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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의 본초 테라피] 여름 더위, 시원한 '참외'로 날리자

한낮 더위에 입이 바짝 마르고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면 차가운 청량음료나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고 싶어진다. 하지만 시원한 참외 한 쪽을 먹는 것이 훨씬 건강에 이롭다. 노랗게 잘 익은 참외는 여름 더위를 물리치는 데 좋다. 찬 성질의 과일이라 뜨끈뜨끈해진 몸을 식혀주며 심한 갈증 해소에 좋다. 수분이 많은 데다가 식이섬유도 풍부하기 때문에 과도한 열로 인해 발생하는 열성 변비의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 참외는 유독 다른 과일에 비해 껍질을 많이 깎아내거나 씨를 아예 버리고 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씨와 껍질에 좋은 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 베타카로틴과 비타민 C, 칼륨, 엽산 등의 성분이 들어 있어서 여름철 피로 해소에 좋고 혈압과 혈당을 낮추어 각종 성인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따라서 껍질을 최대한 얇게 깎아내고 씨는 꼭꼭 씹어서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또한 참외는 100g당 31kcal로 수박과 비슷하게 낮은 칼로리에 속하는 과일이기 때문에 다이어트 기간에도 걱정 없이 섭취할 수 있다. 칼륨이 풍부하기 때문에 평상시 음식을 좀 짜게 먹는 사람들은 참외를 충분히 섭취하면 나트륨 배출에도 도움이 된다. 다만 신장 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칼륨의 과다 섭취가 신장 기능에 이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참외는 엽산이 비교적 많이 들어 있는 음식이라 임신부들의 경우 임신 전부터 자주 참외를 섭취하면 빈혈 및 태아의 기형아 예방에 도움이 된다. 여름철 강한 자외선으로 인해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그을렸다면 참외 껍질에 가까운 흰 부분을 이용해서 팩을 해주는 것도 좋다. 햇볕으로 예민해진 피부를 진정시켜주며 참외의 풍부한 비타민 성분이 기미나 잡티 완화에도 도움이 된다. 참외는 찬 성질의 과일이라 몸에 찬 기운이 많고 장이 약한 사람들은 복통이나 설사를 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한 참외는 씨 부분이 잘 상하기 때문에 참외를 사서 물에 담갔을 때 가라앉으면 상한 것이므로 먹지 않는 것이 좋다.

2017-06-14 15:51:11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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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마당에서 비움과 채움을 배운다

일전에 사진 한 컷이 번잡한 마음을 내려놓게 해주었다. 어느 시골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안에는 고색창연한 한옥 풍물이 담겨 있다. 그런데 정작 마음을 쉬어가게 해주는 곳은 한옥이 아니라 산그늘이 내린 숲속의 빈터, 그 집의 마당이다. 아늑하고 널찍한 것이 그 때 느꼈던 감성에 젖어들면 절로 평온해진다. 남는 게 사진이라고 했던가. 그냥 무심코 스치듯 찰칵 박은 사진 한 장이 도심생활의 메마른 내 마음을 오아시스로 적실 줄은 미처 몰랐다. 우리네 집 마당은 희로애락의 가족사가 흐른다. 그 흔적을 읽으려 사진 속으로 들어가 본다.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서성거리면 낯설지 않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 멍석에, 한가득 눈부신 햇살이 내리쬔다. 멍석 위로 휙 훑고 지나가는 바람 한 자락이 시원하고 불타게 맵다. 마당은 다용도로 오버랩 된다. 아이들이 뛰놀면 동네 놀이터가 됐고, 장대를 세우면 마당은 빨래 건조대가 되어주었다. 때론 결혼식장으로, 잔치마당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사진 속의 마당은 내게 많은 걸 선사한다. 여백의 여유를 가져보게 하고, 풍경을 그려보게 하고, 마당을 거닐게도 한다. 왁자지껄하고 북적거렸을 마당. 지금은 고요하고 텅 비어 있다. 그 마당이 내 눈을 더욱 반짝거리게 하는 건 삶의 큰 지혜를 가르쳐주어서다. 한바탕 흥을 치르고 난 뒤엔 마당을 비워둬야 또 다른 뭔가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비울수록 풍부해지고, 새로움이 샘솟는다는 비움의 미학! 그것은 신선한 삶을 노크하는 물결이고, 동력이며, 바람이다. 텅 빈 마당은 먼지만 풀풀거리는 공터가 아니었던 것이다. 빈 마당의 정적은 다음에 펼쳐질 더 큰 이벤트를 준비하는 폭풍의 전야다. 옛 조상들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마당을 늘 비워두었다. 비워두었기에 사람들이 모였고, 다양한 생각들이 나왔고, 흩어진 마음들이 하나로 모였다. 마당에 평상을 얹어 놓으면 달빛 아래에서 이야기꽃이 수북수북 피어났다. 케케묵어 식상한 얘기들은 흘러나가고, 신작 스토리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사진 속 마당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공원이나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참신한 아이디어가 번득일 때가 있다. 이끼 낀 생각의 노폐물들을 털어내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생각의 꽃이 피어난 까닭일 것이다. 귓구멍 속의 귀지 덩어리가 무심결에 떨어져나가 귀가 밝아지듯 뇌력이 총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생각의 꽃은 언젠가 생활의 지혜로 만개할 것이다. 더러는 과학이 되고, 전설이 된다. 비움이란 뺄셈하듯 매번 마음만 먹으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쉽게 이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채움에 급급한 덧셈 시대에 비움이 어디 쉬운가. 더 많은 돈을 벌고, 입고, 먹고, 듣고, 보고, 많이 갖고자 하는 덧셈의 욕망이 끝이 없는 것을. 일상들이 덧셈의 덫에 갇힌 형국이다. 버리는데 익숙하지 못해 장롱에 수년째 옷이 쟁여지고, 창고에는 필요 없는 물건들이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채로 골동품마냥 박혀있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해 번뇌하고, 발버둥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움의 마당을 그리워하면서. 나는 되풀이되는 일상의 번잡함을 비우기 위해 여행을 떠나곤 한다. 연초록빛 물감을 뿌려놓은 산과 에메랄드빛으로 너울거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삶의 시간이 길게 늘어나고 세상이 넓어진다. 영혼이 자유롭게 뛰놀 비움의 여백을 안겨주는 것이다. 가까운 강가에 나가 졸졸거리는 시냇물 음악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청렬해지고 비워진다. 행복이란 비울 줄도 알고 채울 줄도 아는데서 싹트는 게 아닐까.

2017-06-14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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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파워의 능력을 활용하자

우먼파워의 능력을 활용하자 창업 시장에서는 가장 실패확률이 높은 집단을 주부창업으로 꼽는다. 이는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소위 주부창업 시 최대의 적, 즉 '남편'이라고 불리는 집단에 의해서다. 창업은 가장 먼저 가정의 동의가 필수다. 남편과 이아들의 협조와 관심, 그리고 협업이 없으면 도저히 주부창업은 성공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편이라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창업 일선의 아내가 마치 TV프로그램에 나왔던 소머즈나 원더우먼 되길 바란다. 예컨대 남편이 퇴근할 때 집에서 맞이해주고, 아이들 공부도 잘 봐주고, 잘 보살피고, 시부모님에게도 정말 잘하고, 주말과 휴일에는 가족과 같이 지냈으면 하고, 가급적 아이들이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아이템으로 창업을 했으면한다. 또한 가장 중요한 건 이왕 시작했으면 돈도 잘 벌었으면 좋겠고, 아마도 대부분의 남편들이 창업을 결심한 아내들에게 바라는 내용들이다. 이세상의 남편들에게 외치고 싶다. "그럼 당신이 직장 때려치고 창업하라고." 물론 최근에는 자발적인 퇴사를 감행해 본인이 하고 싶은 분야를 개척하는 남편들이 있기는 하지만 성공에 대한 보장은 밝지 않다. 창업은 세심하고 꼼꼼한 영역이다. 여성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많은 사업의 영역이 창업이다. 결국 창업은 고객관리로 승패를 결정한다. 고객 서비스는 친절함과 구매욕구 충족 그리고 성실함과 절박함이 필요하다. 그러한 범위를 가장 성실하게 구현하는 사람이 주부일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업종을 선정해야 한다. 이후 그 업종의 표적고객들이 누구인지를 분석하자. 결국 표적고객들의 구매성향이 수익성이기 때문이다. 창업은 언제나 실패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실패한 창업자들은 네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과욕, 타성, 착각, 자아도취 등이다. 지나친 낙관과 의욕이 화를 부를 수 있다. 스동안의 가정생활이 자칫 타성에 젖어 쉽게 포기하거나 남을 의지하는 경향이 많다. 극소수의 창업에 성공한 사람이 마치 나도 될 수 있다는 쉬운 착각도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주부창업이 힘들다라고 세인들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만 잘 검토하고 준비한다면 주부창업이 오히려 성공을 이룰 수 있다. 주부는 위대하다. 그 누구보다 그 어느 업자들보다 고객의 감동과 만족을 위해선 다양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들이 바로 주부인 것이다. 진정 주부창업은 이 시대의 진정한 창업을 위해 필요하다. -한국창업경영연구소 이상헌소장 (컨설팅학박사)-

2017-06-12 16:22:26 박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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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동물농장' 같은 아트페어

[홍경한의 시시일각] '동물농장' 같은 아트페어 '아트페어'는 미술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가장 시장친화적인 행사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 아트페어라 해도 미술관급 작품들이 즐비하다. 단지 시장에 나왔을 뿐, 작품성과 예술의 다양성이 배제되진 않는다. 기획 또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기 보단 그들의 문화예술인식을 높이기 위한 방향에서 설계된다. 다소 실험적인 작품들도 과감히 선보인다. 심미적인 것도 많으나 메시지에 방점을 둔 작품들을 찾는 것 역시 수월하다. 때문에 유수의 외국 아트페어에선 단순히 작품을 사고파는 마켓이라는 느낌 보단 어떤 가치까지 고려한다는 인상이 크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아트바젤 홍콩(Art Basel in Hong Kong)'이다. '아트바젤 홍콩'은 그저 그렇던 '홍콩아트페어'를 인수한지 고작 4년 만에 아시아 최대의 미술장터로 올라섰다. 성장의 배경엔 '아트바젤 홍콩'을 이끄는 스위스 바젤 팀의 오랜 경험과 무관세 경제자유지구라는 내외적 환경이 놓여 있다. 그러나 치밀한 기획력, 갤러리 및 작가들에 대한 엄격한 심사, 컬렉터와 일반 관람객 간 철저히 분리된 서비스, 스위스 금융그룹 UBS와의 끈끈한 파트너십, 수준 높은 작품, 수십여 개가 넘는 동시다발적인 행사와 관광을 결합한 시너지 창출에 관한 꼼꼼한 전략도 '아트바젤 홍콩'이 세계적인 아시아중심페어로 자리매김하는데 있어 중요한 동력이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권에서 가장 먼저 아트페어를 출범시킨 우리나라의 사정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아트바젤 홍콩'의 뒤꽁무니만 좇기에 급급하다. 40여개에 달하는 페어가 난립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기 때문이다. 기획은 차마 '기획'이라고 말 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고 작품의 질 역시 재고해볼 여지가 충분하기 일쑤다. 대중의 각기 다른 취향을 포섭하기 위한 다양성 따윈 생각하기도 힘들다. 어느 땐 온통 과일가게 같거나 정육점 같고, 또 어느 땐 질 낮은 짝퉁 마블 코믹스(marvel Comics)의 엉성한 무대 같은 여운을 심어주기도 한다. 문제는 아트페어라는 행사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최근 돌아본 한 페어는 거의 '동물농장'이나 '캐릭터 페어'에 가까웠다. 전시장 구석구석 자리 잡은 건 사자, 사슴, 곰, 토끼 등이었고 전시장 한쪽에는 정체불명의 캐릭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런 공간에서 '아트바젤 홍콩'이나 '메세 바젤(Messe Basel)'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미학적인 작품이나 사회적 역학관계 속 예술의 본질에 질문하는 작품을 만나는 건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 인테리어업자나 상품 생산자라 부르면 딱 맞을 무늬만 작가들이 후기모더니즘을 병풍삼아 예술인 냥 하는 게 전부다. 궁금한 건 어째서 이런 현상이 그 오랜 시간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장기적 계획 없이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일부 화상(畵商)들의 비사업가적 마인드부터 들여다보게 된다. 그들은 같은 소비재라도 예술은 결이 다르다는 것을 외면한 채 최소한의 소명의식도 내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작가들에게 돈을 거둬 페어에 참여하는, 땅 집고 헤엄치기 식 일부 영업갤러리들의 행태까지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가 꽤나 세련된 '아트비즈니스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생존의 낭떠러지로 내몰린 작가들의 상황이다. 작품을 팔지 않으면 도무지 먹고 살기 힘든 작가들에게 아트페어는 유일한 출구다. 그러니 뭔가 좀 팔린다 싶으면 죄다 대중취향에 아부하는 오브제를 내걸면서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작가라는 고귀한 명사를 빌려 쓴다. 여기서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가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지 정도다. 만들어진 것을 누군가 구입하는 것과 구입할 수 있도록 읍소하는 것 간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인식하는가도 하나의 구분점이다. 아트페어는 분명 미술품을 매매하는 시장이지만 그것 자체로 의미의 완성은 아니다. 매매가 기획의 전부가 아니게 된 시대에서 대중취향을 단정해버리는 작품으로 승부하겠다는 과거의 발상으로는 더 이상 진일보가 어렵다. 미술이라는 범주에 같이 놓인다고 해서 대중언어에만 치우친다면 예술가의 생명력도 길지 못하게 된다. 길게 보고 멀리 가려면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2017-06-11 10:13:55 송병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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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의 탕탕평평] (58) Give & Take

[김민의 탕탕평평] (58) Give & Take 세상의 이치를 논할 때 흔히들 'give and take'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말 그대로 '주고받는 것'이다. 인간사에 일방적이라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비즈니스를 하던 정치를 하던 이외의 수많은 일을 행할 때 흔하게 쓰는 말이 '파트너'이다. 즉 유무형의 협력관계에 있는 동반자를 의미한다. 세상은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다소 진부한 개념이 정치의 존재이유와 필요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생존본능에 의해 가급적 자신이 손해 볼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동물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지각능력이 있는 우리 인간들이 특히 그러하다. 많은 이들이 상대에게 무언가를 먼저 제공받기를 원한다. 누가 먼저 주느냐에 혈안이 되어간다. 먼저 줘야 할 수도 있고, 먼저 받을 수도 있다. 삶의 방식에 일률적인 제도나 규정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사람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경험과 경우의 수가 늘어나면서 가장 힘든 게 인간관계라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누구와도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이 나와 같을 수 없는 것이고, 서로를 이해하며 제대로 된 소통과 공감이 생겨나기도 어려운 것 아닌가. 적어도 남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전제로 관계를 시작할 정도만 되어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소소한 한두 가지만이라도 공통분모가 있다면 그나마 관계는 수월해질 것이다. 정말 아무 바라는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베풀 수 있다면야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자기중심적인 우리 인간이 그것을 행함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려는 의지와 노력만 있어도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좋았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고 멀어지는 경우 대부분이 무언가를 바라고 상대를 대했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에게 어떤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도 아무 기대없이 한 행동이라면 이후로도 관계는 얼마든지 원만할 수 있다. 그게 쉽지가 않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서로 비슷하게 주고받을 때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성립된다. 내가 원하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에 암묵적으로나마 충분한 이해가 있을 때 가능하다. 필자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가급적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혹은 무엇이 가장 절실할지를 세심하게 살피는 편이다. 그리고 가급적 내가 먼저 상대에게 도움이 되려고 무던히도 노력한다. 가끔 생각지도 않았던 지인이나 인사 한번 정도 나눈 분들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받을 때가 더러 있다. 평소 이런저런 소통이 있던 사이라면 내가 좀 희생을 하더라도 부탁을 들어주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관계에서 자신의 이익에만 관련되는 무리한 부탁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솔직히 불편하기도 하고 가끔은 불쾌하기도 하다. 우리들 각자가 무언가를 상대에게 부탁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상대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말로만 생색내지 말고, 행함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그런 마인드로 각자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노력할 때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가 그만큼 유연하고 편안해질 것이다. 세상은 그렇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고, 내가 고맙고 기쁜 일이라면 상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평상시에는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로 지내다가 자신이 어려울 때만 연락하고 부탁하는 것은 각자가 어느 정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요구가 아니라 상호작용을 하자. 서로에게 부담이 아니라, 편안한 관계설정에 초점을 맞추자. 그러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게 많을 것이다. 부탁보다는 소통이 먼저이고, 소통 이전에 상대에 대한 진정성 있는 관심이 우선이 아닐까. 블로그 http://blog.naver.com/yumpie74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yumpie74

2017-06-11 10:13:41 송병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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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휘종의 잠시쉼표] 일방적 밀어부치기는 이제 그만

한국경영자총협회의 김영배 부회장이 지난달 25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확산되면 기업의 경쟁력과 일자리 창출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가장 중점을 두는 국정과제가 '일자리 창출'인데 새 정부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새 정부의 여기저기에서 비판을 받았으며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도 경총 부회장의 발언이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지난 6일에는 새 정부의 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미래창조과학부의 업무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 '이동통신 기본료 폐지'를 공약했고, 이를 주요 정책과제로 실천하려는데 미래부가 전혀 동조를 안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7일에는 이런 냉랭한 분위기가 조금 풀려 "9일까지 통신비 인하 공약에 대한 대안을 가져오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고 한다. 새 정부 입장에서 보면 경총이나 미래부는 새 정부에 전혀 협조를 하지 않는 '적폐세력'일 것이다. 청년실업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가운데 비정규직과 정규직 갈등이 이미 사회문제로 대두됐는데, 비정규직을 줄이자는 국민 정서에 배치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으니 얼마나 못마땅하겠는가. 더군다나 새 정부가 출범해서 뭔가 의욕적으로 일을 해보려는데 이런 발언으로 찬물을 끼얹었으니. 미래부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 조직이 통신 기업들 편의를 봐주기 위해 기본료 폐지에 소극적이라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냉정해지자. 모든 일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비슷한 일을 하는데 누구는 정규직이라며 각종 혜택을 받는 반면, 누구는 비정규직이라서 차별을 받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통신요금도 그렇다. 요금이 줄어들면 모든 국민이 혜택을 받는데 그걸 못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일게다. 문제는 이에 맞서는 반대 논리도 있다는 것이다. 경총 말대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기업 경영자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공기업들이야 정부가 주주여서 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사기업들은 엄연히 주인(주주)이 따로 있는데 국가가 기업경영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시장경제 차원에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더군다나 '적폐청산'을 외치며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에서 이렇게 강요하는 건 더더군다나 납득하기 힘들다. 통신요금도 마찬가지다. 통신은 플랫폼 역할을 한다. 철도를 깔면 그 위로 KTX도 다니고 새마을열차도 다니듯이, 이통사들이 최첨단 통신망을 깔면 그 위로 포털이나 콘텐츠, 게임 업체들이 그 망을 이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스타트업이 생기고 기술이 발전한다. 결국 모든 국민이 새로운 서비스를 경험하며 문화가 풍족해지고 산업이 발전한다. 통신사들이 '기본료 폐지→수익성 악화→투자여력 축소'를 우려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더군다나 기본료 폐지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 국민의 통신요금을 줄이는 방법은 많다. 그런데 가장 손대기 쉬운 기본료를 꺼낸 것은 정책의 정교함이 떨어진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핵심은 '분배'냐 '성장'이냐다. 여기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분배'를 택했다면 그걸 미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과거 정부처럼 일방적으로 상대방이 일부 소수라는 생각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힘으로 밀어부치는 '절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반대 진영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정책을 계속 고수하면 이전 정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2017-06-09 09:23:10 윤휘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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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욱 원장의 성형이야기] 무턱 콤플렉스

턱의 길이가 짧은 일명 '무턱'의 경우 상대방에게 무기력하거나 자신감 없어 보이는 인상을 풍기기 쉽다. 심한 경우 대인기피증이나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우 '무턱교정술'을 통해 충분한 개선효과를 볼 수 있다. 무턱교정술은 턱의 길이와 모양, 환자의 니즈에 따라 수술방법이 크게 달라진다. 먼저 무턱의 정도가 심하지 않고, 피부를 절개하거나 뼈를 깎는 수술과정이 부담스럽다면 필러나 자가지방이식술과 같은 비수술요법을 시행하는 것이 적합하다. 히알루론산을 주성분으로 한 필러는 시술 즉시 볼륨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턱끝 부위에 일정량을 주입해주면 된다. 반면 필러보다 긴 생착률과 지속력을 원한다면 자가지방이식술이 훨씬 효과적이다. 자가지방이식술은 자신의 아랫배나 허벅지 안쪽, 엉덩이 아래 부위에서 채취한 순수 자가지방을 원하는 부위에 이식해주는 방법으로 턱 외에도 비구순주름(팔자주름), 이마, 뺨, 코, 눈 밑, 가슴 등에 주로 시행한다. 무턱이 심한 경우 비수술요법만으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술요법을 시행해야 한다. 대표적인 시술방법으로는 보형물삽입술과 뼈절골술이 있으며, 턱의 길이가 심하게 짧다면 보형물삽입술보다는 뼈절골술을 시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뼈절골술은 뒤로 들어간 턱끝 뼈를 자른 뒤 앞으로 전방 이동시켜주는 방법으로 수술 후 턱끝과 입 모양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 뼈절골술은 수술 과정에서 안면신경을 건드리거나 출혈, 감염 등의 부작용에 노출될 위험이 높은 만큼 처음부터 안면윤곽수술 전문병원에서 임상경험과 해부학적 지식이 풍부한 성형전문의에게 수술 받는 것이 안전하다. 또 보형물삽입술과 달리 뼈절골술은 전신마취가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성형전문의와 마취통증의학 전문의가 동시 입회하에 수술이 진행되어야 하며, 마취와 관련된 모든 과정은 마취전문의가 집도해야 한다.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최소 한 달 이상 딱딱하고 질긴 음식은 피하고, 감염을 유발하는 술이나 담배는 금해야 한다. 만일 수술부위에 염증이 생기거나 극심한 통증이 지속된다면 즉시 해당 의료기관을 찾아 정확한 진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 /세민성형외과 원장(서울중앙지방법원 의료중재 조정위원)

2017-06-08 14:04:55 박승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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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책 '죽음의 수용소'

지난달에 독일을 다녀왔다. 프랑크푸르트, 퓌센, 뮌헨, 베를린을 짧은 기간 동안 다녀왔는데,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뮌헨에 있는 다하우 수용소와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이었다. 다하우 수용소는 시내와 떨어져 있어서 시간상 일정에 포함시키지 못했고, 대신 유대인 박물관에서 반나절 동안 시간을 보냈다. 히틀러가 600 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그런데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곳에 가 보고 싶었고, 몇 년 전에 봤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가 그런 마음을 처음 일으켰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의 잔학함이나 히틀러의 반인륜적 범죄가 아니라 수용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당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환경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적절했던 것 같다. 수용소의 문은 안에 있는 유대인들의 손이 아니라 연합군의 승패에 따라 외부에서 열릴 수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내면은 직접 폭력과 죽음의 공포를 통과해야만 했던 자신의 내면이기도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는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글로 단순히 옮긴 것이 아니라 몰래 수용소 안에서 심리학 연구를 한 것을 발표한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글을 보면 우리가 떠올리는 것과 차이가 많다. 우리는 나치 수용소라고 하면 '공포'를 떠올리지만, 그 공포는 수용소에 들어가는 첫 번째 단계를 거치면서 일상이 되어 버리고, 며칠만 지나면 가스실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고, 구타를 당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모멸감이었으며,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뎠다고 한다.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고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며,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둔 사람, 즉,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들이 결국 희생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의 한 근거로 수용소 주치의의 말을 인용하는데, 주치의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는데, 그 원인을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 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미쳤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책이 내 마음에 던진 말은 '막연한 희망'이다. 대중적인 희망이 개인의 것이 될 수 없고, '이번에는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은 '이번에도 불가능하다'라는 벽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사회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약속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삶에서 희망의 기회를 찾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이 개인의 몫은 사람을 어렵게도 만들지만 살아가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고, 좌절을 겪게 하는 동시에 눈물 어린 기쁨도 갖게 만든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도 결코 끌 수 없는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법률사무소 담소 대표변호사 박문택 제43회 사법시험 합격 (2001년) 사법연수원 34기 법률사무소 담소 대표변호사

2017-06-08 13:58:37 김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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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쌤의 키즈톡톡] 사랑의 표현은 직설적으로!

아이들은 부모의 말이나 행동을 전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인다. 부모는 자신에게 항상 최선의 것, 좋은 것만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부가 싸움을 자주하면 아이는 자신이 잘 못해서 부모가 싸운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우울증을 앓고 있으면 아이는 자신이 부모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가 아프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감정조절의 문제로 아이를 과도하게 훈육할 때도 그것 또한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혼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아이는 부모의 행동이나 감정을 어떠한 기준의 잣대를 두고 판단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부모의 행위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이유로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말과 행동은 아이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인 자아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친다. SNS를 하다보면 예쁜 아기들의 사진이 눈에 많이 띈다. 처녀 적에는 본인의 사진으로 도배되던 공간이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는 아이의 사진으로 가득 찬다. 그런데 예쁜 아이 사진과 함께 올라온 글을 읽다가 종종 놀랄 때가 있다. 부모의 시야에서 바라 본 아이를 담은 사진에는 분명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하지만 글에는 아이를 비웃거나, 놀리는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입장이라면 같은 부모의 언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조금은 미숙해보이고 서툴러 보이는 아기의 행동이 부모를 피곤하게도 하지만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은 애정 섞인 표현임을 안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패턴이 SNS만이 아닌 아이와의 대면관계에서도 반복해서 이뤄진다면 분명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언어는 곧 생각이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의도로 하는 말이라도 표현 되는 언어가 부정적이라면 아이의 잠재의식에는 부정적인 언어와 생각이 가득 차게 된다. 부정적인 언어를 듣고 성장한 아이는 타인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말하는 언어 역시 놀림이나 자책, 비난 등 부정적인 언어가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부모는 아이가 타인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부정적인 표현을 할 때면 '너 어떻게 그런 말을 쓰니? 그런 말은 하면 안 돼'라고 제재한다. 하지만 이미 아이에게 익숙해진 언어습관을 단번에 바꾸는 것은 어른에게만큼 아이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기 전에 부모의 입술에 먼저 사랑을 가득 채워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입술에서 나온 어두운 언어 속에서 사랑을 빛을 스스로 발견해내기 어렵다. 어두운 말은 오직 어두운 느낌만을 전할 뿐이다. 사랑을 표현할 때는 직설화법을 사용하자. 꾸미거나 보태거나 빙빙 돌리지도 말고 '너를 많이 사랑해', '너를 보고 있으니 엄마가 행복해'라고 말이다. 생각 없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사랑을 말할 때는 언제나 아무런 필터 없이 직설적으로 말해야 한다. 부모의 입술에서 나온 직사광선의 사랑 빛만이 어두운 말로 캄캄해진 아이의 마음을 밝힐 수 있다.

2017-06-07 16:43:45 양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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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단 한 장의 청춘 티켓

바람 부는 날 소나무를 만나면 문득 상념에 젖곤 한다. 저 싱그러운 푸른 잎을 어떻게 지켜온 것인가? 세찬 비바람과 얼음 추위에 시달리며 생을 이어왔을 이파리들. 그 모진 수난을 어떻게 견뎌온 것인가? 사태진 누런 황토를 뿌리로 움켜잡은 소나무. 이파리를 나부끼며 산 아래를 굽어보는 그 자세는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이며, 강한 집념의 표출이다. 돌처럼 단단히 여문 저 굴곡진 나뭇가지마다 인고의 상흔이 남아 있건만 오히려 당당한 척 하기에 눈물겹다. 그런 소나무에서 청춘(靑春)을 발견한다. 늘 푸른 이파리의 생기발랄함이,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의 자유분방함이 청춘의 어감이 자아내는 원초적 본능과 닮아 있다. 산등성이에 홀로 선 채 태양을 바라보는 늠름한 기상은 원대한 이상(理想)을 꿈꾸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파도처럼 굽이치는 자태에서 질풍노도의 숨결이 물씬 묻어난다. 닮은 게 어디 타고난 소나무의 형상뿐이랴. 코를 톡 쏘는 짙은 솔향기에는 벅차오르는 설렘이 묻어 있다. 바람 불면 운율을 탄다. 청춘의 사전적 의미는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사전이 일러주는 청춘은 길어봐야 십년 남짓.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그 청춘은 짧았다. 불꽃처럼 반짝거렸던 청춘이었다. 이 유월에 메뚜기 한철 같은 청춘. 산천 구경을 만끽하며 완보하리라는 그런 청춘 열차는 아니었다. 눈 깜짝할 새 스쳐 지나간 구간. 그 짧고 금쪽같은 청춘 구간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인생의 열차는 행선지가 있다. 아, 이제야 깨닫는구나. 인생의 행선지는 그 황금시간대를 지나면서 아로새겨졌다는 것을. 단 한 장의 청춘 티켓! 꿈과 이상, 희망을 싣고 어디론가 데려다줄 백지 티켓. 청춘 구간에서 미래의 인생 로드맵이 시나브로 그려졌을 거라는 생각을 할 때면 전율이 인다. 과연 열정을 다해 청춘을 꾸려왔던가? 배회하며 허송세월한 건 아닐까? 귀한 젊은 시간들을 허공에 날린 건 아닐까? 이 물음을 곱씹을 때마다 후회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청춘은 천재지변에도 봄이 오듯 찾아온다. 어느 누구든, 어디에 있든 기어이 오고야 만다. 흙수저든, 헐벗었든, 주린 배를 움켜쥐었든 찾아온다. 청춘은 이런 공평한 내력을 지니고 있기에 고맙다. 문제는 어떻게 쓰느냐다. 그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 길에는 늘 설렘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론 좌절과 절망, 불안, 아픈 마음의 파도를 이겨내야 한다. 구름이 잠시 해를 가려 마음이 어두워지더라도 인내할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청춘의 본질이다. 청춘의 계절은 봄이다. 소나무의 청춘은 계절을 탓하지 않는다. 늘 푸른 잎을 지켜오기에 사계절 내내 청춘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람들은 흔히들 청춘을 '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대중가요의 '청춘을 돌려다오' 노랫말이 중장년층의 마음을 달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세월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청춘을 누가 빼앗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 청춘은 내가 받아들이고 간직하면 되는 것이다. 이상을 꿈꾸는 것도, 젊게 사는 것도 내 몫이다. 청춘은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왕년이란 단어는 없다. 미래만 있을 뿐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자, 그들에게는 희망찬 설계도만 있을 뿐이다. 청춘의 뜰에 왕성한 추진력의 샘물이 솟구치는 까닭이다. 그런 뜨거운 열정으로 인생을 배우고 갈고닦아 청춘을 꽃피우는 것이다. 가슴에 청춘이 박동하지 않는다면 인생이 얼마나 쓸쓸할까. 세상이 고단하고 번잡할지언정, 그래도 태양이 힘차게 떠오르는 건 청춘 때문이 아니겠는가.

2017-06-07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