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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맥도날드 빅맥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맥도날드 빅맥 맥도날드 빅맥은 미국 문화의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빅맥은 1967년 미국 피츠버그 맥도날드 유니언 타운에서 첫 판매 시작했다. 1년 뒤 전국적으로 출시될 당시 50억개가 팔리면서 히트 상품으로 등극했다. 맥도날드는 1988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1호점을 오픈하고 한국에 진출했다. 이후 빅맥, 후렌치 후라이, 해피밀과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도날드의 메뉴를 한국 시장에 선보이는 한편, 불고기 버거, 맥스파이시 상하이 버거, 1955버거 등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제품을 내놓았다. 빅맥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인기 메뉴 중 하나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빅맥을 국제 통화 가치를 비교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빅맥지수'를 발행하고 있다. 빅맥의 판매가격을 기준으로 각국의 상대적 물가수준과 통화가치를 비교하는 지수다. ◆빅맥의 탄생 빅맥은 맥도날드의 상징과도 같은 햄버거다. 1967년 미국 피츠버그의 로스 타운십(Ross Township)에 위치한 맥도날드 레스토랑에서 처음 개발됐다. 해당 지역에서 맥도날드 식당을 여럿 보유했던 짐 델리가티(Jim Delligatti)는 주변 경쟁 레스토랑에 대응할 '핫'한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경쟁 레스토랑 중 한 곳이던 이트 앤 파크(Eat'n Park)에서 빅보이(Big Boy) 샌드위치가 흥행하자 델리가티는 이에 견줄만한 대형 햄버거를 고안했다. 피츠버그 내 위치한 맥도날드 유니언 타운점에서 오늘날 빅맥의 원조(소고기 패티 2장, 번 3개, 치즈 1장, 양상추, 양파, 스페셜 소스)가 처음 판매됐다. 가격은 45센트였으며, 피츠버그 지역에서 그 인기가 검증된 빅맥은 출시 1년 만에 맥도날드 전체 지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1988 한국 진출 한국맥도날드는 지난 1988년 한국에 문을 열고 빅맥, 후렌치 후라이, 해피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도날드의 대표 메뉴를 국내 시장에 소개하는 한편, 불고기 버거, 맥스파이시 상하이 버거, 1955버거 등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춘 다양한 제품을 개발해 꾸준히 선보였다. 또한 간편하면서도 건강한 아침 메뉴인 '맥모닝'과 '행복의 나라 메뉴' 등을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업계 최초로 24시간 매장을 운영하고 맥드라이브(McDrive), 맥딜리버리 서비스(McDelivery Service), 모든 접점에서 최상의 고객 경험을 제공하는 미래형 매장 등 혁신적인 플랫폼을 도입해 국내 퀵서비스레스토랑(QSR) 업계의 리더로 자리매김해 왔다. 약 1만7000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하는 한국맥도날드는 학력, 나이, 성별, 장애 등에 차별 없는 열린 채용으로 한국 사회의 고용 창출에 일조하고 있으며, 실제 1600여명의 주부 크루, 320여명의 시니어 크루, 240여명의 장애인 크루가 근무하고 있다. ◆한국 외식업계 '최초'의 역사 지난 30년 동안 업계를 선도해 온 맥도날드는 끊임없이 '최초'의 역사를 쓰며 한국 외식시장을 개척했다. 맥도날드는 변화하는 한국 고객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발맞춘 새로운 서비스와 플랫폼들을 최초로 선보이며 국내 퀵서비스레스토랑 업계의 서비스 품질을 높이고 고객 편의를 제공했다. 1992년 부산 해운대점에 국내 최초 드라이브 스루인 '맥드라이브' 도입했다. 최근 10년 동안 맥드라이브를 이용한 차량은 총 1억7000만대로, 2007년 200만대에서 2017년 3500만대로 17배 증가했다. 2018년 현재 맥드라이브 매장 252개로 국내 최다다. 2005년 업계 최초 '24시간 매장' 영업을 시작했으며, 2006년 업계 최초 아침 메뉴 '맥모닝' 출시했다. 2007년 업계 최초 주문배달 서비스인 '맥딜리버리' 도입했다. 2016년 서울 상암DMC점에 업계 최초 '미래형 매장' 도입했다. 이곳은 '쾌적한 매장 환경, 프리미엄 버거 제공, 디지털 메뉴보드 및 디지털 키오스크 등 디지털 경험 강화, 고객 중심적인 서비스' 등을 통해 고객들에게 최상의 레스토랑 경험을 제공한다. ◆글로벌 외식업계 최대 수준의 국내 고용 창출 1988년 100여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맥도날드는 현재 한국 고용 시장에서 1만7000여명의 일자리를 창출해 내고 있다. 이는 글로벌 외식업계 최대 수준이다. 최근 10년간 신규 직원 채용 매년 3.7% 증가했다. 매년 100~300명의 매장의 시간제 아르바이트 직원인 크루를 정규직 매니저로 전환 채용, 최근 10년간 총 2242명의 시간제 크루를 정규직 매니저로 전환 채용했다. 맥도날드의 고용 문화에서 가장 큰 특징은 학력, 나이, 성별, 장애 등의 차별이 없는 '열린 채용'으로 취업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도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있다. 또한 맥도날드는 양성평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기업문화로 여성 인재 양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업계 최초로 주부 채용의 날을 개최하며 결혼, 육아 등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워킹맘들의 재취업 장려했고, 2000년대 초반부터 시니어 채용에도 앞장섰다. 현재 장애인 직원 240여명, 고용률 3.5%로 민간기업 법정 의무 고용률 2.9%를 상회한다. 여성 임원 비율 35%로 국내 500대 기업 평균 2.7%보다 높다. ◆가맹점주와 동반 성장 맥도날드는 60년이 넘는 글로벌 프랜차이즈 노하우를 바탕으로 가맹점주와 공급업체, 본사가 서로 상생하는 건강한 프랜차이즈 모델을 오랫동안 유지해오고 있다. 국내 프랜차이즈 업계에서는 최근 들어서야 로열티 제도 도입이 논의되고 있지만, 맥도날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로열티 제도를 도입해 가맹점이 수익을 올리면 본사도 수익을 올리는 선순환 구조를 갖췄다. 맥도날드는 가맹점주의 안정적인 사업 운영을 위해 장기 계약을 맺는 것은 물론 재무, 인사, 마케팅 등 다양한 영역의 컨설팅도 제공하고 있다. 맥도날드는 가맹점주와 10년 이상의 장기 계약을 바탕으로 가맹점주가 안정적인 사업 운영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같은 신뢰를 바탕으로 부산 지역의 한 오너는 최장 23년째 맥도날드 매장을 운영 중이다. ◆빅맥지수 빅맥지수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1986년부터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발표한다. 햄버거 가격으로 경제 상황을 설명한다고 해 '햄버거 경제학'이라는 뜻의 버거노믹스(Burgernomics)라고도 한다. 이 지수는 '환율은 각국 통화의 상대적 구매력을 반영한 수준으로 결정된다'는 구매력평가설, '동일 제품의 가치는 세계 어디서나 같다'는 일물일가의 법칙에 기반하여 적정환율을 산출한다. 이 환율을 빅맥환율이라고도 한다. 그 기준으로 전세계 어디서나 재료 구성이나 조리법, 크기가 표준화되어 있는 '빅맥' 햄버거 가격을 미국의 달러화로 환산해 각국의 상대적 물가수준과 통화가치를 비교한다. 이 지수가 처음 발표된 이래로 시장환율과 적정환율 사이의 차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지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지수가 낮을수록 해당 통화가 달러화보다 저평가된 것으로, 높을수록 고평가된 것으로 해석된다.

2018-05-24 10:42:38
[되살아난 서울] ⑰ 궁 안에 숨겨진 비밀의 화원··· 창경궁 대온실

조선시대 궁궐 중 유일하게 동향으로 배치된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에서 오른쪽 샛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궁에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얀색 철골로 둘러싸인 유리 온실은 1909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창경궁 대온실은 2013년 문화재청이 실시한 '국가지정 문화재 특별 종합점검'에서 목재 부식 등 안전상의 문제가 발견돼 1년 3개월간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지난해 11월 다시 문을 열었다. ◆꽝꽝나무부터 팔손이나무까지 "엄마, 이 나무는 이름이 꽝꽝이래요." 지난 20일 창경궁 식물원에서 만난 한 꼬마가 나무 앞에 있는 이름표를 확인하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꽝꽝나무 옆에는 사람 손바닥처럼 생긴 이파리가 무성한 팔손이나무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초등학교(옛 국민학교) 동창들과 식물원을 찾은 박월선(75) 씨는 "나무랑 꽃을 좋아해 평소 식물원에 자주 오는데 이런 천연기념물들은 볼 기회가 좀처럼 없다"면서 "친구들과 산책도 하고 희귀한 식물도 보고 일석이조"라며 즐거워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2000년 이후부터는 국내 자생식물 위주로 전시해오고 있다"며 "천연기념물 후계목(모수에서 직접 채취해 키운 나무)을 전시해 창경궁 식물원만의 특색을 살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천연기념물 옆에는 상어의 날카로운 이빨처럼 생긴 파리지옥과 부부젤라 모양의 네펜데스가 있었다. 식충식물 네펜데스 안에 갇힌 개미를 본 아이들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식충식물 구역에서 스무 발자국 정도 전진하면 양치식물 구역이 나타난다. 비늘고사리, 좀쇠고사리, 주저리고사리, 들토끼고사리 등이 심어져 있다. 잎이 길게 늘어져 있어서인지 애·어른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고사리를 만지고 잡아당겼다. 고사리뿐만 아니라 온실 내 많은 식물들이 매너 없는 관람객들로 인해 수모를 겪고 있었다. 식물원 곳곳에 '만지지 마세요. 눈으로만 보세요'라는 푯말이 붙어있었지만, 사람들은 경고문을 무시하고 식물들을 괴롭혀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관리소에서 자주 순찰을 다니면서 관람객들에게 '만지지 말아 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있는데, 일부 관람객 중 '사람들 많은 데서 면박을 준다'며 기분 나빠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어려움이 있다"며 "다른 분들도 배려해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코끼리랑 벚나무는 어디 갔나요?" 이날 식물원을 찾은 관람객 중에는 반세기 전 창경원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도 있었다. 성북구 정릉동에서 세 자매와 함께 궁을 찾았다는 조월자(73) 씨는 "지금은 여의도에서 벚꽃놀이를 하지만, 내가 20대 초반일 때는 사람들이 창경원으로 벚꽃놀이를 왔다"면서 "동생들은 여기로 소풍하러 와 동물원에서 코끼리도 보고, 식물원 구경도 하고 그랬다"며 추억을 회상했다. 조 씨와는 정반대로 창경궁 온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노원구 월계동에 사는 박모(72) 씨는 "일제의 잔재는 싸그리 다 없애야 한다"며 "일본이 만든 식물원이 왜 아직도 창경궁에 남아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혀를 끌끌 찼다. 이에 문화재청 관계자는 "일제의 잔재를 전부 없애는 게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는 게 될 수 있다"며 "그 시대에 지어졌다고 해서 다 없애기보다는 역사적 의의나 배경,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문화유산을 존치할 것인지 폐쇄할 것인지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창경궁 대온실은 1907년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 후쿠바 하야토가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해 1909년 건립됐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을 창덕궁에 가둬놓고는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었다. 일제는 한일합병조약 체결 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왕이 살던 궁궐은 벚꽃놀이, 불꽃놀이가 열리는 유원지로 전락했다. 창경궁은 광복 40여 년이 지나서야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83년 창경궁 복원 공사가 시작되면서 궁 안에 있던 위락시설인 동물원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했고, 벚나무들은 여의도 윤중로로 옮겨 심어졌다. 창경궁 내 일제가 지은 건물을 모두 철거됐지만, 대온실은 대한제국 말기에 들어온 서양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유산으로 인정받아 2004년 2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아 보존됐다. 강북구 번동에서 온 채명국(58) 씨는 "아픈 역사지만 이렇게 건축물로 남겨 놓고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며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식물원 입구에 창경원 식물원의 가슴 아픈 역사 등을 적어 놓은 안내문이 없다는 거다"고 말했다. 채 씨는 "사람들이 식물원을 둘러 보면서 창경궁에 유폐된 순종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더 좋은 역사 교육의 장이 될 것 같다"고 전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종종 어르신들이 와서 과거 소풍 왔을 때 기억을 더듬어 '코끼리는 어디 갔냐?'고 물어보시곤 하는데, 그럴 때는 자료를 찾아서 따로 알려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이어 "창경궁 온실 앞에 건물 보수 이력을 전부 기술한 안내문을 따로 설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다"며 "관련 사항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18-05-22 13:28:24 김현정 기자
[새벽을 여는 사람들] "소중한 내 마음, 커피 마시며 운동하세요" 심리상담카페 '제다움' 인수형 소장

새벽 5시. 불개미 수만 마리가 인수형(47)씨의 다리를 물어뜯으며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뼛속까지 붙어 사는 "뜨겁고 차갑고 시리고 가렵고 저린" 통증은 먹이를 문 개미처럼 물러날 기색이 없다. "아침에 세 알, 점심엔 필요할 때만 두 알, 저녁에 세 알…." 잠시나마 놈들의 입을 닫으려면 꾸준히 약을 삼켜야 한다. 명상과 요가로 밤새 굳어진 근육을 풀고는 수영장으로 향한다. 두 손 안에 쏙 들어가는 허벅지 근육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운 뒤에는 서울 성동구의 '제(Je)다움 심리상담카페'에서 손님을 맞는다. 전직 SBS 뉴스 PD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 만든 일과다. ◆'3층 추락'이 가져온 좌절과 기적 지난달 24일 제다움에서 만난 인수형 소장은 드립커피를 마시며 화마에 삼켜진 커피콩의 고통을 되돌아보았다. "1993년 방송국 입사 이후 뉴스 PD만 해오다가, 2003년 조용필 콘서트 DVD 제작에 참여하면서 '이런 세상이 있구나. 괜찮네' 싶더라고요. 영상미의 확장성을 동경했지요. 2005년 명예퇴직 이후 각종 콘서트 스태프로 경험을 쌓고, 2010년에는 친정 회사(SBS)의 외주제작사를 차렸어요. 지난해에는 경기대 영상예술학 박사 학위도 받았고요." 끝없이 헤엄쳐야 숨을 쉬는 참치와도 같이, 그에게 영상은 드넓은 바다였다. 멈출 줄 모르던 그의 질주는 2012년 2월 어느 날, 차디찬 운명의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어느 업체의 홍보 영상 촬영장이었어요. 원하는 그림이 안 나와서 난간에 있는 카메라 감독을 지도하다가 균형을 잃고 떨어졌죠." 3층 높이에서 추락한 그의 척추 12개가 부러지고 골반 4군데에 금이 갔다. 두개골이 갈라진 여파로 오른쪽 귀로는 소리를 못 듣게 됐다. 이대로 주저앉나 싶었지만, 반년만에 기적이 찾아왔다. "신경이 돌아오는 과정에서 열이 40도까지 올라갔어요. 무릎을 치면 반응 없던 다리가 올라오기 시작했죠. 휠체어냐 운동화냐, 아찔한 갈림길에 서 있던 겁니다." 하지만 그는 이 사고로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CRPS) 환자들과 같은 고통을 평생 안고 가야 한다. CRPS는 원인을 알 수 없지만, 그가 겪는 사고 후유증은 아픔의 정도가 같다고 한다. 다시 일어서는 과정도 험난했다. 중추신경이 돌아오자, 인 소장의 다리는 걸음마를 배우기 전 아기의 상태가 되었다. 중력의 힘을 견디며 기어다니다 기계에 의존해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물 속에서 꾸준히 걸었다. 2013년 퇴원 당시 짚었던 두 개의 지팡이는 일 년 만에 내려놓았다. "보통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걷지만, 저는 왼쪽 발의 뒤꿈치가 닿는 순서도 일일이 계산해가며 걸어야 해요. 그래서 제가 걷는 모습은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죠." ◆나를 돌아보다 심리상담 결심 극한의 고통은 인 소장이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2013년 퇴원 이후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린 그는 일 년을 집에서만 보냈다. "동생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 하더군요. '형이 그렇게 괴로워한다고 해서 낫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해서 낫는다면 계속 그렇게 해라.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며 커튼을 걷으니 빛이 방에 들어찼어요." 의사와의 상담을 시작한 인 소장은 고통의 실체를 파헤치려 심리학도 공부했다. 마음 치유를 위한 우쿨렐레 연습도 시작했다. 평소 즐기던 커피와 차, 자신처럼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공간을 열망했다. 카페에서 활용하기 위한 심리상담사 자격증은 2016년 취득했다. 인 소장은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사람들이 자주 찾는 '마음 운동장'을 짓는다는 목표로 지난 1월 1일 성수동 골목에 제다움 카페의 문을 열었다. 제(Je)는 '나'를 낮추는 말이면서 프랑스어로도 자신을 뜻한다. 혼자서 8평짜리 1층 내부를 친환경 소재로 꾸민 인 소장은 비슷한 규모의 지하 1층 작업도 이어가고 있다. 또 다른 직업인 PD 업무로도 바쁜 나날을 보낸다. "한 시간에 10만원 받는 심리상담센터와는 다르게 만들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차 한 잔 값으로 간단한 상담을 해 보는 거예요. 아파트 문화가 뿌리깊은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는 마당 정서가 강해서, 사람들이 카페에서 툭 터놓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거든요." 그가 말하는 '마음 운동'은 일상적인 훈련이다. "우리의 몸을 계속 단련 시키면, 사고를 당했을 때 덜 다칠 수 있어요.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이 있어야만 찾는 단절되고 조용한 공간이 아니라, 자주 들러 얘기하고 자존감을 찾아갈 카페가 필요합니다. 피트니스센터에서 트레이너의 개인 지도를 받는 것처럼, 마음 역시 평소에 그렇게 운동해야 돼요." 가끔 찻잔을 들고 인 소장과 담소를 나누는 손님은 20여명이다. 본격적인 상담 프로그램은 총 3단계로, 단계마다 10회에 걸친 상담이 진행된다. 현재 1단계를 등록한 9명 대부분이 5회차 이상을 마쳤다. "우선 자신이 감상한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싶고, 이유는 무엇인지 이야기해요. 그럼 그 사람 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게 돼요.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자체만 건드리면 안 좋으니까 영화를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죠. 그 일이 일어난 이유를 살펴보며 2단계에 접어들어요. 사람들은 대개 어린시절의 아픔 때문에 지금 문제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끊어줘야 해요. 만일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했다면, 당시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특정 상황이 왔을 때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이 덥쳐와 괴롭습니다. 그걸 끊으려면 꾸준히 상담 해야 돼요. 내 안에 이것이 있다고 인정하되, 앞으로 끄집어내지 않는 방향으로 상담합니다." 마지막 단계에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계획중인 1박 2일 템플스테이와 레크리에이션이 포함된다. 템플스테이의 경우,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를 종이에 적고 불에 태우는 식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마음이 건강한 공동체 늘리고파" 제다움 카페는 그가 구상하는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이다. "동네 가게나 작가들과 제휴해서 상담자들에게 우쿨렐레 연주와 미술, 액세서리 공예 수업료를 한 달 간 절반으로 깎아줘요. 빵집과 목공예 등 다른 제휴도 추진 중이죠." 이렇게 사람들이 마음을 치유하며 취미에 몰두하다 보면, 그 일이 직업이 될 수도 있다. 이후에는 본인도 다른 사람들에게 해당 기술을 가르치는 선순환이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올해 인 소장의 목표는 5개점 확보다. 지금은 강남에 들어설 2호점 준비가 한창이다. 점주는 자기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고 학생 면담도 많이 해 온 대학 교수들이 대상이다. 2호점주 역시 교수라고 한다. 고통을 달고 살면서도 쉴새없이 움직이는 이유를 묻자 "우리는 누구나 죽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제가 죽었을 때 어떤 사람으로 남게 될까 생각하니, 이 삶을 게을리 보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어차피 지나가는 시공간 속에서 평생 먹어야 할 약들이 단지 '밥'으로 남게 되었죠(웃음)." 한끼 식사처럼 고통을 삼키며 따뜻한 마음의 밥을 짓는 인수형 소장은 무료로 상담받을 청소년들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주에 고등학생 셋이 가게 옆에서 담배를 피우기에 '스트레스 때문이라면 나에게 오라'고 했어요. 카페에 청소년 무료 상담 플래카드를 붙이려고 해요. 그 아이들이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2018-05-20 13:22:21 이범종 기자
[되살아난 서울] ⑯ 키워드 '야생'··· 도롱뇽, 버들치 기다리는 '이촌한강생태공원'

등대처럼 생긴 전망대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한강대교 북단 철교 밑에는 초록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이촌한강생태공원이 있다. 서울시는 생태적 잠재력이 높은 지역에 자연형 호안과 소생물 서식처를 복원하는 자연성 회복 사업을 진행해 지난해 12월 이촌한강생태공원의 문을 열었다. 이촌한강생태공원은 한강대교와 원효대교 사이 약 1.3km 구간에 9만7100㎡ 규모로 만들어졌다. 공원에는 생태 복원을 위한 자연형 호안, 천변 습지, 논 습지와 시민들을 위한 자전거도로, 산책로, 생태놀이터 등이 조성됐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꿈꾸다 "우와~ 소금쟁이가 두 마리나 있네?" 지난 13일 이촌한강생태공원을 찾은 어린이들은 물 위를 미끄러지듯 돌아다니는 소금쟁이의 가느다란 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용산구 청파동에서 온 조영균(36) 씨는 "아이들이 도시에서 자라서 습지는커녕 논조차 볼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가까운 곳에 생태공원이 생겨서 기쁘다"며 밝게 웃었다. 이촌한강생태공원 습지에는 경남 창녕군에서 기증받아 심은 우포늪 습지식물 6종이 식재되어 있다. 조 씨는 "안내푯말을 보면 창포, 부들, 매자기, 송이고랭이 등 4600본의 습지 식물을 심어놨다고 나왔는데 아직 다 자란 것 같지도 않고 별로 많아 보이지도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이에 서울시 관계자는 "생태공원은 일반 근린공원처럼 처음부터 아름답게 완성된 식물을 빽빽하게 심어놓는 게 아닌 습지 식물이 살만한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 자연성을 회복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노량진 고시촌에서 생태공원을 찾은 공무원 시험 준비생 이석영(29) 씨는 "정자에 앉아 버드나무 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보니 스트레스가 좀 풀린다"며 미소 지었다. 이 씨는 "그런데 공원을 조성만 해놓고 관리는 제대로 안 한 것 같다"며 "오면서 봤는데, 습지는 물이 다 말라 있고, 전망대 뒤쪽은 예초 작업을 안 해 놔서 풀들이 지저분하게 자라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습지는 상태에 따라 양수기로 물을 채워 넣는데 전날 비가 와서 기계를 꺼놓은 것 같다"며 "확인 후 시정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시 관계자는 "전망대 뒤편에 심은 쇠무릎은 최대 1m까지 자라는 식물"이라며 "야생 경관 조성을 위해 따로 예초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자전거가 '쌩쌩'··· 실종된 시민의식 이촌생태공원에는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훼방꾼들이 존재했다. 도로 위의 무법자 '자전거족'이다. 용산구 보광동에서 온 박윤성(24) 씨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쌩쌩 달려 부딪힐 뻔했다"면서 "심지어는 자전거 도로가 아닌 보행로로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서울시 관계자는 "현재 한강 자전거길 제한속도인 시속 20km를 10km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다. 생태공원 강변 쪽과 도로 쪽에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각각 따로 만들어져 있음에도 일부 자전거족들은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생태 복원을 위해 조성된 이촌한강공원에서 낚시를 하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한강생태공원은 낚시 제한구역으로 제한사항을 준수한 경우에만 낚시를 할 수 있다. 제한사항에는 '낚싯대를 4대 이상 사용할 수 없다'고 나와 있지만, 대부분이 4대 이상의 낚시대를 사용해 어류를 포획하고 있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공원 내 청원 경찰이 24시간 근무하며 계도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위반사항을 다 잡아내기 어렵다"면서 "가장 중요한 건 시민의식이다"고 강조했다. 강남구 삼성동에서 한강공원을 찾은 이윤희(64) 씨는 "강변에 앉아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한강에서 하수구 냄새가 심하게 나서 자리를 털고 나왔다"며 "사람들이 마시고 사용하는 물인데 수질 관리를 제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에 서울시 관계자는 "한강 물을 유람선 운항 등의 이유로 호수처럼 가둬놔 물이 흐르지 않아 나는 냄새"라며 "신곡수중보를 철거해야 한강을 옛 하천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18-05-15 11:03:23 김현정 기자
[살맛나는세상이야기]교보생명의 '나눔 재생산'

교보생명은 생명보험사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건강, 돈, 지식 등 결핍으로 인한 삶의 역경을 극복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짜임새 있고 차별화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다. 관련 분야 전문성과 노하우를 지닌 비영리단체와 파트너십을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공헌모델을 만들고 있다. 특히 저소득 가정, 미숙아, 여성 가장 외 체육인 등 지원을 통해 이들의 역량개발을 돕고 또 다양한 사회적 일자리를 마련해 스스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도록 지원, 사회적으로 나눔이 재생산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교보생명은 이 같은 일련의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기존의 기업사회공헌 방식에 일대 변화를 시도하여 새로운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실천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교보생명 특유의 짜임새 있고 사회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활동들은 기업 사회공헌활동의 우수 모델로 평가 받고 있다"고 말했다. ◆ 다솜이 작은 숨결 살리기 교보생명의 대표적인 사회공헌사례로는 먼저 이른둥이(미숙아)에게 치료비를 지원하는 '다솜이 작은 숨결 살리기'를 들 수 있다. 교보생명은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지난 2004년부터 다솜이 작은 숨결살리기 사업을 펼치고 있다. 세상에 조금 먼저 태어난 이른둥이들이 건강을 회복하여 소중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 경제적·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저소득 가정을 지원한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입원치료비는 물론 재활치료비(만 6세 이하)를 이른둥이 출산가정에 지원하고 있다"며 "본인부담 병원비의 70%, 최대 2000만원까지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이른둥이 지원사업에 쓰이는 비용은 교보생명 재무설계사(FP)들이 자발적으로 십시일반 모금하면 여기에 회사 지원금을 보태 지원하는 방식으로 모아진다. 매달 4000명이 넘는 재무설계사들이 모금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렇게 모인 금액으로 지금까지 2392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민간 최초의 이른둥이 지원사업으로 이른둥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건강한 나눔문화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 교보생명컵 꿈나무 체육대회 교보생명은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 스포츠를 이끌어갈 체육 유망주를 발굴·육성하는 데에도 앞장 서고 있다. '교보생명컵 꿈나무 체육대회'는 민간에서 열리는 국내 유일의 유소년 전국 종합체육대회다. 교보생명은 지난 1985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육상, 수영, 빙상, 체조 등 7개 기초종목에 4000여 명의 초등학생이 참가하는 전국대회를 열고 있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재정이 여의치 않은 선수들도 대회에 참가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모든 선수단에게 교통비와 숙식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우수선수와 학교에는 장학금도 준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교보생명컵 꿈나무 체육대회를 거쳐간 어린 선수는 13만명 수준. 이 가운데 350여 명의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2회 연속 획득한 이상화를 비롯 유도의 최민호·김재범, 체조의 양학선·양태영, 수영의 박태환, 탁구의 유승민·오상은, 육상의 이진일·이진택, 쇼트트랙의 최민정·심석희·박승희, 스피드스케이팅 이승훈 선수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획득한 메달 수 만해도 150여 개에 달한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교보생명의 꿈나무 후원은 다른 기업의 빅스타 후원이나 프로구단 운영과 달리 비인기 종목에 집중돼 있고 장래가 불확실한 초등학교 유망주에 대한 지원이라는 점에서 공익적 성격이 강하다"며 "체육계에서는 이러한 후원방식이 기초종목을 활성화시키고 저변을 넓혀 스포츠 발전의 디딤돌이 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 교보 다솜이재단 교보생명은 이 외 대한민국 사회적 기업 1호인 '다솜이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2003년 시작한 '교보 다솜이 간병 봉사단'을 모태로 한다. 교보 다솜이 간병 봉사단은 저소득층 환자에게 무료 간병서비스를 제공하여 건강회복을 돕고 일자리가 필요한 취약계층 여성 가장들에게는 일자리 제공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돕는다. 지난 2007년 10월 교보다솜이간병봉사단은 다솜이재단으로 전환되어 같은 해 11월 정부로부터 사회적 기업 1호 인증을 받았다. 한편 교보생명은 대산농촌재단, 대산문화재단, 교보교육재단 등 3개의 공익재단 운영과 함께 국민체육진흥, 문화예술 지원사업 등 다양한 공익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IMG::20180514000151.jpg::C::480::지난 2016년 열린 제1기 교보 청소년 리더십 스쿨 '체.인.지' 입학식에서 학생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체.인.지'는 교보생명과 교보교육재단이 손잡고 진행하는 청소년 리더십 스쿨로 체계화된 리더십 교육을 통해 청소년의 전인적 성장을 돕고 참사람 육성이라는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마련됐다./교보생명}!]

2018-05-14 16:14:04 이봉준 기자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코카콜라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코카콜라 시골 약국의 음료수였던 코카콜라는 1886년 처음 탄생한 뒤 현재의 세계적인 음료 브랜드로 거듭났다. 1915년 등장한 코카콜라 병은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단순한 음료수 병을 넘어 예술, 음악, 광고에 영감을 주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됐다. 코카콜라는 콜라를 넘어 탄산음료의 대명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음료수가 만들어지고 약 13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결같이 사랑을 받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전세계 200여개국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하루 소비량은 19억잔으로 1초당 약 2만1990잔이 판매된다. 2016년 기준으로 코카콜라의 브랜드 가치는 약 82조원이다. ◆코카콜라의 탄생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약사로 일했던 존 펨버턴은 자신의 연구실에서 여러 가지 약재들을 배합해서 이것저것 만들어 보는 게 취미였다. 코카콜라가 탄생한 그날도 연구실에서 다양한 배합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코카콜라가 만들어지던 당시의 미국은 남북 전쟁이 끝나고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그리고 전후 재건사업의 피로에 지쳐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 탓에 미리 조제해 두었다가 판매하는 약들이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펨버턴 박사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맞게 늘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왕이면 약효도 있고 맛도 좋은 음료를 만들고 싶었다. 수차례에 걸친 실험과 연구 끝에 드디어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맛을 지닌 독특한 음료가 탄생했다. 바로 코카콜라였다. 1886년 5월 8일 펨버턴은 자신이 배합해 만든 코카콜라 원액을 연구실 근처에 위치한 제이콥스 약국으로 보냈다. 당시에는 동네 약국마다 탄산수 제조기로 알려진 '소다파운틴'이 있었다. 소다파운틴 앞은 가볍게 음료나 아이스크림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늘 사람들로 붐볐고, 18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이곳에서 코카콜라 원액과 탄산수를 유리잔에 함께 넣고 수저로 휘휘 저어 코카콜라가 만들어졌고, 사람들에게 판매됐다. ◆금주법 시대의 금주용 음료 코카콜라가 탄생했던 1886년은 미국 전역이 금주법으로 떠들썩했던 시기였다. 펨버턴 박사가 코카콜라를 두고 '나의 금주용 음료'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좀 더 큰 성공을 원했던 그는 애틀랜타 저널에 'Delicious! Refreshing! Exhilarating! Invigorating!(맛있고,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음료)'라는 광고도 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펨버턴 박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자신이 발명한 이 음료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음료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건강 악화로 곧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1888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펨버턴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업 지분을 넘겼다. 애틀랜타의 사업가였던 아사 캔들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뛰어난 비즈니스 감각과 통찰력을 지닌 캔들러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지분들을 하나씩 사들이기 시작했고, 1888년 코카콜라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가지게 됐다. ◆독창적인 코카콜라 병 코카콜라 병은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어왔다. 앤디 워홀이 그의 그림에 코카콜라 병을 그려 넣었고, 폭스바겐은 자동차 비틀의 디자인을 매력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코카콜라 병을 광고에 활용하기도 했다. 전 세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알아보는 코카콜라 병은 경쟁업체의 모방으로부터 브랜드를 보호하기 위해 시작됐다. 코카콜라의 높은 인기와 성장에 경쟁 업체들이 코카콜라 유사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코카놀라, 마코카코, 토카콜라 등이 등장했다. 이때 코카콜라와 보틀링 파트너들은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차별화된 병'을 개발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공모전을 통해 코코아 열매의 길게 늘어진 볼록한 곡선 모양과 겉면에 그려진 흐르는 듯한 세로 선으로 디자인된 지금의 코카콜라 병이 탄생했다. 1915년 최초의 특허를 받은 살짝 통통한 모양에서 오늘날의 좀 더 슬림한 디자인으로 여러 차례 리뉴얼을 거쳐왔다. 1955년 산업 디자이너인 레이먼드 로위가 리뉴얼한 병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디자인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코카콜라 레드의 시작 코카콜라하면 머릿속에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건 독특한 모양의 병과 함께 특유의 '빨간색'이다. 다양한 음료들이 진열된 대형 마트에서 코카콜라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강렬함을 품은 컬러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빨간색이 코카콜라를 상징하는 컬러가 됐다. 코카콜라 상표 이름과 붉은색의 독특한 필기체로 적힌 'Coca-Cola' 로고를 처음으로 생각해 낸 사람은 존 펨버튼 박사의 파트너였던 프랭크 로빈슨이다. 평상시에도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흰색과 빨간색의 조합을 좋아하던 그는 흰 배경 위에 빨간색 글자로 '맛있고 상쾌한 코카콜라'라고 쓴 슬로건을 만들었다. 바로 이 슬로건이 빨간색을 코카콜라의 상징으로 만든 시작이었다. 1948년 코카콜라를 판매하는 곳을 표시하기 위해 만든 빨간색 원반 모양의 간판은 코카콜라와 빨간색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으며, 빨간색은 코카콜라를 대변하는 상징이 됐다. 코카콜라는 코카콜라, 코카콜라 제로, 코카콜라 라이트 등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지만, '빨간색' 상표는 130년이라는 시간의 장벽을 넘어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올해 코카콜라 전 제품의 패키지를 레드 컬러로 통일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통합했다. ◆가장 오래된 올림픽 파트너 코카콜라와 올림픽의 인연은 약 90년 동안 이어져 왔다. 가장 오래된 올림픽 파트너인 코카 콜라는 그동안 200개 이상의 국가 올림픽위원회들과 함께 선수들의 훈련을 지원하고, 스포츠 팬들에게 독특하면서도 즐거운 경험을 경험을 제공해왔다. 한 세기 가까이 쌓아온 코카콜라만의 올림픽 경험과 노하우는 국제올림픽위원회도 조언을 구할 정도로 탄탄하다. 코카콜라와 올림픽의 첫 인연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에 출전한 미국 선수들을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코카콜라 1000박스를 제공하면서 시작됐다. 미국 선수들이 대회 기간 동안 코카콜라를 마시는 지켜본 다른 나라 선수들과 관중들은 코카콜라에대해 궁금해했고, 대회에서 미국이 1위를 차지하자 코카콜라는 더욱 주목을 받았다. 코카콜라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첫걸음을 뗀 셈이었다. 올림픽 하면 떠오르는 것이 송화봉송이다. 이 성화봉송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로 거듭나게 된 것도 코카콜라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올림픽 성화봉송 공식 파트너사로 참여한 코카콜라는 국제올림픽 성화봉송 주자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도 참여할 수 있는 성화봉송 릴레이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성화봉송은 전 세계인이 즐기는 축제이자 하나의 문화로 발전했다.

2018-05-10 14:12:32 박인웅 기자
[인터뷰] 강재호 포플랫 대표 "韓 게임 강점 살린 '아이언쓰론' 전략 MMO 세계1위 차지할 것"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단 하나의 왕좌의 주인공과 그 왕좌를 노리는 전 세계 이용자 간의 대결이 펼쳐지는 모바일 전략 대규모 다중접속게임(MMO)인 '아이언쓰론(Iron Throne)'은 독특한 전투 모드가 특징이다. 이용자들은 중세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동일한 조건 내에서 팀원들과 협력해 승리를 겨루는 '팀 데스매치'를 하기도 하고, 20명의 플레이어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배틀로얄' 등 독창적인 전투 모드를 즐긴다. 다양한 국가의 배경을 가진 영웅들과 성은 360도 풀(Full)3D로 구현돼 상상력을 자극한다. 넷마블의 첫 MMO 게임인 아이언쓰론은 이달 중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251개국에 동시 출시된다. 총 3년의 개발기간 동안 50여명의 인력이 참여한 아이언쓰론은 이미 강자들이 포진한 MMO 게임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개발을 맡은 강재호 포플랫(4PLAT) 대표는 싱글 플레이 위주에서 그룹 플레이로 전략게임의 트렌드가 변한 이 시점을 국내 MMO 게임이 두각을 보일 적기라고 평했다. 지난 4일 서울 구로구 넷마블 사옥에서 만난 강재호 대표는 메트로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글로벌 MMO 게임의 경우 혼자서 다른 이용자를 상대로 하는 싱글 플레이가 많았지만 최근 집단 중심의 그룹 플레이로 트렌드가 변하고 있다"며 "혈맹 콘텐츠가 강한 한국 게임 회사에게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경제학과 석사를 마치고 현지에서 인터넷기업을 경영한 이력이 있는 강 대표는 오랜 해외 경험으로 최신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랐다.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경험은 아이언쓰론의 세계관 구성에 영향을 끼쳤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게임답게 유라시아 서쪽, 북아프리카 등 광범위한 지역과 역사, 인물들이 반영됐다. 여기에 다음 커뮤니티 본부장 출신 신종섭 부사장의 경험은 아이언쓰론의 연맹 관리에 녹아들었다. 신종섭 부사장은 "아이언쓰론은 글로벌 채팅 번역기, 연맹관리에도 공을 들였다"며 "연맹하면서 공동의 관심사를 가질 수 있는 콘텐츠로 기존 싱글 플레이에서는 가질 수 없는 MMO 게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아이언쓰론은 기획 단계부터 '글로벌 원 빌드' 출시를 염두에 뒀던 만큼 국내를 넘어 글로벌 시장을 정조준한다. 강 대표에 따르면 아이언쓰론의 형태는 1년9개월 전에 윤곽을 드러냈지만 차별화를 위해 3년을 꼬박 채워 방망이를 깎는 과정을 겪었다. 애초 게임명이던 '퍼스트본(장자)'을 막판에 게임 의미를 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아이언쓰론(철의 왕좌)'으로 바꾸기도 했다. 중간에 넷마블에 합류한 북미 지역의 카밤스튜디오도 개발 과정에 투입됐다. 강 대표는 "팀 필즈 카밤 대표가 방문해 게임의 사상이나 북미에서 느끼는 감성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등 최적화 과정에 도움을 줬고 앞으로도 카밤과 서비스 협력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략 MMO 장르는 글로벌 모바일 게임 시장의 22%를 차지하는 메인 장르다. 강 대표는 "전 세계 전략게임 시장에서 1등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전략게임에서 하나의 메이저한 게임이 차지하는 최대 비중은 30%로 전체 게임 비율의 6% 정도를 차지한다. 시장이 충분히 넓은 만큼 매출은 따라올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아이언쓰론은 기존 전략 MMO 게임의 과금 전략인 '페이투윈'을 지양한다. 페이투윈이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과금을 뜻하는데, 아이언쓰론은 페이투윈보다는 과금을 물지 않아도 노력의 시간을 줄여주는 등 정당하게 이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겨냥했다. 강 대표는 "과금을 유도하는 확률형 아이템 체계를 갖췄다고 수익이 많이 나는 것은 아니다"며 "결국은 게임 자체를 오래 가도록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아이언쓰론의 목표는 3년 이상 가는 장수게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향후에는 아이언쓰론의 지식재산권(IP)을 소설, 만화 등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IP에 목마른 넷마블은 아이언쓰론과 같은 자체 IP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방준혁 넷마블 의장은 지난 2월 제4회 NTP에서 자체 IP 육성을 본격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넷마블은 자체 IP 기반의 신작 출시를 통해 1·4분기 부진한 성적을 2·4분기에 반등할 계획이다. 강 대표는 "아이언쓰론은 다양한 영웅, 지역,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 게임뿐 아니라 다른 장르로도 확대해 오래 애착을 가질 수 있는 IP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전예약 반응은 긍정적이다. 아이언쓰론은 이례적으로 호주, 뉴질렌드, 터키 등 글로벌적으로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이용자 피드백을 받았다. 강 대표는 "현재 PVP(이용자 간 대결) 등에서 이용자와 균등하게 게임 플레이를 할 수 있는 패턴으로 게임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AI를 활용하고 있다"며 "향후에는 SF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혁신적인 인공지능(AI) 기술을 아이언쓰론에 적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18-05-09 14:40:05 김나인 기자
[되살아난 서울] ⑮ 서울 도심 한복판 무릉도원, '양녕대군 이제 묘역'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2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10여 분을 걸어 내려오면 '양명문(讓名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한옥이 나온다. 한옥 대문을 열면 세종대왕의 큰형 양녕대군의 묘와 사당이 있는 '양녕대군 이제 묘역'을 만날 수 있다. 숙종 대왕은 1675년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이 아우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사양한 덕망을 기리기 위해 사당(지덕사)을 세웠다. 원래 남대문 밖 도저동에 있던 사당은 1912년 묘역이 있는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서울시와 동작구는 지난 4월 27일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출입을 제한해왔던 양녕대군 이제 묘역을 시민들을 위한 문화·휴식 공간으로 되돌려주기 위해 18년 만에 전면 개방했다. 지난 4일 찾은 양녕대군 이제 묘역은 산새 지저귀는 소리와 연못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평화로운 무릉도원이었다. ◆마을의 문화유산··· 주민 쉼터로 양녕대군 이제 묘역은 동작구 상도동에 1만5281㎡ 규모로 조성됐다. '명예를 사양한다'는 뜻을 가진 양명문 안으로 들어가면 세 갈래로 나뉜 돌길이 보인다. 왼쪽으로 가면 정원이, 가운데로 올라가면 양녕대군 묘역이, 오른쪽으로 가면 사당이 나온다. 왼쪽 돌길을 따라 올라가면 눈앞에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정원에는 5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오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에는 묘역 성역화 약사, 양녕대군이 지은 한시, 대군이 초서체로 쓴 후적벽부 등이 새겨져 있었다. 상도동 주민인 장영자(62) 씨는 "당대 명필가답게 서체에서 강한 힘이 느껴진다"며 "글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 씨는 "동네에 숨겨져 있던 문화유산을 영영 못 보고 지나칠뻔 했다"면서 "이제라도 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며 밝게 웃었다. 동작구 상도4동에 사는 한명순(74) 씨는 "묘역을 주민 쉼터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게 정말 마음에 든다"며 "동네에 마땅히 산책할만한 곳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런 작은 공원이 생겨 너무 좋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동작구 관계자는 "이 지역에 주민들이 이용할 만한 공원 부지가 부족해 양녕대군 이제 묘역을 개방하게 되었다"면서 "문화행사를 진행해 주민들을 위한 휴식·교육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묘역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를 합장한 묘소가 있다. 묘소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 좌우로 2기씩 총 4기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었다. 장명등은 묘 앞에 불을 밝히는 등으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사찰과 왕릉 앞에 세워 두는 석물이다. 능을 지키는 수호물 문인석은 묘소 앞에서 내시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왕을 경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분당구 구미동에서 온 이효수(83) 씨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묘소에 와서 조상님을 직접 찾아뵙게 되어 기쁘다. 조선 왕조의 후예로서 자부심을 느낀다"며 "일반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는 지역 명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당도 재실도 출입금지··· "전면 개방 맞나요?" 묘소를 등지고 왼쪽으로 가면 지덕사라는 사당이 나온다. '지덕'이란 인격이 덕의 극치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양녕이 동생 세자에게 자리를 양보한 행적이 고대 중국 주나라의 태백과 같다는 의미에서 세조가 친히 명명했다. 사당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의 위패와 후적벽부 팔폭병풍 초서체 목각판, 숭례문 현판 탁본, 지덕사기 등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지만,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돼 들어갈 수 없었다. 이날 사당 앞에서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 관람객이 "여기는 뭔데 못 들어가게 막아놓은 것이냐"고 따져 묻자 지덕사 관리자는 "거기는 아직 개방이 안 되어 있는 곳이어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지덕사 사당 내에 있는 서고와 창고인 제기고 뿐만 아니라 사당 오른쪽에 있는 재실(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 도광재 역시 출입이 금지돼 들어갈 수 없었다. 중랑구 신내동에서 온 김관섭(81)씨는 "죽기 전에 사당 안에 있는 지덕사기를 두 눈으로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들어갈 수 없게 해놨다"며 아쉬워했다. 김씨는 "역사 교육을 위해서라도 가급적이면 다 개방을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서울시 관계자는 "사당은 제사 때 이용되는 곳이라 개방하지 않았다"면서 "동작구에서 지덕사 측과 협의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강동구 상일동에서 온 서창식(65)씨는 "입구 앞 표지석에 양녕대군 부인을 '광주 김씨'라고 잘못 적어놓았다"며 "학생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도록 안내문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2018-05-08 11:01:13 김현정 기자
[새벽을 여는 사람들] 국회 미화원 "미화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일"

지난 4일 새벽 6시. 서울 여의도 역사는 인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출구를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기자의 입가에 맴돌았다. 하얀 담장을 따라 10여 보를 걷자 기자의 허연 입김 사이로 둥그런 녹색 돔이 나타났다. 국회의원회관 9층에 도착하자 한 손엔 대걸레, 다른 한 손엔 파란 통을 들고 이동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동이 트기 전 국회를 환하게 밝히는 국회 환경미화원 정문숙(59)씨다. ◆ 새벽을 울리는 '성실'이라는 종소리 "이렇게 이른 시간에…(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더 이른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였을 정 씨가 기자에게 건넨 첫 인사말이다. 인사는 잠깐이었다. 그는 "오전 7시가 넘어야 새벽 일정을 마친다"며 다시 일을 시작했다. 긴 와이퍼로 화장실 거울을 연신 문대자 그의 땀이 목덜미를 타고 유니폼 옷깃에 닿았다. 끼얹은 물을 가르고 거울에 정 씨와 기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가 활짝 웃었다. 기자는 정 씨가 일하는 동안 관리과 청소소장 최창호 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최 소장은 정 씨를 '성실 여사'라고 칭했다. 11년 동안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 새벽을 여는 정 씨에게 어울리는 별명이다. 최 소장은 "문숙 씨는 미화원들 사이에서도 성실여사로 통한다"며 "문숙씨 뿐만 아니라 207명의 모든 미화원이 성실이라는 덕목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새벽 일정을 마치고 관리실로 돌아온 정 씨는 "미화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책임감과 성실함"이라며 "청소를 해도 곧 다시 지저분해지지만 끈기를 가지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밝혔다. 어쩌면 정 씨의 새벽을 깨우는 것은 모닝콜이 아닌 성실이라는 종소리일수도. ◆ "미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 "광이 참 예쁘죠?." 정 씨가 복도의 바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바닥에 왁스를 칠하고 광을 내는 것이 화장하는 것 처럼 너무 기쁘다"며 "아무렇지 않게 밟고 지나가는 복도지만 우리에겐 집의 거실처럼 마음이 간다"고 말했다. 정 씨는 미화(美化)라는 말을 유독 좋아한다. 정 씨는 "미화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며 "청소는 단순히 쓰레기를 치우는 업무가 아니다. 아름다움을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화를 하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요. 한 번은 화장실에서 청소하는데 한 청년이 다가와 저에게 '자신의 어머니도 미화원'이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고 캔커피를 주고 황급히 가더라고요. 저도 아들이 둘이나 있어요. 그래서 그 청년의 모습을 잊을 수 없죠"라고 말했다. 정 씨는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항상 하루가 행복해진다"며 밝게 웃었다. 그의 미화는 단순히 청소를 통해서만 이뤄지진 않는다. 누군가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는 모든 것. 그것이 일에 대한 정 씨의 원동력이다. ◆ "아름다움을 지키는 일, 나에게 큰 축복" 그런 정 씨도 환경 미화 일에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던 건 아니다. 그는 "처음엔 청소한다는 생각에 조금 겁이 났었다"면서도 "이제는 미화원에 대한 인식도 좋아졌고 국회의 정직원이라는 자부심도 갖게 됐다"며 목에 건 사원증을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지난 2016년 6월 국회가 미화원들의 직접 고용을 선포했다. 이로써 환경미화원들은 용역업체 소속을 벗어나 고용불안에 대한 심려를 떨쳐버리게 됐다. 정 씨는 "이 시대의 비정규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애환과 고통을 알아준 정세균 국회의장과 우윤근 전 사무총장에게 너무 감사하다"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국회 미화원들의 근무여건과 대우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정 씨는 "국회마크가 새겨진 작업복은 우리에겐 간절한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최 소장도 "60세 이하 국회 미화원들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이후 매년 지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임금인상은 물론 복지포인트, 건강검진 등 직원들의 처우가 개선돼 너무 기쁘다"고 공감했다. 그는 또 "일에 대한 성패는 일하는 사람의 자세에 달린게 아니냐"며 "이제 우리는 국회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능동적인 자세를 갖게 됐다"고 밝혔다. 정 씨는 대화 내내 "감사하죠"라는 말을 반복했다. 기자가 정 씨에게 '감사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남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국회 식구들에게 너무 감사하고, 국회가 아니라도 전국에서 열심히 청소를 하셔서 세상을 남모르게 빛내고 계신 모든 미화원분들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2018-05-08 08:14:52 유재희 기자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롯데푸드 의성마늘햄

[메가 히트 상품 탄생스토리] - 롯데푸드 의성마늘햄 국내 분절햄 시장을 탄생시킨 롯데푸드의 '의성마늘햄'이 올해로 출시 13년을 맞았다. '분절햄'은 햄 덩어리를 사용하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나눠 개별 포장한 햄이다. 의성마늘햄은 13년 간 분절햄 시장의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며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3일 시장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의성마늘햄은 52.5%로 점유율 1위다. 의성마늘햄은 2005년 3월 햄과 국산 마늘을 접목한 '마늘햄'이라는 제품으로 출시됐다. 이후 지역 농가의 특산물 마늘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지난 2006년 9월 의성군과의 협력으로 '의성마늘햄'이 탄생했다. 의성마늘햄은 마늘을 사용해 고기 특유의 잡냄새를 잡았고, 구웠을 때 은은하게 퍼지는 마늘 풍미로 지금까지 인기를 모으고 있다. ◆마늘을 사용해 풍미를 더한 햄 롯데푸드는 마늘햄 이전에 양파숙성햄, 황토포크햄, 탐라햄 등을 선보였지만 실패를 경험했다. 이후 삼겹살 등 돼지고기를 구워 먹을때 마늘을 자주 곁들인다는 것에 착안해 2005년 3월 돼지고기와 국산 마늘을 접목한 '마늘햄'이라는 제품을 출시했다. 롯데푸드는 처음부터 의성 마늘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늘햄 출시 후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겁자 롯데푸드는 제품을 고급화하고 맛과 브랜딩을 강화하기 위해 우수한 품질로 소문난 의성 특산물 마늘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롯데푸드는 2006년 9월 의성군과 MOU를 체결하고 '의성마늘햄'을 시장에 출시했다. 처음으로 마늘 넣은 햄을 만드는 만큼 제품 개발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식품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마늘의 맛이 너무 맵고 냄새가 강했던 것이었다. 제품 개발 초기에는 생으로 넣는 것과 쪄서 넣는 것, 볶아서 넣는 방법을 적용했다. 맛있는 마늘향은 살리면서도 거부감이 없는 맛을 내기 위해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연구원들이 연구소에서 제품개발을 위해 약 3개월을 노력했다. 이러한 연구 끝에 마늘을 한번 쪄서 투입해 특유의 아린 맛을 없애고 풍미를 살릴 수 있었다. 현재는 햄을 구웠을 때 은은한 마늘 향이 나는 최적의 함량인 1.44%의 마늘을 투입하고 있다. 의성마늘햄은 알이 굵고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던 의성 마늘을 사용해 출시 직후부터 큰 인기를 모았다. 특히 의성 지역은 부식토로 덮여 있어 토양이 비옥하고, 또한 일조시간이 길고 강수량이 적어 마늘의 생육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용이 편리한 최초의 분절햄 의성마늘햄은 업계 최초로 '분절햄'이라는 개념을 만든 제품이다. '분절햄'은 햄 덩어리를 사용하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나누어 개별 포장한 햄을 뜻한다. 의성마늘햄은 기존의 길고 두꺼운 햄 형태를 사용하기 좋게 세 덩이로 잘라 따로따로 포장해 출시하면서 최초로 분절햄 시장을 열었다. 기존의 햄은 김밥 속재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어른 팔뚝 정도 크기의 1㎏ 사각형 덩어리가 표준 크기였다. 이렇게 큰 용량의 햄은 일단 포장을 뜯고 나면 공기가 유입되기 때문에 신선한 보관이 힘들고 사용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더구나 과거에 비해 가족 구성원수가 감소하면서 한번에 다 먹지 못하는 커다란 햄의 크기는 많은 소비자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의성마늘햄은 큰 덩어리의 햄을 셋으로 잘라 개별 포장한 형태로 출시하여, 필요한 양만큼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위생적으로 보관이 가능한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편리한 제품을 찾던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의성마늘햄의 큰 인기 이후 육가공 시장에서는 소용량 트렌드가 나타나게 되었다. 여러 회사에서 잇달아 분절햄 및 소포장 제품을 출시한 것이다. 현재는 마트 등의 유통점에서 작은 용량으로 개별 포장된 육가공 제품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의성마늘햄은 육가공 시장의 소용량 트렌드를 선도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의성마늘햄은 론칭 1년 만에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한 후 지난해 54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10년 넘게 분절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롯데푸드, 의성마늘햄 브랜드 더욱 확대키로 의성마늘햄 브랜드는 2007년 '의성마늘 프랑크'와 '의성마늘 비엔나' 등 소시지 제품으로 확대됐고, 최근에는 의성마늘 베이컨과 슬라이스햄, 김밥속햄까지 출시되는 등 지속적인 브랜드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의성마늘햄 브랜드 매출은 출시 직후인 2006년에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한 이래 2010년 380억원, 2015년 430억원, 2017년 540억원을 기록하는 등 계속해서 확대 중이다. 의성마늘햄은 분절햄 시장에서 10년 넘게 점유율 1위를 지키며 인기를 모으고 있다. 롯데푸드는 올해 의성군과의 지역 상생을 더욱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선수 5명 중 4명이 의성 출신인 국가대표 여자 컬링팀(감독 김민정, 선수 김은정·김영미·김선영·김경애·김초희)을 의성마늘햄 CF 모델로 발탁한 데 이어 2년간 공식 후원한다. 또한 이번 모델 발탁을 시작으로 올해 의성마늘 제품 라인업을 추가로 확대할 계획이다. 의성마늘햄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한 경품 이벤트도 진행한다. 롯데푸드는 5월 10일까지 의성마늘햄, 의성마늘 프랑크, 의성마늘 비엔나 등 의성마늘햄 브랜드 제품을 구매한 고객 중 추첨을 통해 황금마늘 총 100돈을 비롯한 다양한 경품을 증정한다. 구매 영수증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면 응모할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롯데푸드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지역 상생 제품 '의성마늘햄' 롯데푸드가 의성군과 협력해 출시한 의성마늘햄은 식품업계의 대표적인 지역 상생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롯데푸드는 지역 특산물인 의성마늘을 활용해 제품의 맛과 신뢰도를 높였고, 의성군은 지역 특산물을 전국에 널리 알리는 동시에 안정적인 판로도 확보했다. 회사와 지역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상생 전략'을 펼친 것이다. 의성마늘햄 브랜드 제품의 생산을 위해 롯데푸드는 매년 약 100t의 마늘을 의성 농가에서 수매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의성마늘햄의 성공은 소비자들이 의성마늘을 국내 대표 마늘로 인식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롯데푸드는 단순히 제품 출시에 그치지 않고 제품을 활용한 지역 홍보에도 앞장서고 있다. 롯데푸드는 2010년부터는 매년 의성마늘햄 캠프를 열어 의성군의 지역 명소를 알리고, 의성 장학회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상생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롯데푸드와 의성군의 협력은 2015년 농림축산식품부와 대한상공회의소로부터 '농업과 기업의 상생 협력 우수사례'로 선정될 만큼 대표적인 CSV(공유가치창출) 사례로 평가 받는다.

2018-05-03 15:51:36 박인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