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6>알렉산드르 푸시킨 '대위의 딸'(1836년)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6> 알렉산드르 푸시킨 '대위의 딸'(1836년) 자세히 보아야 예쁜 예카테리나, 푸가조프, 그리고 타란티노 18세기 중반 러시아에서 짜르를 참칭한 푸가초프의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귀족 계급의 장교 그리뇨프와 대위의 딸 마샤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러시아 근대소설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작품. '푸가초프의 난'은 러시아의 근대의 길목에서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눈보라 치는 밤 그리뇨프가 나중에 푸가초프로 밝혀지는 정체불명의 사내를 만나 그 사내의 도움으로 위험을 벗어나며 소설이 전개된다. ◆'푸가초프의 난' 1836년에 발표한 '대위의 딸'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38살의 젊은 나이에 결투를 벌이다 숨진 1837년의 1년 전 작품이다. 원한 인생의 결말은 아니었지만 자신 인생의 결산작인 셈이다. 간단히 역사소설인데, 역사소설에서는 역사에 방점을 찍었는지 소설에 방점을 찍었는지가 우선적인 관심사다. '대위의 딸'의 역사 소재는 '푸가초프의 난'이다. 당시 러시아는 근대적 국민국가와 거리가 멀었고 의미를 부여하자면 봉건 왕조 내에 '계몽적' 변화가 있었다 하겠지만, 근대성과 비교하면 찻잔 속의 태풍 정도였다. '푸가초프의 난'은 1773년에서 1775년 사이에 일어난 계몽군주를 자임한 예카테리나 대제 치세(1762~1796년)의 사건이다. 서유럽에서는 얼마 뒤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근대로 직진한다.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난 러시아는, 농민 반란이란 기본적인 성격에서 드러나듯이 이 사건 이후에도 봉건성이 여전한 절대 왕정, 그것도 가장 후진적인 절대 왕정이 확고했다. 그런 사회상을 바탕으로 소설이 전개되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소설 속의 직접적 배경은 1773~1775년이지만 푸시킨이 글을 쓴 시점은 1836년이다. 그사이에 러시아에서는 나폴레옹의 침략에 맞선 1812년의 조국전쟁과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의 봉기가 있었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집필한 동기이자 소재인 조국전쟁은 러시아 근대사의 거대한 전환점에 해당한다. 실패한 쿠데타 데카브리스트의 봉기 또한 러시아 혁명사의 서장에 해당할 정도로 의의가 크다. 계몽군주 예카테리나 대제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농노제에 기반한 채 자본주의의 맹아조차 없는 후진적이고 폭력적인 군주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에서, 당시에 지배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군인들을 중심으로 1825년 12월 니콜라이1세 즉위에 맞춰 반란이 일어났다. 러시아어로 12월을 '데카브리'라고 하고, 12월에 일어난 봉기이기에 12월당원(黨員) 즉, '데카브리스트'의 봉기라 한다.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봉기 자체는 허망하여 아마추어처럼 그저 광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니콜라이1세에 진압당하고 만다. 러시아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푸가초프의 난'과 비교하면 반란의 성격과 양상, 규모가 달랐다. 그러한 역사적 상황을 곧바로 겪은 뒤인 1836년에 쓴 소설인 만큼 시대에 대한 푸시킨의 고민이 당연히 녹아들어 있다. 역사적 사건을 보는 데는 시점이 중요하다. '푸가초프의 난'을 소설의 무대로 파악할 때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의 봉기 이후에 '푸가초프의 난'을 바라본다. 데카브리스트들은 농노제 폐지와 입헌 군주제 수립을 통해 근대국가로 전환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푸시킨 시대에 아직 새로운 전망의 싹이 움트지 않았다. 그렇지만 좋은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에 푸시킨은 열린 희망의 결말을 선택하게 된다. 로맨스 소설이라 할 '대위의 딸'에서 의미찾기는 간단하지 않다. 민족 문제와 봉건성의 문제가 모두 등장하지만 전면적이거나 독자가 간단히 알아챌 만큼 치열하게 또는 과학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동화로 읽힐 수 있을 만큼, 무성의하게 여겨질 정도로 느슨하고 가벼운 터치 속에서 민족 문제와 봉건성이 흩어져 있다. 이런 문제를 이렇게 편하게 다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푸시킨에 따라다니는 러시아 근대 소설의 문을 연 작가라는 평가에서 오히려 그에게 아직 근대 소설의 기법이라든지 하는 것에 관한 치열한 고민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기에 따라 너무 평이한 결말과 우연성에 입각한 안이한 해피엔딩이 동원된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러시아 근대 소설의 리얼리즘과 리얼리티에 정면으로 접근한 수작으로 인정받는다. ◆소박한 사실주의에서 담아낸 예민한 시대의식 우선 푸시킨이 글을 쓰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요주의 인물로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쫓겨나기도 한 그는 작가로서 항상 짜르의 검열과 감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충족되지 않은 엄혹한 상황이 '대위의 딸'의 안이함의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푸시킨이 선각자로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였겠지만, 그에게 그의 시대가 부여한 한계 같은 게 목격된다. 아마 그때까지 그나마 현실성 있는 대안이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봉기였을 터다. 여기엔 젊은 군인들을 중심으로 데모를 벌여 입헌 군주제를 주장한 낭만성이 결부된다. 짜르체제의 봉건성을 전격적으로 뛰어넘어 러시아 혁명사에서 실제로 선보인 철의 정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과 같은 급진적인 흐름은 아직 나타나기 전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본격화는 20세기 들어서이고 서유럽의 사실주의 흐름도 푸시킨 시대보다 더 뒤쪽의 상황이기 때문에 그의 사실주의 실마리는 상당히 소박할 수밖에 없었다. '소박한 사실주의' 속에다 민족과 봉건성 문제를 모두 집어넣으면서 러시아 근대사의 중요한 장면의 하나라고 할 사건을 배경으로, 그 격동 속 남녀의 사랑을 잡아낸 게 '대위의 딸'이다. 그래서 외양상 마치 사랑이 승리한다, 휴머니즘이 정답이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직접적인 언급을 삼가는 모호성 가운데서 소설은 민족 문제와 절대 왕정에 따른 봉건성 문제를 다룬다. 의도한 방식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진지함을 회피하는 또 다른 방식의 진지함이었을 수 있다. 사랑은 물론이고, 나중에 소비에트연방에 실제로 표면화한 민족 문제,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불거졌던 봉건성의 문제가 다 버무려져 있다. 그런 것들이 전혀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게 잘 결합하여 로맨스의 배경인 양 비치기에 고전의 지위를 지키고 있을 법하다. ◆타란티노와 푸시킨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에서는 1969년에 일어난 할리우드 배우 샤론 테이트의 실제 살해사건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 각각의 배역 사이의 극중 우정과 결합한다. 그것처럼 '대위의 딸'에서 '푸가초프의 난', 그리고 그리뇨프와 마샤의 로맨스가 결합한다. 역사 속에 일어나는 두 사건을 결합해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때는, 결국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에서 샤론 테이트 사건을 고유 명사로 처리했듯이 '대위의 딸'에서도 푸가초프라는 인물을 실제 인물로 처리해서 역사성의 두드러짐 같은 것을 진열한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에서 '실제' 샤론 테이트 사건을 다루면서 마지막 13분 동안에 타란티노식의 화끈한 결말로 사건을 뒤집어버렸지만 '대위에 딸'에서는 사건이 뒤집히지 않는다. 비교적 역사에 충실한 방식을 취한 '대위의 딸'에서는 '푸가초프의 난'이 전편(全篇)에 흩어져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는 사건을 마지막에 집중적으로 배치해서 한 번에 모아 말아서 때리는 타란티노식 영화 기법을 쓴다. '대위의 딸'에서는 로맨스와 역사적 사건이 구분 없이 합체한 모습이 나타났다. 비유로서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는 삼겹살식 구성이고, '대위의 딸'은 마블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블링 방식에서 놓치기 쉬운 것은, 삼겹살은 비계가 구분되기에 명확하게 비계의 양을 짐작할 수 있고 살이 많은지 비계가 많은지 따져볼 수 있지만, 살과 비계가 섞여 있는 마블링에서는 실제 비계의 양을 측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텍스트로서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가 훨씬 더 재미있고 전개가 빠르다 보니까 얼핏 작위적이지 않다고 느껴지지만, 그것은 작위적이지 않게 만드는 작위일 뿐이다. 마블링이 좋으면, '대위의 딸'이 그렇듯, 다소 어색할지언정 작위적이진 않다. '대위의 딸'이 하려던 얘기가 뭘까. 가족이나 인간 또는 휴머니즘 같은 보편성 주제로 귀결한 것으로 보이기에 어쩌면 헷갈릴 수 있지만 역사소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푸시킨은 사랑과 가족, 인류애라는 범용 주제를 그리면서 이 소설에서 절대 역사성을 놓치지 않았다. 소비에트 작가들이 푸시킨을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한 이유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나오기 훨씬 전에 푸시킨이 소설로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역사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른바 전형성의 문제라든지 계급성으로 각성한 인간의 모습, 이런 것들을 아예 다루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다룰 수 없었다. 다루지 않은 것들은 피해갈 수 있다. 죄가 많으면 은총이 많다고 했는데 죄가 없으면 정죄도 없다. 사소한 것이지만 끝마무리를 하는 방식에서 역사소설이 가져야 하는, 사실과의 거리에 관한 고민이 개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별도 단락으로 처리함으로써 그 시점 자체를 투과해 당시의 역사에서 현재에 이어지게 하거나, 당시의 역사 상황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자연스럽게 현재로 성취하도록 만드는 장치도 된다. 인간에 주목한 소설로 혹여 되게 어설프게 쓴 것 같다고 느낄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세히 보면 어설프지 않은 장점이 많이 있는 듯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글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