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책 '죽음의 수용소'
지난달에 독일을 다녀왔다. 프랑크푸르트, 퓌센, 뮌헨, 베를린을 짧은 기간 동안 다녀왔는데,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뮌헨에 있는 다하우 수용소와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이었다. 다하우 수용소는 시내와 떨어져 있어서 시간상 일정에 포함시키지 못했고, 대신 유대인 박물관에서 반나절 동안 시간을 보냈다. 히틀러가 600 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그런데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곳에 가 보고 싶었고, 몇 년 전에 봤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가 그런 마음을 처음 일으켰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의 잔학함이나 히틀러의 반인륜적 범죄가 아니라 수용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당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환경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적절했던 것 같다. 수용소의 문은 안에 있는 유대인들의 손이 아니라 연합군의 승패에 따라 외부에서 열릴 수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내면은 직접 폭력과 죽음의 공포를 통과해야만 했던 자신의 내면이기도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는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글로 단순히 옮긴 것이 아니라 몰래 수용소 안에서 심리학 연구를 한 것을 발표한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글을 보면 우리가 떠올리는 것과 차이가 많다. 우리는 나치 수용소라고 하면 '공포'를 떠올리지만, 그 공포는 수용소에 들어가는 첫 번째 단계를 거치면서 일상이 되어 버리고, 며칠만 지나면 가스실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고, 구타를 당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모멸감이었으며,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뎠다고 한다.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고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며,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둔 사람, 즉,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들이 결국 희생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의 한 근거로 수용소 주치의의 말을 인용하는데, 주치의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는데, 그 원인을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 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미쳤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책이 내 마음에 던진 말은 '막연한 희망'이다. 대중적인 희망이 개인의 것이 될 수 없고, '이번에는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은 '이번에도 불가능하다'라는 벽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사회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약속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삶에서 희망의 기회를 찾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이 개인의 몫은 사람을 어렵게도 만들지만 살아가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고, 좌절을 겪게 하는 동시에 눈물 어린 기쁨도 갖게 만든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도 결코 끌 수 없는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법률사무소 담소 대표변호사 박문택 제43회 사법시험 합격 (2001년) 사법연수원 34기 법률사무소 담소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