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0>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1955년)
'롤리타'는 20세기 문학에서 논란이 된 작품을 거론하면 반드시 포함되는 작품이다. 12살 소녀를 향한 중년 남자의 사랑과 욕망을 담은, 언어의 마술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년)의 이 소설은 판매금지를 거쳐 베스트셀러가 돼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탄생시켰고, 1967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의해, 1997년 에이드리언 라인 감독에 의해 두 번 영화로 만들어지는 등 예술과 대중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의 자기결정권의 범위와 문학의 형상화 소아성애와 관련한 논의의 핵심은 성의 자기 결정권인데, 크게 사회학이나 인류학 측면에서 보는 것과 문학 관점에서 보는 두 가지가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소아성애가 당연히 무조건 부인돼야 한다. 근대국가의 성립과 함께 개인의 교육과 성 취향이 국가 차원의 시스템과 기준에 맞춰 정비된다. 성인으로 인정하는 나이, 결혼할 수 있는 최소 나이를 국가가 정했다. 과거 개별적인 수준에서 또 개인차에 의해서 어떤 곳은 폭력이 개입하고 어떤 곳에는 권력이 개입하고 어떤 곳에서는 (쌍방의) 자기 결정권이 개입해서 소아성애가 일어났지만, 지금은 공식적으로 또 규범상 금지되었다. 사법체계가 동원되는 획일적 기준을 국가 혹은 사회가 설정하였기에 더는 자기 결정권에 속하지 않게 됐다(근대국가를 벗어나 구조주의의 상대주의 프리즘이 작동하면 논의를 새로 시작해야 한다). 동성애와는 논의 차원이 다르다. 예를 들어 어느 작가가 말했듯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기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하여도, 소아성애는 결정권 보유나 합의와 무관하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로 국가 시스템이 공공연하게 결정한 상태에 해당하여 '권리'가 유보된다. 문학에서는 다른 논리가 등장한다. 나보코프는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고 싶었는데 찾지 못했다"고 하였다. (근대)국가나 사회 시스템이 아무리 특정한 것을 금지하더라도 문학은 그러한 거대 체계에서 어긋난 양상을 형상화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소설 속 험버트와 롤리타의 성의 자기 결정권은, 문학에 복무한다는 전제하에서 존재할 수 있다. 험버트가 롤리타의 법률상 아버지이자 보호자로서 법률상 딸인 롤리타와 성적으로 서로 소통하는 상황이 현실이라면 범죄이자 성적 착취이지만, 문학에는 인간 욕망의 그런 양상마저 그려낼 자유가 부여된다. 그런 불편한 것들을 그려낼 때, 불편한 것들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잘못하면 외설이 되고 잘하면 예술이 된다. 불편한 것들을 보여주면서 인간 욕망이 체계와 부딪혀서 인간의 가치 존엄성 의미 등을 그 마찰 속에서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저 선정이나 관음, 상업 수준으로 끝나면 외설이고 넘어서면 예술로 불리게 된다. '롤리타'는 혹독한 평가를 거쳐 '넘어선 것'으로 살아 남았다는 게 문학계의 일치된 의견이다. 소아성애를 다룬 외설이 아니라 인간을 탐색한 문학이다.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문학의 기능이기도 하면서 결국 우리가 살아갈 때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중년 남자가 롤리타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일은 확실히 금단의 영역이지만, 문학 밖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그게 모두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문제행위로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동으로 사랑이 아닌 걸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책임 너머에 존재하는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인간'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 문학은 이러한 '인간'을 이야기함으로써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다소 불편하고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다. ◆자기혐오와 냉소의 살짝 웃기는 분열 소설에서는 소아성애와 근친상간이 겹쳐진다. 롤리타가 근친상간이란 말을 쾌활하게 내뱉는가 하면 작가는 근친상간 대신 근친상간의 패러디라는 말을 쓴다.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둘이 피가 안 섞였고 부녀로 생활한 지 한 달이 안 됐기에 명백한 근친상간은 아니다. 근친상간의 구조 안에 소아성애를 끌어들이는 증폭에서, 즉 일종의 유머 또는 거리감에서 자기혐오와 냉소가 뿜어져 나온다. 작품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해학이 느껴지는 구조와 정교한 문체를 통해 심리적인 기쁨을 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롤리타가 험버트에게 자기라고도 부르고 아빠라고도 부른다. 이중적인 존재로 분열한다고 말해야 하지만, 이게 조금 웃기는 분열이다. 훌륭한 문학에서 이중성 속의 분열은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괴로운 분열이다. 여기서는 아빠의 역할이라는 가상의 존재와 자기에게 현존한 소아성애가 분열하는 구조여서 이중성이 약간 허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유를 찾자면 작가의 삶과 살짝 관련되지 싶다. 작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신세계와 구세계의 분열이 그에게서 목격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구세계에서도 러시아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에 유럽엔 난민이 넘쳐났다. 그때도 국경 같은 건 명확했지만, 국경 내에서 국민을 통제하는 방식엔 약간 여유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러시아 왕족이나 귀족이어서 다른 유형의 난민에 비해 과도적이지만 대우를 받았다. 물론 그렇다 하여도 난민이란 정체성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러시아에서 귀족 혈통으로 자라다가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서 자기 조국을 떠난 나보코프는, 유럽에서 다시 한 번 미국으로 넘어가는 이중 난민을 경험한다. 작가 자신의 주변인·경계인의 경험이 작품에 반영되어 험버트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거의 유사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망치로 발자크와 고리키와 토마스 만을 부수리라 소설의 효용과 관련하여 나보코프는 '롤리타'에 교훈을 심어놓지 않았다. 외설이 아니지만 반면교사를 만든 것도 아니다. 소아성애와 유사 근친상간 소재의 소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소설에서 캐릭터의 심리적인 완결성을 구현하는 데에 집중했다. "언젠가는 누군가 망치를 들고 나타나서 발자크와 고리키와 토마스 만을 힘차게 때려 부수리라." 작가의 이 말은 소위 리얼리즘으로 추앙받는 작가들을 '심리적인 것'으로 넘어설 수 있다는 생각을 표현했다. 타협해서, 문학의 망치는 발자크와 고리키와 토마스만의 망치만이 있는 것이 아니며, 나보코프의 망치도 있다라고 말해도 좋겠다. '롤리타'를 두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많이 거론한다. 발간시기(1955년)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운위하기에 조금 빠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서막이라고 할까. 기술 방식에서 소위 '메타'적인 게 많이 나타난다. 소설에 작가가 끼어들어서 독자한테 말을 걸고, 괄호 치고 엉뚱한 얘기도 한다. 현실과 픽션 사이의 구분을 흐트러뜨리면서 서사적인 흐름을 방해하고 분열시키는 것이 아마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에 해당할 것이다. 변호사의 서문과 나중에 그것을 뒤집는 작가의 글을 붙이는 소설의 구성 방법도 전통적이지 않고, 의도하지 않았을 포스트모더니즘 효과를 거둔다. ◆예술이라는 피난처 험버트와 롤리타의 (일방적인, 혹은 위계에 의한?) 사랑의 도피는 롤리타의 도주로 막을 내린다. 3년 추적 끝에 험버트는 퀼티라는 사람으로 밝혀지는 연적을 찾아내어 롤리타를 가로챈 벌(?)로 그를 살해하고 자신은 투옥된다. 인생을 롤리타에게 쏟아부은 험버트는 더는 님펫이 아닌 롤리타로부터 판정을 받는다. 롤리타는 "그 사람은 내 가슴에 상처를 남겼고 아저씨는 내 인생에 상처를 남겼을 뿐"이라고 말한다. 씁쓸하고 아름답지 않은 현실의 확인임이 분명한 이 판정이 험버트에게 무슨 의미일까. 한참 시간이 지나서 뜬금없이 연적을 죽이는 것만이 험버트에게 그의 사랑의 무게를 입증하는 유일한 방도였을까. 액션 영화에서 나타나듯 깔끔한 억지스러움 대신, 약간 코믹하고 더 현실감 나는 느낌으로 이 장면이 그려진다. 그들은 초라하게 씩씩대고 싸우며 결투다운 결투를 해내지 못한다. 총을 잘 쏘지도 못하는 가운데 어렵사리 도달한 찌질한 결말을 통해 험버트는 무엇인가를 증명해 내었다고 하겠다. 그것이 사랑일까, 인생일까, 아무것도 아닐까.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라는 소설 속 대사는, 결국 애초의 논의, 즉 문학의 현실개입을 소환한다. 소설에서 험버트가 한 말이지만 험버트의 얘기가 아니라 작가가 롤리타와 험버트라는 사람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불멸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는 길이 이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영어 소설 중 가장 유명한 도입부로 알려진 '롤리타'의 첫 문장을 기억하는 게 나쁘지 않겠다. 결말은 어차피 해피엔딩일 수 없었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를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서 있는 사 피트 십 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다."(민음사 번역본)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