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6>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1877년)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6>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1877년) -도축용 도끼에 잘려나가는 인간의 머리들을 과학으로 그리다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에밀 졸라(1840~1902년)의 소설 '목로주점'은 자체로 훌륭한 문학작품이지만, '목로주점'이란 나무가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라 숲을 이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목로주점'은 '나나', '제르미날' 등과 함께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에 속하는 소설이다. 이 총서는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의 후손의 이야기를 20권에 걸친 소설로 구성한 대기획물로 '목로주점'이 총서의 일곱 번째 작품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년)의 '인간희극'에 비견된다. 물론 그렇다고 '목로주점'을 단독의 예술작품으로 읽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프랑스 제2제정시대의 파리 하층민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소설로, 그 자체로 높은 완성도를 달성했다. ◆사실주의의 주체가 만취하면? 국내에서는 '목로주점'과 '나나'가 유명하다. '나나'가 귀부인, 귀족, 음모, 몰락 등 전형적인 프랑스 소설의 소재를 다루었지만 '목로주점'은 계층 간 사다리를 치워버리고 밑바닥 인생만 집요하게 그리는 방식을 취한다. 사다리 위로 올라간 인물은 이 소설에서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졸라가 적용한 자연주의 방법론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그는 "자연주의 소설은 과학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소설에서) 유전과 환경이 인간의 지적이고 감정적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적인 질서가 상대적으로 온존한 가운데, 존재하되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주체가 세계와 조화롭고 자연스럽게 융화하는 것을 고전주의가 그리려고 했다면, 고전주의에 반기를 든 낭만주의는 세계와 불화하는 주체가 세계와 맞서 (없는) 활로를 찾는 구조를 모색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계몽주의의 세례가 있어야 한다. '나'가 세계의 중심이다. 사실주의나 특히 사회주의 문학은, 택일하라면 '나'보다는 세계이다. 세계의 상을 충실하게 그려내려 노력하면서도 사회주의 문학은 낭만주의나 계몽주의를 통해서 발굴된 주체의 가능성을 보듬는다. 세계를 투영함으로써 자아나 주체의 변화를 촉발해서 다시 세계를 개조해 나가려는 욕망 같은 게 사회주의적인 틀이다. 같은 계열로 보이는 자연주의에서는 주체가 다시 희미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세계가 너무 강하다 보니 '나'는 그저 세계의 부속물이 된다. 조화롭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을 뿐이다. 자연주의는 이처럼 신적인 질서를 중심으로 한 고전주의와 기이하게 맞닿아 있다. 졸라의 생각으로 유전은 우리가 어쩌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신적인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환경은 사회적인 영역이 된다. 신적인 영역과 인간적인 영역이 주체에게 각인되고 주체에 영향을 미쳐서 지배당하는 주체의 양태를 표현한 게 자연주의인 셈이다. 사실주의를 계승 혹은 발전시켰다고 하지만 주체는 더 희미해지고 더 허약해진다. 사실주의의 주체가 만취하면 자연주의의 주체가 된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다. 졸라가 서 있는 소설론이다. ◆불편한 소설 이 소설은 공화파와 사회주의 언론으로부터는 인민을 모독했다고 공격을 받았고 대문호로 추앙받은 빅토르 위고는 "비참과 불행을 그토록 적나라하게 묘사할 권리가 (소설가에게) 있냐"고 비난했다. 졸라가 이러한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소설을 쓴 이유는 뭘까. 1877년 '목로주점'을 출간하면서 졸라는 서문에서 "나는 스스로를 변호할 생각은 없다. 내 작품이 나를 변호해줄 것이다. '목로주점'은 진실을 담은 작품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은, 민중의 향기를 머금은 최초의 민중 소설이다"라고 말했다. 가난하고 술에 절었고 폭력이 난무하고 탈출구가 없는 전형적인 도시 하층민의 삶이 가난의 결과냐 아니면 그들이 그러한 인간이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냐를 묻는다. 무책임한 얘기 같지만 두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 소설의 주인공을 한 명만 꼽으라 하면 세탁부 제르베즈다. 제르베즈의 인생은 22살까지와 22~40세까지의 두 개의 삶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서 역경과 가난에도 불구하고 건실하고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건강한 인간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르베즈는 무너진다. 거기서부터 그가 의도치 않은 악인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악인이 되려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 자발적인 사악함의 개입 없이 자연스럽게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결국 선의 결여 상태가 되는 과정이 나온다. 일하고 먹고 잘 수 있고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고 매 맞지 않고 자기 침대에서 죽는 게 제르베즈의 소원이다. 이 소박한 소원에 비해 과도하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전적인 요인이든 주변 사람들의 간계와 흉계에 의해서든 어느 순간 좌초한다. 자신도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폭력의 희생자이자 가해자가 되며 최악의 인간으로 잦아든다. 작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보여줌으로써 사회를 고발한다. 유전과 환경이 인간의 지적이고 감정적인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그린다는 문학론이 그대로 관철된다. 다만 문학의 기능에서 증언하고 진단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면 문학 너머에서 졸라는 사회개혁을 말한다고 봐야 한다. 왜 나불거리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냐고 종종 비난하는데,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는 나불거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실천이 된다. 작가가 이 부류의 대표적 인물이다. ◆'딜레마 게임'과 죽음의 헤피엔딩 소설에서 작동하는 전형적인 사회구조는 '딜레마 게임'이다. 등장인물들은 최선의 해를 찾아낸다. '딜레마 게임'의 전제는 게임의 플레이어를 서로 차단하는 것이다. a와 b가 제일 나은 선택을 찾아 나갈 때, a와 b가 차단돼 있다면 각자는 스스로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전체의 이익을 줄이게 되지만, 전체로도 개인으로도 손해를 보는 것이 '딜레마 게임'에서는 합리적이다. '딜레마 게임'에서 각각의 개인들은 공공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합리적이지 않다. 공공선을 배제해야만 합리적이라는 게 '딜레마 게임'의 결론이다. 물론 플레이어는 공공선은 물론 합리성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이기심을 내세우지만 이기심을 밀고 나간 것이 가장 합리적임이 사후적으로 입증된다. 사악해지는 게 최선이다. 한데 바보처럼 제르베즈는 가끔 다른 선택을 내린다. 동화적인 구조도 보인다. 역경에 처하고 헤매다가 조력자가 나타나 극복하는 방식. 문제는 독사과를 먹이려는 사람은 너무 많고 집요한 반면 조력자는 너무 적다. 소설은 잔혹동화처럼 끝난다. 제르베즈가 죽고 그의 장례에서 "자 이제 행복할 거야 아름다운 그대 이제 잘 자"라고 누군가 말한다. 마침내 행복해진다. 작가가 전하는 유머일까. 그곳에서 행복하기 바라지만 그곳을 탈출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 구조이다. 죽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역설적 해피엔딩. ◆룸펜 대 노동자 주인공들은 룸펜이다.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가 발견된다면 노동자 계급의 언저리를 맴도는 인물 정도이다. 대부분 무위도식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다. 전통적인 사회주의에서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의 동력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제정 시대에 사회주의 혁명에 반하는 세력으로 동원되곤 하였다. '목로주점'은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가진 즉자성과 비혁명성, 그리고 부르주아를 능가하는 속물근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부르주아에게서 나타나는 허위의식과 속물근성이 있다면 여기도 마찬가지로 복제된 속물근성과 허위의식이 최악의 형태로 분출한다. 후대의 미국 소설 '분노의 포도'와 비교하면, '분노의 포도'의 등장인물들은 떠돌이들이긴 하지만 다 노동자이다.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고용주에 맞서 싸우고 임금 인상을 위한 스트라이크를 일으킨다. 마지막에 좀 작위적이긴 하지만 동지적인 유대, 세계시민적인 연대를 보여준다. 현실에서 보는 룸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는 그런 게 작동하지 않는다. 도둑, 극빈자, 창녀가 판을 치면서 하루하루 벌어먹고 "내일 일은 난 몰라요"하며 산다. 대미 또한 계급적 특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기 신체 결정권의 상실. 자살이 문맥에 따라 가장 존엄한 삶의 선택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이 선택할 수 없다. 노동을 잃어버리고 자아를 잃어버리고 결국 인간이 아닌 상태로 죽음을 맞는, 진짜 바닥에 도달한 삶을 그렸고, 마지막에 자연사한 제르베즈에게 "너는 행복해질 거야"라고 작가는 위로와 반어를 건넨다. 목로주점으로 번역된 불어(L'Assommoir)는 당시 속어로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독주를 마시는 선술집을 의미했고 단어 자체로는 원래 푸줏간의 도끼를 뜻했다. 짐승을 잡는 도끼에 잘려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고 상상할 수도 있겠다.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