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봉의 도시산책]경기 안산 - 안산에서 만나는 <상록수>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을 여행하다 보면 그네들이 문화를 대하는 태도에 종종 감탄하곤 한다. 도로나 지하철역과 같은 공공시설물은 물론 심지어 도시 이름에까지 문학가나 음악가, 철학가 등의 이름을 붙여둔 것도 한 예다. 국내 사정은 어떨까. 서울의 경우 '군인 대통령' 시대를 거치며 을지로나 충무로 등 역사 속 군인들에게서 명칭을 따온 적은 있다. 그 외의 사례는? 글쎄, 가물가물하다. 최근 도로명 주소체계를 도입하면서부터는 '벚꽃로'나 '행운길' 등 그 지역의 문화적이며 역사적인 맥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름들이 되레 많아졌다. 경기도 안산시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인 안산시에는 두 개의 구가 있는데 '단원구'와 '상록구'다. 단원구는 조선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인 단원 김홍도에, 상록구는 지난 1930년대 일제의 극악한 수탈로 피폐해진 조선의 농촌에서 벌어지고 있던 계몽운동을 다룬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기원을 두고 있다. 비록 김홍도와 관련해서는 그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이 안산에 살았기에 김홍도도 그곳에 살며 글과 그림을 배우지 않았겠느냐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만, <상록수>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전철4호선 상록수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최용신기념관이 있는데, 바로 소설 속 여주인공인 채영신의 모델이 된 최용신 선생(1909~1935)을 기리는 현장이다. 최 선생은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지도사업과에 재학 중이던 1931년 YWCA교사로 샘골, 그러니까 지금 상록수역이 있는 안산시 본오동 일대로 파견되어 샘골강습소를 열고 피폐한 농민들을 위한 교육과 계몽활동에 평생을 바쳤다. 현재 최용신기념관 한쪽에 놓여있는 커다란 돌들은 샘골강습소를 증개축할 때 썻던 실제 주춧돌들이다. 올해는 그저 이상으로서의 계몽을 앞세우는 낭만적인 수사의 한계를 벗어나 구체적 상황에 입각한 농민문학의 기틀을 확립한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특별공모에 당선된 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안산시, 특히 상록구나 상록수역 주변을 지날 때면 최용신기념관에도 한 번 들러볼 일이다. 우리사회에도 이런 기념관이 있고, 또 이렇게 문학을 기리는 명칭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뿌듯해진다.