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산책]응답하지 않은 사람들
지난 해였다. 수정같이 맑은 카리브 해안에서, 파도에 몸을 맡겼다. 더 강하게 작렬하는 힘을 느끼고 싶어 좀 더 먼 곳으로 몸을 옮겼다. 문득 물이 목에 차오르고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자, 아차 싶었다. 순간 커다란 웅덩이가 파여 있는지 물속으로 그대로 가라앉았다. 뭍으로부터 1백 미터도 채 안 되는 지점이었으니, 평소 수영실력이라면 별반 힘들지 않는 거리다. 한 가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물살이 거세게 이는 바다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점이었다. 앞으로 진전하나 했다가 다시 뒤로 끌려간다. 수심을 알 수가 없는 깊이였다. 얕은 바다 밑이 벼랑처럼 되어 있기도 하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필사적이 되었다. 방향을 틀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조금만 더 가자. 숨이 차고 팔에 기운이 빠지려한다. 파도는 등 뒤에서 계속 몰려오고 나는 잠겼다 떠오르다 하면서, 난파선같이 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내 앞으로 플라스틱 보드가 쑥하고 미끄러져왔다. 어디선가 구조원이 그걸 구명대처럼 던진 것이다. 이제 지금의 시간으로 돌아와 보자. 세월호가 침몰하는 속도는 애초에 그리 빠르지 않았다. 최초의 탈주자들을 구하러 간 해경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있었던 때였다. 불이 난 건물에 소방대원이 뛰어 들어가 생존자를 찾아 살려내는 것과 같은 장면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배가 기울고 물이 들어오면 안에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없는 물리적 환경이 만들어진다.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뒤집힌 쪽 반대로 이동하거나 또는 창문 가로 몰려가서 구조대가 오는지 애타게 기다리고, 구조원이라도 나타나면 여기 사람 있다고 격렬하게 신호를 보내고 싶게 마련이다. 우리는 여객선 창문 곁에 몸을 기대고 비상상황에 대처하는 아이들의 마지막 사진도 보았다. 무심한 햇살이 선실 안으로 비치고 있었고, 아직 잠수부 투입을 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었다. 완벽한 구조는 조난자의 생존본능에 따른 움직임과 구조대의 재빠른 행동이 정확하게 만나면서 이루어진다. 이 생존본능의 행동방식을 측정하지 않는 구조는 이미 구조가 아니다. 선체가 반 이상 물밖에 있을 때, 배안의 절규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현장에 있으면서도.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