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4> 밀란 쿤데라의 '농담'(1967년)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4> 밀란 쿤데라의 '농담'(1967년) '농담'은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외국 소설가 중 한 명인 밀란 쿤데라(1929년~)의 첫 소설이다. 어린 날의 객기로 농담 한마디를 잘못했다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고 급기야 예정한 삶의 경로에서 떨려나 15년을 우회한 루드빅을 중심으로 체코 현대사의 한 장면을 솜씨 있게 포착한 진지한 만화경 같은 작품. 전체 7부로 구성된 소설의 홀수 4개 부를 루드빅의 관점에서 끌어가며 서술의 중심 축을 잡고 헬레나와 다른 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와 메시지를 완성하는 구조를 취했다. 7부에서 루드빅을 포함한 주요 인물의 관점이 교차하며 결론이자 각성, 혹은 화해 비슷한 것에 도달한다. ◆똥 싸는 여인 쿤데라의 대표작이라 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마찬가지로 '농담'에서 똥 싸는 장면은 중요한 사건이다. 또는 그저 장식일 수도 있으나 분명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농담'은 15년에 걸친 사건이 마무리되는 사흘을 그린다. 물론 그 사흘엔 통조림에 과일이 담기듯 15년이 충실하게 담기고 헬레나가 똥을 싸는 수치스러운 장면으로 일종의 화룡점정을 맞는다. 루비딕은 제마넥을 포함한 어린 시절 자신의 '동지'들이 자신의 청춘을 앗아간 것에 대한 복수로 제마넥의 아내 헬레나를 유혹한다. 유혹은 성공한다. 하지만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유혹의 성공이 복수의 일격이 되지 못하고 역으로 제마넥을 도와주는 꼴이 된다. 제마넥은 헬레나에게서 벗어나 다른 젊은 여자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루드빅이 과거로부터 날아온 돌에 맞고 다시 그 돌을 (제마넥이 아닌, 제마넥을 위해?) 헬레나에게 집어 던지는 형국으로 묘사된다. 그 돌을 맞은 헬레나는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비장하게 죽음을 결행한다. 그러나 주어진 것은, 운명의 장난인지 농담처럼 변비약을 먹고 똥을 싸대는 상황. 삶과 사랑의 실패 앞에서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싸늘한 종말을 기획했으나, 시골의 냄새 나는 변기 위에 살아서 앉아 있는 헬레나는 하염 없이 똥을 싼다. 이때 누군가 헬레나가 죽은 줄 알고 억지로 화장실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헬레나를 수치와 농담의 정점으로 몰아붙인다. 유머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진지한 메시지를 가볍고 황당하게 전한 셈인데, 죽음은 똥통 위의 부활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개에 독자는 깜짝 놀랄까. 그저 웃음을 터뜨리려나. 반전은 해프닝 차원에 국한하지 않는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캐릭터 또한 이쪽에서 저쪽으로 휙 넘어가 버린다. 성숙과 성찰의 결과물일 수 있겠지만, 동시에 소설엔 불확정성을 드리우게 된다. 가장 극적인 반전의 인물은 루드빅이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 제마넥이다. 제마넥은 악의 화신으로 남아야 하고, 루드빅이 증오하는 인물로 화석화해야 하는데, 어느 사이에 루드빅과 같은 생각을 하는 비슷한 캐릭터로 바뀌어 있다. 그럼에도 과거의 사건 때문에 루드빅은 제마넥을 증오해야 한다. 증오는 남지만 증오의 이유는 없다. ◆체제 비판 또는 사랑 이야기 소설의 초점은 체제 비판인가, 아니면 사랑 이야기인가. 둘 다 다루지만 애매하다.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면, 누가 누구를 사랑한 이야기일까. 생각해보면 루치에 밖에 대안이 없어 루치에가 루드빅의 불멸의 여인이 돼야 한다. 한데 마지막에 나타나야 할 것 같은 독자의 기대와 달리 루치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소설의 문을 닫아버린다. 맥락이 해명되는 방식이 간접적인 데다 루드빅의 입장에서는 신비스럽고 갑작스럽다. 루드빅이 가장 사랑한 존재고 그의 영혼의 바닥을 긁은 이가 루치에이지만 독자나 루드빅이나 루치에에 대해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텐데 루치에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추측하고 오해하지만, 오해를 극복하려는 노력 없이, 소통의 단절과 오해 앞에서 그냥 머물러 있는 게 루드빅의 이른바 사랑이다. 루치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패배를 알리는 전보가 15년 동안이나 나를 쫓아다닌 끝에 내게 도착한 것이다." 그래서? 체제 비판도 그렇게 뚜렷하진 않다. 악의 화신이 없고, 절대 악도 없고, 전부 다 부유한다. 작동하는 체제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의도치 않게 악을 행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의도한 악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절대 악이 없기에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구조다. 통렬한 체제 비판이 없다. 파스텔 색조로 끌고 가는 방식이 쿤데라의 장점 같기는 하다. 뚜렷한 원색의 장면은 예의 똥 싸는 장면. 거의 끝부분에서 똥 싸는 장면으로 대미를 장식하면서, 화해가 모색된다. 파스텔 색조에다 농담 같고 기괴한 것을 선명한 천연색으로 던져 넣어서 비대칭과 부조리 같은 것을 드러낸다. 거기서 직면하는 인간의 소통 불능과 삶의 불가해성을 사랑과 사상의 측면에서 그려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 관점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과 다르다. '라쇼몽'은 원통을 주변의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보면서 자기 자리를 벗어날 수 없고, 코끼리 다리 만지기처럼 각각 그 원통을 바라보는 다양한 인식을 보여준다. '라쇼몽' 모델에서는 영화와 달리 끝까지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다양한 진술이 있고 그 진술들을 통해 제삼자가 진실을 구성해야 한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있음 직한 것이 진실로 선택된다. 쿤데라가 추구한 진실 또는 서사는 다르다. 가운데 일직선의 높은 벽이 쭉 늘어서 있고 벽의 이쪽과 저쪽에 속한, 반대편을 직접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양쪽에 존재한다. 서로 자기 쪽 벽에 그려진 그림을 얘기해준다고 하자. '라쇼몽' 모델과 달리 고정된 자리에 구속된 게 아니기에 벽을 타고 따라가며 이야기가 쭉 전개된다. 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양쪽의 사람들은 만나서 지난 이야기를 복기한다. 벽 이쪽과 저쪽 각자의 상황을 읊어주며 이야기가 흘러가고 역사가 이어진다. 한 사람의 시각으로 통일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면서 오해와 소통 불능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구조상 완벽한 서사가 불가능하다. 불완전하여 주석이 필요하고 뭔가 채워져야 하고 조금 더 탐구가 있어야 하는 모호한 결말의 서사이다. ◆"다른 사람들은 움직이는 거울에 불과" '농담'은 세대 문제를 명확하게 다룬다. 루드빅은 끊임없이 청춘과 지금을 대비한다. 37살인 자신을 늙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엔 '늙었다'가 가능한 판단이다. 그리고 15년 전 청춘기의 저주를 얘기한다. 그 시절과 지금을 대비하고 그 시절의 자신과 친구들, 그리고 지금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어떻게 갈등했고, 어떻게 화해했고, 어떻게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루드빅은 꼰대인 게 확실하다. 청년 시기에 대한 저평가가 뚜렷하다. "다른 사람들은 움직이는 거울에 불과한 그런 바보 같은 서정적 나이에 대한 분노였다"라는 말에서 '서정적 나이'는 청춘기를 의미한다. 원숙하지 못해서 저질렀던 청춘기의 (농담을 포함한) 실수가 37살이 돼서도, 그 농담이 연장되고 마지막 농담을 통해서 반복되는 상황에서, 소설의 종결부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루드빅은 친구와 화해하고 같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자기가 빠져 있던 증오와 자기폐쇄의 구조에서 벗어나고 있다. 과거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부정적이다. 현재가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과거만큼 부정적이지는 않다. 떠나온 곳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불편함을 드러낸다. 그러한 대비가 다른 것보다 뚜렷하니, 그렇게 보면 사랑 이야기나 사회 비판 소설보다는 성장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통시적인 구성을 취하면서 그 시대 개인들의 변화를 예민하고 흥미롭게 또 위트를 잃지 않고 잡아낸 일종의 성장 소설이라고 해두자. 축제가 중요하다. 오해의 확인과 화해의 현장이자, 세대 간의 명확한 단절이 드러나는 곳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서술 분위기와 달리 결말은 '자연스럽다'. 억지로 사람들을 막 불러 모아서 화해시키지 않는다. 화해할 사람은 하고 그 화해도 부분적으로 행하고, 떠날 사람은 떠난다. 제마넥은 자신을 존경하는 젊은 제자를 데리고 멋지게 프라하로 떠난다. 축제에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지지고 볶는다. 똥 싸는 헬레나는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고, 헬레나에게 곤경을 선사한 미욱한 헬레나의 숭배자도 남는다. 루드빅도 남아서 옛 친구와 화해한다. 4부의 화자이자 7부의 공동 화자인 야로슬로브는 옛 친구와 화해하며 한때는 각광받았지만, 이제는 사회적 의미를 잃어버린 음악 공연의 의무를 다하고, 갑자기 심장마비에 걸려 숨진다. 훈훈한 결말은 어떻게든 회피된다. 전체적으로 파스텔 색조로 흘러가다가 가끔 '농담'의 장치를 가동해 참을 수 없는 설사인 양 천연색으로 쿡쿡 찍어서 반전을 꾀하지만, 결정적으로 메시지 자체는 자제된다. '농담' 프랑스어 판 서문에서 루이 아라공은 "금세기 최고의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 주는 소설가"라고 쿤데라를 치켜세웠다.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