 비롯해 관련자 중 실형을 선고받은 이는 아무도 없다. 언제나 그러했듯 대한민국엔 피해자만 있다. 작년이나 올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또 있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대치적 대북 상황, 물가상승과 성장률 둔화, 고금리에 따른 경기침체는 현재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없다. 그만큼 올 한해 서민들의 삶은 버겁고도 퍽퍽했다. 미술계는 어떠했을까. 미술 시장의 침체를 빼면 1년 전과 대동소이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유인촌이 다시 문체부 장관으로 컴백했다는 것과,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새롭게 선임돼 업무에 들어갔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이점은 발견하기 어렵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광주비엔날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등 여러 국제행사가 의무적으로 치러졌으며 두 번째 한국을 찾은 프랜차이즈 아트페어인 영국의 '프리즈'는 또 한 번 '대박'을 터뜨리며 돈을 쓸어갔다. 하지만 지난해와 다를 바 없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위기에 있다. '땡윤 뉴스'의 부활은 5공 시대로의 회귀를 떠올리게 하고 언론사들에 대한 검찰의 빈번한 압수수색은 이제 새로운 뉴스거리도 아니게 됐다. 전문성 없는 '친윤 검사'의 방송통신위원장 내정은 언론 장악을 위한 포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풍자한 전시에 참여한 예술인만 특정해 정부 지원금 수령 내역을 뒤지는가 하면 국회 전시 예정이었던 정치 풍자 미술 작품 기습 철거,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 가수 이랑 공연 배제 등 통제와 표현의 자유 침해는 이미 일상으로 들어와 있다. 그만큼 문화민주주의도 후퇴하고 있다. 그 후퇴의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2-12 13:14:22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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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죽음과 탄식의 강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에는 '쾌락의 정원'(Garden of earthly delights)이라는 걸작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Hieronymus Bosch)가 15세기경 나무판 위에 유채로 그린 세 폭짜리 제단화(Triptych)다. 바로크 시대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작품 '시녀들'(Las Meninas), 그리스 신화 속 세 여신을 그린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삼미신'(The Three Graces) 등과 함께 프라도를 대표하는 주요 작품이다. 대 피테르 브뤼헬(Pieter Bruegel the Elder)의 '뒬러 흐릿'(Dulle Griet) 등의 작품에서처럼 여타 미술 흐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쾌락의 정원'은 괴이하고 난해하며 신비롭다. 몽환적인 구성과 분위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과 상상력을 촉발한다. 특히 수만 가지 욕정과 욕망, 타락의 징후들을 하나로 모아 놓은 장면에선 시각적 흥미로움과 더불어 인간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세 개의 그림 중 가장 왼쪽은 '낙원'이다. 선악의 구분 없는 에덴동산(Garden of Eden)이 배경이다. 주인공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이들을 축복하는 창조주다. 작품 위 호수를 비롯한 초현실적인 풍경은 이상세계(Utopia)를 나타내며 신을 중심에 둔 두 인물은 그 자체로 인간의 기원이자 정욕의 절제 및 출산을 통한 성의 순수성, 건강한 생명성을 통한 아름다운 인간사를 말한다.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중간그림은 '현실의 쾌락'을 다룬다. 그림 속 인간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비유기적 물체들과 암흑을 상징하는 올빼미 등의 각종 짐승들에게 둘러싸여 난잡한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유혹과 방탕함이 하나로 뒤섞인 아수라장 속에서 향락을 즐기느라 정신없다. 그림 곳곳에 식욕, 육욕, 죄악이 가득 차 있다. 맨 오른쪽 그림은 앞선 이야기의 결말이다. 타락과 방종의 인간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저울'은 인간의 죄를 잰다. 짐승들은 사람들을 괴롭힌다. 어떤 것은 사람을 하나씩 잡아먹은 후 기포에 가둔 채 생지옥이랄 수 있는 아래 구멍으로 내려보낸다. 또 다른 것은 사람을 꼬치처럼 꿰어 나른다. 향락에 찌든 사람들은 몸이 잘리고 찔려 혼비백산한다. 이제 낙원에서의 인간은 온데간데없다. 추하고 고통스럽다. 당시 그림의 주제는 대부분이 '권선징악'이었다. 주로 계몽, 선도, 교화, 파종의 목적으로 쓰였다. 낙원과 인간계, 지옥을 순차적으로 형상화한 '쾌락의 정원'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 지침도 같다. 탐욕과 교만은 죄를 짓는 것이요, 도덕적·윤리적·종교적 가치에 반하는 무분별한 행위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원인임을 '경고'한다. 하지만 보슈의 경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인간은 여전히 탐욕의 바벨탑(Tower of Babel)을 쌓고 있다. 탐욕의 상징인 '돈'에 정신과 마음을 뺏긴 채 살아가며, 허세와 '오만'도 넘친다. 쾌락을 추구하는 무절제하고 감각적인 '욕망' 역시 끝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단테의 《신곡》(La commedia)에 나오는 인간 '악의 본성'으로 갈음된다. 악의 본성은 현실에 만연해 있다. 온갖 이유로 자행되는 '전쟁'이라는 이름의 학살, 이타성을 상실한 갈등과 대립, 일상에서조차 빈번한 유무형의 폭력이 그렇다. 그 본성은 무능하고 파렴치한 정치, 진영에 따라 양심과 정의의 온도마저 달라지는 위정자들, 태만하나 권력욕에 눈이 먼 어용 지식인들의 난립, 불평등과 부조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욱 짙어진다. 하지만 저항은 없다.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할 이성과 철학이 들어설 자리도, 모든 질병의 치료제인 사랑도 없다. 그렇게 우린 다 같이 저승을 감싸고 흐르는 죽음과 탄식의 강 아케론(Acheron)을 건너 모든 희망이 사라진 깔때기 모양의 지옥으로 향하는 중이다. 점점 더 청동으로 된 지옥문을 향해 속도를 내고 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1-29 13:44:11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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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레지던시'의 위기

레지던시(Residency)는 예술가들이 예술창작 공간에 일정 기간 거주하며 작품 활동과 국내외 예술 교류, 전시, 학술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제로 한 프로그램을 뜻한다. 작가들은 1년 안팎의 입주 기간 동안 전문 인력의 조력과 작업실, 제작 비용, 설비, 시설 등을 지원받는다. 국내 최초의 레지던시는 1995년부터 개관한 광주광역시의 '팔각정스튜디오'다. 공원관리실을 개조해 사용했다. 2008년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창작스튜디오 정책이 본격 전개되면서 현재는 200여개의 공사립 레지던시가 운영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대표적인 레지던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문화재단의 금천예술공장, 인천문화재단의 인천아트플랫폼 등이다. 서울문화재단의 서교예술실험센터와 신당창작아케이드, 부산문화재단의 홍티아트센터, 청주시립미술관의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대전문화재단의 테미예술창작센터도 주목받는 레지던시에 속한다. 이 중 인천아트플랫폼은 레지던시를 통해 예술가의 존재 및 창작 활동에 대한 인식과 가치의 사회적 '공유'에 앞장서 왔다. 15년 가까이 예술인 역량 강화, 국제 교류, 지역민 대상 예술 교육 등을 진행하며 낙후된 원도심을 새롭게 변모시킨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인천의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특성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를 높이고 창작 활동에 반영할 수 있었던 '리서치투어'를 포함해, 문화예술 활동으로 평화도시로서 인천과 서해 5도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가고자 마련된 '백령도 평화예술 레지던시' 등은 플랫폼만의 색깔 있는 기획으로 꼽힌다. 하지만 인천아트플랫폼은 현재 존립 위기에 직면했다. 인천시가 플랫폼의 주요 목적 사업인 레지던시 기능의 잠정 중단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의 공론화 과정조차 없었고 대체할 공간 또한 마련하지 않은 채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계는 사실상의 폐지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인천아트플랫폼 외에도 레지던시 기능을 중단하거나 시설 자체를 없애는 기관이 늘어나면서 지난 30여 년 동안 지역민의 거점 공간이자 예술인 등용문으로 인정받아온 제도 자체가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우연인지 흐름인지 헤아리긴 어려우나 창작공간 생태계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는 형국임엔 틀림없다. 실제로 지난 4월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이 운영을 맡았던 대구 1호 레지던시인 '가창창작스튜디오'가 문을 닫았다. 2009년부터 지역 예술단체 및 예술인, 시민단체의 자발적 참여로 홍대 앞 예술생태계 활성화에 기여해온 서교예술실험센터도 운영 종료 수순을 밟고 있다. 경기문화재단의 경기창작센터는 2021년 레지던시 입주작가 공모를 취소한 이후 운영을 멈춘 상태다.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역시 현 부지에 제2문학관을 건립하기로 하면서 지속성이 불투명해졌다. 이 밖에도 국내 주요 레지던시로 꼽히는 곳들마저 인력과 예산을 대폭 축소하는 추세다. 이에 미술계는 '정리'의 전 단계가 아닌지 우려한다. 저변을 넓혀가고 있는 'K아트' 바람에 역행하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레지던시의 본질은 창작 진흥이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거푸집으로, 주민의 문화적 질 향상과 사회문제 해결 및 사회통합을 위한 담론 구축에도 크게 기여해왔다. 특히 사회적 창의성을 비롯한 미적 다양성 확대에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만큼 레지던시의 의미와 가치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뿐더러, 오랜 시간 한국 예술 창작의 기본 토대가 돼 왔다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존립 여부의 '키'를 쥔 일부 정책 실행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레지던시를 다다익선식 성과주의가 결합된 행정 사업의 연장으로 본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를 밀어낸 자리에 스타벅스 입점을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은 인천시의 사례처럼 산업 영역에서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우선한다. 레지던시의 위기도 여기서 비롯된다. 문화예술에 대한 몰이해와 천박한 가치관을 지닌 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레지던시의 앞날은 밝지 않다. 아니, 건강한 문화예술의 미래를 기대할 수가 없다. 해결 방안은 결국 문화예술에 관한 올바른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지자체장을 잘 뽑는 것뿐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후진국으로 향하고 있는 작금의 나라 꼬락서니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투표의 중요성을.■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1-16 13:03:29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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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건축물미술작품제도' 폐지가 답이다

한국엔 '건축물미술작품제도'라는 게 있다. 이 제도에 따라 1만㎡ 이상 건축물을 신축 및 증축할 경우 건축주는 의무적으로 건축비용의 일정 금액(0.1~1%)을 회화, 조각, 공예 등의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 작가들의 생존권 보장과 도시문화 환경 개선, 생활공간의 질적 수준 제고 등의 명목으로 만들어졌다. 1972년 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을 모태로 한 이 제도에 의해 전국 곳곳에 세워진 공공미술작품(조형예술품 포함)만 2만여 개를 웃돈다. 적게는 개당 1000만~2000만원에서 많게는 10억원이 넘는다. 모르고 지나쳐서 체감이 안 될 뿐 사실상 우리 주변에 '돈 덩어리'가 즐비하게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제도, 비리와 부정의 온상이다. 리베이트가 보편화돼 있어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작품 하나 설치하려면 작가는 매개 업체에 대략 30%를 떼 줘야 한다. 이면계약을 통해 건축주에게 제작비의 절반 내외를 되돌려주는 것이 관행이다. 작가는 산출가의 절반값에 작품을 만들어야 하고, 작가로부터 받아 꿍친 돈은 불법 비자금이 된다. 대다수의 작가는 제도의 혜택과 거리가 멀다. 전문 대행업체와 소수의 작가들이 독점하다시피 하니 기회도 적다. KBS의 최근 보도에서처럼 그나마도 발주자인 건축주가 특정 작가를 노골적으로 밀어주거나 작가로서의 경력도 없는 오너의 친인척 작품까지 구입하는 부조리가 팽배하다. 전문가인지 의심스러운 자들이 앉아 있는 심의위원회는 있으나마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설치된 작품들은 대개 눈 뜨고 못 볼 수준이다. 아파트를 포함해 거리에 있는 높은 빌딩 앞 조악하거나 흉물스러운 작품들의 다수는 심미적 환경 조성이라는 제도의 본래 목적과 상관없다. 이런 현실에서 공공재로서의 건축물미술작품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정부는 건축물미술작품제도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2011년 도입된 '선택적 기금제'가 대표적이다. 건물에 직접 미술품을 설치하는 기존 방식과 더불어 설치비용의 70%를 문예진흥기금으로 출연할 수 있도록 이원화한 것이다. 하지만 기금제를 선택하는 건축주는 얼마 되지 않는다. 원인은 사유재산 확보 차원에서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건축주들의 고정된 의식에 있다. 다시 말해 건축물에 작품이 들어서면 건축물의 가치가 올라가고 그곳에 설치된 작품은 자기 것이 되지만 기금출연은 그냥 내버리는 돈처럼 여기는지라 건축주들이 기금제를 잘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은 환원 요율도 기금제 선택을 꺼리게 한다. 기금제를 이용할 경우 미술작품을 직접 설치할 때 비용의 100분의 70만 납부하면 되나, 이면계약 등을 통해 그보다 훨씬 낮은 예산으로도 설치가 가능하다. 이는 기금제에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는 실질적인 이유다. 혹자는 건축물미술작품제도의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현명한 해법은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다. 그동안 별별 수를 다 써봤지만 소수의 업체와 거간꾼들의 배만 불리는, 백약이 무효한 제도임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동시대 공공미술의 흐름과도 동떨어진 낡은 제도라는 사실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로 처음 도입된 1970년대는 어땠을지 몰라도 현재로선 현장과 동떨어진 몹쓸 제도다.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남는 것 없어도 당장의 민생고 해결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작품을 만들어야만 하는 작가는 당연하고, 거지발싸개 같은 작품들을 매일 봐야 하는 시민 모두에게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 특히 어째서 사유재산을 미술품에 사용하라고 강제하는지 이해 못 하는 건축주에게 당신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곧 국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확대시키는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강조한들 그들이 과연 얼마나 공감할까. 역시 폐지가 답이다. 그래도 꼭 필요하다면 아예 '의무기금제'로 바꾼 후 그 돈으로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는 게 낫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1-01 11:10:1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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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하기 어려운 시대

당대 예술 환경 중엔 몹쓸 것이 많다. 예술 검열도 그 중 하나다. 최근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풍자한 전시에 참여한 예술인만 특정해 정부 지원금 수령 내역을 뒤져 파문을 낳았다. 여당 대표가 한 가수를 찍어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고등학생이 그린 만화 '윤석열차' 논란은 표현의 자유가 대한민국에 과연 존재하는지를 되묻게 하는 예였다. 예술 검열은 예술가의 창의성과 작품의 다양성을 제한한다. 또한 예술가의 자기검열을 심화시킴으로써 제한 없이 이뤄져야 할 창작 활동 자체를 위축시킨다. 수십 년간 투쟁해 얻은 '말할 수 있는 권리'까지 흔드는 행위라는 점에서 일련의 검열 사건은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문공부 국장이 촬영현장까지 찾아와 양주를 마시며 시시콜콜 검열하던 영화 '거미집' 속 1970년대와 현재가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도긴개긴이다. 위의 사례에서처럼 지금도 예술 검열은 전방위적으로 교묘히 지속되고 있으며, 정부와 기관에 비판적인 예술인을 배제하는 일도 이어지고 있다. 환경이 고약하면 어디 기댈 곳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편가르기식 이념에 찌든 어용지식인 집단을 비롯해 미술인들의 권익을 위한다며 별의별 단체가 존립하고 있으나 대개는 자질과 전략, 현실감각이 부족하다. 그런 그들에게 어떤 희망적 대안을 기대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대한민국의 주요 정책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 그런데 장관 운이 없다. 그것도 지지리 없다. "나랏돈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말이 되나."(8월 28일, 조선일보)라며 공공지원을 볼모로 예술가들을 길들이고 사상을 정화하겠다는 유인촌 같은 사람이 문체부 장관이 되는 시대라서 그렇다. 이런 상황에선 제아무리 깨어있는 눈과 정신으로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말한들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예술가들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건 성공의 정치다. 미술을 통한 의미적 담론생산은 옛말이다. 그저 어떻게 하면 미술로 돈을 벌 수 있을까를 고심하지만 사회적 의사표시로서의 미술의 경제성이 곧 미술품의 가격이고, 그것의 생산 및 소비순환 방식이 예술경제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미술판이 부르주아 계급의 놀이터가 되고 미술이 그들의 고급 장난감으로 전락하는 양상과 더불어, 부의 축적만 이루면 된다는 양 아무런 책임감 없이 '상품'을 생산하는 데 열중하는 예술가들을 보면 안타깝다. 조변석개하는 취향 군락에 의지해봤자 10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점에서 딱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뭔 의견이라도 내놓을라치면 정치·제도 권력이 언제 어느 때 목을 조여 올지 알 수 없는데다,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급급한 경제현실이다 보니 유무형의 올가미를 피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개인을 나무랄 순 없다. 결국 이래저래 예술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럼에도 명성의 박제화와 성공의 정치 사이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묵묵히 세상을 기록하고 낭독하는 작가들이 있다. 정치적·사회적 관계망에 거주하는 인간들이 겪는 삶의 냉혹함을 통찰하고 생존자들을 위로하며 당대 긴급한 문제들을 표상화하는 이들이다. 마침 순천의 문화공간인 '기억공장 1945'에서는 10월 26일까지 박치호 작가의 초대전이 이어진다. 서울의 '정문규미술관'은 같은 날부터 한 달 동안 김재홍 작가의 초대전을 연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관람하길 권한다. 동시대 정치와 문화, 사회, 정서를 관통하는 예술가들의 강력한 '논평'을 만날 수 있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0-18 11:58:2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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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저항' 상실한 한국의 비엔날레

지난 달 1일 청주공예비엔날레와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일제히 개막했다. 같은 달 7일에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막을 올렸으며,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와 대구사진비엔날레도 21일과 22일 각각 문을 열었다. 오는 14일에는 지역 환경을 반영한 미술축제인 부산바다미술제가 약 한 달간의 여정에 들어간다. 비엔날레(Biennale) 홍수다. 서울, 광주, 부산, 대구, 창원, 청주 등 웬만한 지방자치단체치고 비엔날레 하나 없는 곳 없다. 전 세계 200여개의 비엔날레 중 거의 10% 이상을 차지할 만큼 한국은 비엔날레로 넘친다. 가히 '비엔날레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수만 많지 동시대미술의 실험실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비엔날레는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부분 예술의 기능과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장(場)과도 거리가 멀다. 글로벌 흐름 속에서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타진하고 문화적 맥락에서의 담론 생성에 얼마나 혁신적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한국의 비엔날레는 고유의 정체성이 약하다. 그냥 일정한 주기마다 한 번씩 열리는 관 주도형 행사다. 시기는 겹치고 주제 또한 유행에 부합한다. 2018년엔 비엔날레에 '북풍'이 불기도 했다. 당시 국정 키워드는 북한이었다. 최근엔 너도나도 기후, 재난, 여성, 이주, 소수자, 난민, 팬더믹(pandemic) 등을 꺼내놓고 있다. 그러니 내용도 거기서 거기다. 새로운 스타 및 작가 발굴의 플랫폼으로서 기능은 제대로 할까. 그렇지 않다. 외국 작가들이 참여하지만 국제행사에 부합하기 위한 장치일 뿐 지역작가 안배주의가 만연하다. 비엔날레급이라고 볼 수 없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은 외국인 감독이 비엔날레를 맡아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비엔날레란 자신만의 카르텔을 더욱 견고히 하는 세(勢)의 무대이자 더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한 '포트폴리오'인 경우가 많다. 이 밖에도 억지로 녹여내는 지역성과 나열에 그치는 전시 형식, 어설픈 관객 참여 프로그램 등도 문제로 꼽힌다. 비엔날레가 문화기반시설처럼 변질되자 대중은 물론 전문가들의 관심도 저하되고 있다. 실제 많은 이들은 이제 광주비엔날레보다 프리즈 아트페어(Frieze Seoul)와 같은 대형 상업전시에 주목한다. 미술계 헤게모니마저 아트페어가 주도하는 형국이다. 세계 유수의 국제 미술행사들은 제도화된 미술관 기획전이나 여타 상업전시에서 볼 수 없는 전위적·도발적인 작업들로 채워진다. 실험성을 텃밭으로 한 미술 담화의 생성과 미적이고 사회적인 공론의 성취를 중시한다. '100일간의 저항'으로 불리는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가 대표적이다. 낡고 관습적인 언어에다 편향성 내에서조차 주류가 지배하는 베니스비엔날레(la Biennale di Venezia)가 아니다. 비엔날레는 제안하고 투쟁하는 공간이다. 인류가 처한 다양한 문제를 번역 및 공론화하며 새로운 방향의 제시를 존립의 목적으로 한다. 궁극적 목표는 전시에서 받은 자극이 일상에서 실천될 수 있도록 상호 소통하는 것에 있다. 비엔날레의 건강성은 미술 언어로 우리 사회의 모더니티를 적시하며, 미래 지향적인 문화적 토론을 통해 지구촌 공동체의 삶을 변화시키는 에너지 유무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한국의 비엔날레들은 내수용인 도쿄 비엔날레(Tokyo Biennale. 9.23-11.5)보다도 못하다. 세계 5위니 뭐니 하며 자화자찬하지만 내 보기엔 베니스비엔날레 아류인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대개의 비엔날레형 국제행사들은 파괴적·혁명적·문화적 논쟁의 길을 포기하고 있다. 대신 미술이란 장르를 조각, 건축, 미디어, 수묵, 공예, 공공미술, 서예 등으로 세세히 쪼갠 분야별 지역 미술행사로 전락하는 중이다. 이것도 나름 변별점일까. 글쎄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10-04 11:40:0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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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행정의 벽

김구림의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24년 2월 12일까지 이어진다. 당대 최고의 실험미술가로 꼽히는 작가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다. 1960년대 초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회화, 퍼포먼스, 전자예술, 비디오아트 등이 고루 출품됐다. 작품 수만 230여점에 달한다. 지난 7일엔 어느 한 장르로 귀속되지 않는 작가의 동시대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공연을 새롭게 구성해 주목을 받았다. 김구림이 직접 연출한 이 공연에는 영화와 무용, 음악, 연극을 잇는 4개 파트 70여명의 공연단이 함께 했다. 특히 마지막 파트인 연극 '모르는 사람들'에는 작가가 직접 출연해 동일 언어 속 불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를 은유함과 동시에 세월을 초월한 현역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 많은 이들의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구순을 바라보는 김구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전시는 아쉬울 수 있다. 비좁은 공간에 작품을 다닥다닥 늘어놓는 수준에 그친 전시 구성(그가 남긴 아방가르드 유산에 대한 탐구 따윈 찾을 수 없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를 실망시킨 건 자신의 마지막 개인전이 될지도 모를 전시에 꼭 선보이고 싶었던 작품들을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실제 그는 개막식이 열린 지난 달 24일 "아방가르드(전위)한 것이 하나도 없어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고리타분한 것들만 늘어놨다"며 행정 규제 등으로 자신의 주요 작업을 재현하지 못한 데 대한 분노와 섭섭함을 밝혔다. 김구림이 그토록 시도하길 원했던 작품은 광목천으로 건물을 감싸는 '현상에서 흔적으로'이다. 그러나 미술관의 반대에 부딪혔다. 등록문화재인 미술관 외벽에 작품을 설치하려면 타기관과의 협의 등이 필요한데 물리적으로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 서양 근대 모더니즘 양식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본관은 2008년 7월 등록된 문화재 375호이다. 등록문화재에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선 문화재보호법과 그 밖의 관련 법규 등 종합적 검토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일반 건축물이 아니다 보니 여러 절차와 시간이 소요됨이 사실이다. 다만 등록문화재는 현상변경이 원칙적으로 금지된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규제가 적다. 외형을 보존하되 '활용'에 방점을 둔다. 또 다른 등록문화재인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나 구 벨기에 영사관을 리모델링해 사적 제254호로 지정된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도 마찬가지다.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건축물에 어떤 손상도 주지 않는다. 천만 감는 것이지 나사 하나 사용할 일이 없다. 의지만 있다면 등록문화재의 현상변경 신고에 해당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행 가능성을 고민해 볼 수도 있었고, 내년 2월 마무리되는 8개월의 전시기간 동안 실현 가능하도록 대안을 찾는 등의 적극적 소통이 있었다면 작가의 섭섭함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행정의 벽은 높았다. 끝내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재현되지 못했다. 작가가 원할 경우 오래된 건물의 벽을 허물거나 문화유적을 비롯한 미술관 건물의 주추가 드러나는 작품까지 허용하는 외국과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원형에 손상이 가지 않는 한 창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한다. 우린 다르다. 행정이 예술을 앞선다. 균형도 아니다. 무조건 우위다. 미술관은 동시대성이 반영된 혼돈의 실험실로, 오브제로, 작가들의 자율성을 간섭하지 않는 탈규제의 공간이 돼야 하지만 갑갑한 행정은 미술관도 예외 없다. 의식 있는 기획자, 작가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한다. 심지어 예술의 창의성마저 행정의 일부로 귀속시킨다. 이는 국공립미술관 모두 같다. 건조한 행정은 미술의 진보를 가로막는 한국미술 발전의 최대 걸림돌이다. 김구림의 불발된 작품이 의미하는 것처럼 관에 집어넣어야 할 대상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09-20 13:54:33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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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죽 쒀서 남 줬던' 키아프, 올해는 다를까

한국화랑협회가 주관하는 국내 최고의 아트페어인 '키아프 서울'(Kiaf SEOUL)과 영국의 프랜차이즈 페어인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이 9월 6일부터 10일(프리즈는 9일 폐막)까지 코엑스 전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올해로 제22회를 맞는 키아프는 이번 행사에 국내 갤러리 약 140개를 포함한 20여개국 약 210개 화랑을 통해 1300여명의 작가 작품을 소개한다. 독일 디 갤러리를 비롯해 최근 용산에 둥지를 튼 일본의 화이트스톤 갤러리 등이 외국 화랑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프리즈에는 전년과 비슷한 국내외 120여개 갤러리가 출사표를 던졌다. 가고시안, 하우저앤워스, 페이스, 데이비드 즈워너, 화이트큐브, 타데우스 로팍을 포함 세계 정상급 화랑들이 대거 포진했다. 밀레, 피카소, 폴 세잔, 앙리 마티스, 루치오 폰타나, 루시안 프로이트, 에곤 실레 등 서양 거장들의 작품도 마스터스 섹션에서 만날 수 있다. 두 개의 아트페어를 같은 공간에서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에 관람객들의 반응은 뜨겁다. 8만원에서 25만원까지 하는 입장권도 불티나게 팔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김구림 전, 리안갤러리의 이강소 전, 아트선재센터의 서용선 전, 구띠갤러리의 김종숙 전 등 페어 개최 기간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이벤트도 많다. 하지만 한 지붕 두 행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속엔 걱정도 있다. 안방까지 내주었는데 주도권은 프리즈가 쥐자 '죽 쒀서 남 줬다'는 평가가 나온 2022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공간 내 관람 인원에서부터 느껴지는 온도차, 많게는 8000억원으로 추정된 프리즈 대비 약 10분의 1에 불과했던 매출 규모, 주요 판매 작품의 대부분이 외국 작가 작품이었던 현실은 지금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올해는 어떨까. 일단 지난해가 준비 부족 상태에서 치러진 느낌이었다면 금년엔 대비된 흔적들이 엿보인다. 주최 측인 화랑협회는 참여 갤러리들이 추천한 작가 20명을 소개하는 하이라이트와 채색화 특별전 등의 프로그램을 구동하고 국제 예술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룰 법한 이슈들을 모은 토크도 마련했다. 또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던 '키아프 플러스'를 키아프의 한 섹션으로 재배치하는 등 나름 차별화를 꾀하려 애썼다. 하지만 프리즈와 체급을 맞추기엔 여전히 부족한 인상이 짙다. 뭔가 풍성해 보이지만 글로벌 위상을 담보할 키아프만의 선명한 색깔은 잘 읽히지 않는다. 문제는 작품이다. 올해도 '장식'에 머무는 얄팍한 출품작들이 주를 이룬다면 미학적 가치와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 즐비한 프리즈와의 격차는 또다시 확연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막은 올랐고 이번 행사가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미술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아니면 많은 이들이 우려하듯 '독사과'를 덥석 물은 것인지는 나흘 뒤면 알 수 있다. '젊음'과 '역동성'을 강조하는 키아프와 페어 참가 갤러리 120개 중 100여개를 아시아 및 한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갤러리로 채우며 '돈 되는 아시아' 공략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프리즈와의 경쟁 결과에 따라 키아프는 향후 세계적인 페어로 발돋움할 수도, 아니면 외국 유수 페어의 위성 행사로 전락할 수도 있다. 키아프는 현재 그 기로에 섰다.■ 홍경한(미술평론가)

2023-09-05 14:37:57 김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