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의 시시일각] 미술, 저항의 언어로 쓰는 진실의 기록
미술은 정치적, 자본주의적 계급과 그것으로부터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애도의 목소리를 담는다. 세상에 만연한 온갖 탄압과 불평등, 노동, 난민, 소수성, 가난을 대리하고 저항하는 언어로 쓰는 진실의 기록이다. 또한, 전시는 사회와 예술의 접점에서 발견·수집된 역사를 포함한 현실의 뒷면을 조직화해 보여주는 투쟁의 실험실이다. 학제 간, 장르 간에 놓인 고정적 미의식이 해체되는 무대이면서 혼돈의 현재를 반추하는 성찰의 장이다. 이러한 미술과 전시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온 곳은 '카셀도큐멘타'(Kassel Documenta)이다. 5년에 한번 독일에서 개최되는 이 국제 미술행사는 모더니즘 작가들을 '퇴폐예술가'로 규정해 추방하거나 약탈한 나치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피폐화된 도시의 재건을 위해 카셀 쿤스트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예술가였던 아놀드 보데에 의해 1955년 설립됐다. 그러나 설립 의도와 달리 처음엔 그저 그런 독일용 행사였다.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건 스위스 태생의 큐레이터인 하랄트 제만이 감독을 맡은 1972년 제5회부터이다. 이미 '태도가 형식이 될 때'(1969)라는 전시를 통해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면모를 보여준 그는 반체제, 반문화 운동이었던 프랑스 6·8혁명(1968) 이후 유럽의 변화를 전시에 반영했고, 이러한 예술의 본질과 역할, 정치적 상황과 현실을 내세운 미술은 카셀의 정통성이자 오늘의 카셀을 만든 반석이 되었다. 가장 근래 개최된 2017년 '카셀도큐멘타 14' 역시 특유의 미적 투쟁의 성격을 담보했다. 스위스 바젤 쿤스트할레의 디렉터를 지낸 아담 심칙이 큐레이팅한 '카셀도큐멘타 14'는 서구 예술의 정신적 축이지만 최근 경제적 변방으로 밀려난 그리스의 위상을 '아테네에서 배우기'라는 주제 아래 기존 정치체제와 도덕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을 장르와 형식의 경계 없이 전개시켰다. 비록 전시 종료 이후 예산문제가 대두되긴 했으나 시각예술을 통한 현실에의 시선과 금기에의 도전은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일례로 주(主) 전시장인 프리드리히 광장엔 3만권의 금서(禁書)로 만든 신전이 세워졌고, 1933년 나치에 의한 분서갱유가 일어난 장소인 프리데리치아눔 굴뚝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 다니엘 노어의 작품 '날숨 운동'(2017)이 설치되었다. '금서의 신전'은 유럽이라는 그릇에 비민주적 억압과 탄압의 역사를 뒤섞은 것이었으며, 다니엘 노어의 '날숨 운동'은 과거 나치정권이 자행한 폭력과 학살에 희생당한 영혼을 위로하고 자유의지를 연기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역사의 과오를 상기시키며 동시에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가자는 다층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폭격으로 사라진 팔레스타인의 418개 마을을 텐트에 나열한 에밀리 자키르, 미국과 멕시코 국경선에서 죽은 이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미국의 안드레아스 보워스, 난민 위기를 콘크리트 관 20개를 쌓아 묘사한 이라크 쿠르드족 출신의 작가 히와 케이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동시대인들에게 적용되는 비민주적 상태, 즉 억압과 탄압의 역사가 투영되어 있다. 과거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인류의 부패한 역사 속 폭력과 학살에 희생당한 영혼을 위로하고 끝내 놓을 수 없는 자유의지, 후기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위기 등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드러내어 수십 년간 이어진 이 특별한 국제미술전의 성격을 다시 한 번 뒷받침했다. 안타깝게도 카셀도큐멘타가 추구해온 현실적 발언으로서의 예술, 공론의 장은 생각만큼 흔하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네 피폐한 삶은 달라진 게 없으나 미술과 전시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자문하지 않는다. 한국만 해도 1년에 2만여 회에 달하는 전시가 열리지만 인류 공통의 문제에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 전시는 드물다. 새로운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동시대 예술과 사회, 정치와 역사, 과거와 현재의 폭력을 되묻는 작품들도 보기 어렵다. 대신 그 자리엔 장식으로서의 미술, 얄팍한 대중정서와 자본주의의 노예임을 고백하는 장면이 들어서 있다. 위선으로 점철된 가식의 조형이 판을 치고 연예인을 비롯한 어중이떠중이들이 미술판을 기웃거리며 강제된 질서를 부여하는 양태도 가득하다. 한편으론 다들 허옇게 흐리멍덩한 눈을 한 채 오로지 부자들의 주머니만 바라보고 있거나 사적 욕망 실현을 위한 미술의 도구화에 관심이 많다 싶기도 하다. ■ 홍경한(미술평론가·DMZ문화예술삼매경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