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9>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1927년)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9>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1927년) 어둠의 결함이 아침노을을 보는 호명의 방법은 '감정의 혼란'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인 1927년에 발표된 독일(어) 소설이다.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의 '벨에포크(belle 'poque·좋은 시대라는 뜻)'가 끝나고 나치의 득세를 앞두고 힘든 세상의 문이 열릴 때 나온 작품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난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년)는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으로 나치의 핍박을 피해 달아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감정의 혼란'은 동성애를 소재로 한 본격 퀴어소설이다. 당시로선 소재면에서 매우 충격적인 소설이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혼란스러운 주제인 동성애를 나름으로 정색하고 다뤘다. 대표적으로 비슷한 시기인 1930년에 발표된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동성애를 코드로 활용하며 암시한 것과 달리 정공법을 취했다. ◆보편적 성애라는 표현은 가능한가 남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보편적 사랑으로 여겨지는 이성애와 대비시킨다. '감정의 혼란(Verwirrung der Gefuhle)'이라는 제목 자체가 남자 간의 사랑을 불편한 것으로 전제하는 듯하다. 감정으로 인해 분열하고 분열 속에서 실존적 위기를 겪으며 거기서 어떻게든 삶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된다. '비록' 남자로서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 모습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 보편적인 인간의 한계, 인간의 좌절과 추락을 그린다. 동성애를 소설의 소재로 삼되, 그것이 보편성의 주제로 받아들여지도록 형상화하는 데 역점을 뒀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동성애인지 이성애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는 독자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작가의 노력이 어느 정도 문학적인 성취로 이어진 듯하다. 이 소설에서 어떤 게 특수성이고 어떤 게 보편성인가를 따져보는 다른 관점이 가능한 듯하다. 동성애를 특수성으로 보고 이성애를 보편성으로 보는 상투적인 구분이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이성애를, 우리가 많이 목격하고 있기에 어느 정도는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엄밀하게 말해 그저 숫자가 더 많다는 이유만으로 한쪽이 보편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설의 확실한 표명은, 교수에게 주어진 상황이 보편성의 맥락에 처한다는 사실이다. 즉, 교수는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그런 측면에서 보편적인 자아의 모습을 구현한다. 교수 부인도 이성애자로 그런 (자아의) 성적 성향을 명백히 밝힌다. 소설에서 또 분명한 것은 교수 부부 두 사람의 욕망 실현이 저지된다는 점이다. '보통명사'로 주어진 교수와 교수 부인은 각각 확정된 성적 성향을 지닌 보편적인 자아이다. 그 보편성은 보편성을 실현할 수 없는 불안정한 구조에 던져져 있다. 그것이 그들이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유이고,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성적 취향이 문제가 아니라 좌절이 문제다. 물론 사회적으로 금지된 교수의 동성애 성향은 분열이라는 근본적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다. 주인공 혹은 화자인 롤란트는 자신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극 중에서 확신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신의 감정도 확신하지 못한다. 성적 취향에 관한 정체성을 모르거나 확립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애이든 동성애이든) 교수 부부의 확정된 성 취향이 보편성의 모습이라면 롤란트는 특수성의 단계에 처했다고 말하는 방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유명사로 보통명사 초점 흐리기 소설의 화자가 분명한 가운데 등장인물의 호명 방법이 다른 점이 흥미롭다. 핵심 등장인물 셋 가운데 고유명사는 하나고 나머지 둘이 보통명사로 처리됐다. 소설은 고유명사의 등장인물을 내세운 1인칭 시점이지만, 변형된 1인칭 시점이라고 해야겠다. 여기서 소설의 제목에 든 '혼란'의 주체가 누구이냐고 묻는다면, 흔히 교수를 '혼란'의 주체로 언급하는데 나의 대답은 롤란트이다. 롤란트만이 고유명사로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고유명사 옆에 보통명사를 배치한다는 것은 카메라 앵글에 비유하여, 고유명사를 포커스인하고 나머지를 죽여버린 것임을 의미한다. '보통명사의 사람'은 책상, 나무 등과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유일한 고유명사(롤란트)가 하나 있다는 것은 주체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그 주체가 갖는 감정의 혼란을 롤란트를 통해 그려냄으로써, 나무 책상과 마찬가지로 교수와 교수 부인을 롤란트의 인생 어느 시점에 존재한 풍경의 구성물로 격하한다는 시사이다. 보통명사로 호명된 두 사람의 '혼란'은 무엇일까. 교수와 교수 부인에게서 표명된 것은 혼란보다는 분열이다. 이들에게 문제는 실현되지 않는 욕망과 그 앞의 좌절이다. 롤란트는 자기가 상대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이 동경인지 사랑인지 확인 또는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지 없을지 결단할 수 없어서 혼란을 느낀다. 즉 사랑 자체의 판단에 앞서 동성애라는 사랑의 방식 앞에서 망설인다. 교수나 교수 부인은 자신의 감정을 확신한다. 제자를 사랑한다. 제자를 사랑하지만, 사랑해서는 안 될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감정에 확신이 있지만, 그것을 관계에 집어넣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불안을 품는다. 롤란트가 불확정한 자아의 혼란을 겪었다면 이들은 자아의 분열을 드러냈다. "남자가 남자에게 바치는, 끝끝내 충만할 수 없는 정신의 정열은 대체 어떻게 해야 완전한 실현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런 정열은 정신이 그러하듯이, 항상 흐르고는 있지만 영원히 만족될 수 없으며, 완전히 흘러 버릴 수도 없는 그런 것입니다."('감정의 혼란') ◆신낭만주의 교수가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는 인물로 그려진 것과 관련해서 생각을 밀고 나갈 영역이 있다. 소설이 발표될 무렵 독일을 중심으로 융성한 문예사조를 신낭만주의라고 부른다. 낭만주의는 역사에서 반복해서 나타났다. 보편적인 정신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낭만주의라는 말을 쓰는가 하면 특정한 문학이나 예술, 정신의 흐름을 지칭하기도 한다. 후자 의미의 낭만주의는 서구에서 두 번 정도 등장한다. 처음에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낭만주의가 나오는데, 인간 이성의 지배를 선언한 계몽주의를 반대하며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강력하게 요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사실주의(나아가 자연주의까지)가 등장하고 다시 이것의 반동으로 새롭게 나타난 낭만주의는, 당시의 과학적 발견, 과학적 합리주의가 인간의 이성을 과하게 강조하고, 이성 외의 측면을 도외시한 것을 비판한다. 신낭만주의다. 신낭만주의는 표현주의 및 인상주의와 연결된다. 크게 보아 신낭만주의 흐름에 위치한 이 소설에서 셰익스피어는 주요한 모티브로 언급된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일까. 고전주의는 그리스·로마를 중시하고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그러한 태도에서 떠난다. 소설에서 계속 셰익스피어를 얘기하는 교수를 중심으로 논의해 보자. 고대 그리스에서 말하는 비극의 주인공은 숭고한 사람이고, 본인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운명 같은 자신 바깥의 요인으로 인한 결함 아닌 결함 때문에 고통받는다. 교수는 동성애 성향과 관련해서 자신에게서 비롯된 결함인지 아닌지 추정하기 힘든 '결함'을 갖고 있어서 그리스적이지 않고 고전적이지도 않다. 동성애 성향 자체가 인간의 결함을 의미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시선이 그랬다는 말이다. 당시의 규범으론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개인의 '결함'이었다. 그리스가 숭고함의 결함을 이야기하는 반면 '감정의 혼란'에서는 어둠의 결함을 말한다. 분열을 일상적으로 수용하며 자기의 어둠까지 안고 살아가고, 자신의 욕망이 부정당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상황에 부딪혀 부질없는 희망을 품는다. 그리스의 고전문학과 비교하여 셰익스피어 문학에 (현대의 관점에서) 대중성이 자리한다고 할 때 희망이 없고 자신을 부정해야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희망을 계속 품는 분열된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리스 비극보다는 셰익스피어의 대중적인 비극의 성격이 더 잘 부합하지 않았을까. 글쓰기와 관련해서 예컨대 프랑수아즈 사강 같은 프랑스 작가가 사랑을 감각적이고 놀라운 표현으로 그렸다면, 츠바이크는 보다 본질적이고 공감력이 큰 표현을 쓴다. 연애나 만남의 결정적인 장면을 일상적인 구성을 통해 잘 드러내어, 말하자면 예로든 사강에 비해 감각적인 면이 좀 떨어지지만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는 더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흔히 운위되는 '독일 문학'과는 거리가 느껴져 적어도 이 소설만으로는 일도양단으로 오히려 프랑스 문학에 더 가까워 보인다. 모종의 편견이지만 '독일 문학'은 보통 '생생(vivid)'하지 않고 흐릿하며 영화화보다는 낭송에 더 어울릴 것 같다. '감정의 혼란'은 소설을 읽을 때 영화로 보는듯하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감정이 뚜렷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휴고 폰 호프만슈탈 등 신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작가 츠바이크는 전기 작가로 유명하다. "자유 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아내와 함께 자살을 결행함으로써 주변인으로 죽었다. 브라질에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고향에서 버려진 난민으로 삶을 마감했다. "여러분은 이 길고 어두운 밤 뒤에 마침내 아침노을이 떠오르는 것을 보시길 빕니다.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가겠습니다"는 유서를 남긴 자유주의자의 소설 '감정의 혼란'은 혼란과 분열을 얘기하지만 종국엔 자유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